지난번 노무현 대통령이 월남에 가서 한국은 월남에 마음의 빚이 있다고 말했다던가요.....

 

빚이라...음...글쎄요,

나는 월남에 참전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 시대를 바라본 사람으로서 몇 가지 생각의 단편들을 펼쳐볼까 합니다.

 

군대에 입대하여 최전방에서 생활하다보니 겨울이 금새 다가오더군요.

그 힘든 고역중에 고참병의 식기를 닦아주는 일이 있었는데...한 겨울에 산골자기에서 흐르는 냇물에 열 개가 넘는 식기를 닦는 다는 일이 쉬운일이 결코 아닙니다. 엄청 손이 시렵죠.

 

결국 동상이 걸렸는데..손가락 마디마다 칼로 베인 것 처럼 살이 갈라지고 구부러지지를 않는 겁니다.

첫 휴가는 다가오고 손가락은 안 구부러지고...큰 일 났더군요. 어머님이 보시면 기절하실텐데....그래서 휴가 열흘 전부터 더운 물에 손을 담가 피부를 불린 후 면도칼로 굳은 살들을 깎아내었습니다.

 

<월남 병장>

이럴 즈음에 월남에서 돌아온 병사들...월남 병장...이 속속 부대로 전입하여 왔는데...그들이 이야기하는 월남은 낙원이더군요.

 

"이봐, 여기에서는 병기청소에 취침점호도 괴롭지? 월남에서는 저녁을 먹고 인원파악만 하면 점호 끝이야."

"점호가 끝나면 매점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텔레비젼을 보지"

"C-레이션 고기 통조림은 처음 전입온 쫄병들이나 먹는다고, 고참은  K-레이션의 김치, 고추장 찾아먹고...."  

 

뭐시라? C-레이션의 고기 통조림 알기를 뭣같이 안다고? ....그리하여 나는 그 날로 월남에 자원하게 됩니다만... 내가 자원했을 때에는 월남전은 이미 끝물이었으며 내 앞에는 먼저 지원한 병사들이 30명이나 적체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어떤 병사가 되었을까...>

내가 참전했더라면 나는 어떤 병사가 되었을까요...물론 용감한 병사겠죠.

아마도 내 눈 앞에 비실비실한 베트콩이 있는 경우...나는 서슴없이 방아쇠를 당겼을 겁니다.

또 내 전우들이 어느 마을에서 테러를 당했다면 아마도 ....그 마을을 싹쓸이하는 행위에 일조했을 것으로 봅니다.

내가 학살행위에 까지 적극 나섰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행위를 목격해도 적극 제지할 용기나 신념은 지니지 못했을 것이구요.

여하튼 나는 "무찌르자 공산당"을 노래하며 자란 냉전의 세대로서 국가가 공인한 적에 대하여까지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줄 그런 젊은이는 아니었습니다.

 

 

<그 전쟁에 대한 이미지>

 그런데...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는 "월남 참전"이라는 직접적인 경험이 없으므로 내가 "월남에 대하여" 안다고 하는 것은 거의가 다른 사람의 경험담이 내 안에서 축적되며 만들어 낸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들이 나의 안에서 그 전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내가 갖고 있는 기억이 주는 의미는 무언가...하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병사들의 고생...월남에서 온 김병장>

"수색을 나갈 때면 수통을 몇개씩이나 차고 나가는데 그래도 물이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였어.

결국 자기의 소변을 받아 커피를 타서 마시곤 했지...한 번은 길가에 물소들이 지나간 발자국이 패여 있었는데...그 패인 발자국에 물이 고여있는거여...병사들이 우르르 달려가서 그 발자국에 고인 물을 핥아마시는데 중대장은 총알 맞고 싶어 환장했냐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더구먼."

 

<챙겨먹기...함께 사우디에서 근무한  UDT 출신의 김과장>

"다낭항에서 물자를 하역하는데 어느 날, 그 곳에서 일하던 나이 많은 아주머니가 젊은 여자를 데리고 나온거여...며느리라고 하더군. 남자는 포탄에 맞아죽고.

