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나 장승이 치우천왕....(우주인이다)
황제(黃帝)란??
《사기(史記)》에 의하면 황제는 이름을 헌원(軒轅)이라고 하며 당시의 천자 신농씨(神農氏)를 대신하여 염제(炎帝) ·치우(蚩尤)
등과 싸워 이겨 천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 책자가 황제에 관하여 전하는 바는 다양하여 원래는 ‘번쩍번쩍 빛나는 천제(天帝)’를 의미하는
황제(皇帝)와 같다고 한다. ‘黃帝’라고 씌어진 경우는 오행(五行)의 중앙인 ‘토(土)’에 해당하며, 중국 문명의 개조(開祖)로 간주되었다.
(자료보기)"아래그림은 황제와 뿔달린 치우"비행접시로 보이는
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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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700년경 배달나라(檀國)의 제14대 자오지 한웅 (桓雄)인
치우천왕"
치우(治尤 혹은 蚩尤)는 상고시대(BC2700년경)의 인물 로서 이른 바
'천하융사지주(天下戎事之主)'라고 평가되던 전설적 영웅이다. 이에 관해서 중국측과 우리측 모두 관련 기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중국측 기록에는
매우 곱지 않게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우리가 치우천왕 (황)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그러 하다. '치우는 노산의 쇠로써 오병을 만들었다. 그런데 치우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중략) 황제가 섭정을 할 때 치우와 그
형제 81명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짐승의 몸 에 사람의 말을 하였다. 구리 머리에 소의 이마를 가졌고 모래와 돌을 먹었다. 병장기로
칼·창·큰활 등을 만들어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 '
<사기(史記)>"
사기의 내용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사람이
모래 와 돌을 먹었다니. 그러면 괴물이었단 말인가?
사마천은 왜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
그 까닭은
치우가 다름아닌 동이(東夷)겨레의 수장 이 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치 우에 관한 몇가지 단서를 알 수 있다.
적어도 치우가 각종 병장기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상고시대 금속제 병장기를 만들었음은 고도의 기술 수준 이 바탕이 되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 당시 우리 겨레의 기술수준이 높았던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매우 높은 금속관련 기술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관한 우리측의 기록물을 보면 치우와 동이겨레의 수준이 적나라하게 확인된다. 우리측 기록에 치우는 일명
'치우천왕'으로 통칭되던 존재였다. 그리고 치우천왕의 치 적을 몇가지로 추려보면 벽토지(闢土地), 흥산(興産), 작 병(作兵) 및 연병(鍊兵),
그리고 뛰어난 숭생중물 (崇生 衆物)의 치세이념을 구현했다는 것이다.
벽토지란 산과 계곡을 뚫어 길을 냈음을 말한다. 교통 의
발달을 꾀한 것이다. 흥산이란 산업을 진흥시켰다는 것 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기>의 일부 내용처럼 노산 등지의 광물을 뽑아
제련사업을 일으켰던 것이다. 특히나 이때 치우천왕은 구야(九冶)라고 하는 일종의 기술부대를 운용하였다고 한다.
제련산업 일으키고
기술부대 운용도 또한 작병이란 각종 병장기를 만들었음을 말하는 것이요, 연병이란 강력 한 군대를 길렀음을 뜻한다.
그리고
숭생중물이란 치우천왕의 치도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이다. 이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온갖 물상의 존귀함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치우천왕은 그야말로 문무겸전의 이념으로 겨레의 앞날을 열고자 땀흘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이겨레 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던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동이겨레가 늘 외경하던 '밝은 하늘의 뜻'을 무시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이단성을 주도하던 인물 이 한족(