내가 이 여자에게 일거리도 만들어주고 레이션도 생기면 주곤 했지...얼마가 지나자 이 여인이 날 보고 자기가 좋냐고 하더군...그렇다고 했더니 바로 몸을 대주는거야. 그날은 결심을 하고 나왔던 모양이더라구...돌이켜보면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잔인함의 몰인식....내가 근무하던 연대 하사관들의 이야기>

"연대 수송부의 "김 중사" 말야. 그놈은 여자 베트콩의 성기를 동그랗게 오려내어 말린 것을 갖고 다닌다구. 그걸 몸에 지니고 고스톱을 치면 끝발이 기가막히다더군."

 

<능욕, 살인의 무감각....태권도가 4단인 직장의 선배>

수색을 나갈 땐 소총도 안주고 권총이나 수류탄만 지급하는 경우가 있었어. 어느 촌락의 길 옆에서 처녀를 하나 잡아서 집단으로 능욕을 했지...그리곤 처치했어, 여자가 신고하고 어쩌고 하면 골치가 아프기 때문에 살려둘 수가 없어..다 그랬어"(차마 "죽였다는 말이요?" 하고 물어볼 수가 없었음)

 

<전쟁의 비참함...안케전투에 참전한 10중대 인사계>

그 날 오후가 되니까 죽은 병사들을 헬리콥터로 계속 실어오더군. 의무병과 둘이서 떨어져나간 팔다리들을 시체에 꿰매어 붙였어. 당연히 다른 녀석의 팔다리를 붙이는 수도 많았겠지.

 

<한 여인의 비극....논산 25연대 교관이던 경상도 출신의 대위>

포탄이 터지면서 어린 소년이 나가떨어졌어....피범벅이 된 녀석을 찝차로 옮기는데 이미 죽은 목숨이더구만.

그런데 그 녀석의 엄마가 길바닥에 떨어져나간 아이의 살점을 주워 자신의 가슴패기에 넣으면서 울고 불고 따라오는거야...

 

그렇습니다.

나의 안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주워 담겨져서 그 전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러한 기억들이 지금까지 내 안에 남아서 무슨 일을 하고있죠?

언젠가 이 블로그에 쓴 남영동 굴다리에 대한 이야기에도 비추었습니다만...

이런 기억들은 온전히 위로받지못한 기억으로서 내 안에서 그 의미가 완전히 소화되기 전 까지는 끊임없이 반추될 그 무엇이라고 봅니다.

 

이 땅에 남아있던 나도 그 전쟁은 피할 수 없어서 그 전쟁의 고통스러운 파편들이 내 가슴에 박혀 핏값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죠. 내가 그러하다면 나와 같은 세대를 공유한 다른 분들에게도 이 고통의 파편들은 반드시 박혀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밑천삼아 그 전쟁이 어떠한 전쟁이었다고 정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섣부른 정의가 내 안에 박혀있는 고통들의 아우성을 허망한 말로서 번역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그냥 들은대로 원본을 간직하고 싶습니다. 세월이 가고 나 스스로 그 고통을 더욱 더 깊이 이해한다면 제 값을 받은 기억들이 스스로 떠나겠지요.

 

 아! 위에서 말한 태권도 4단의 선배말입니다.그 분이 이런말을 했어요.

 

" 월남에서 귀국하여 세월이 흐르니까 온 몸이 가렵기 시작하는거야...고엽제 말이네.

어떤 때에는 너무 가려워서 잠을 잘 수도 없어...그럴 때는 헤어 드라이어로 가려운 곳을 말려주며 밤을 새우기도해...."

 

" 나만 당한다면 그래도 감수하겠어...아들 녀석이 장성하면서 이 녀석마져 긁기시작 하는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겠습니까...그냥 바라보고 나의 몫을 감수할 뿐입니다.

 

 


 
가져온 곳: [코주부 하우스]  글쓴이: 코주부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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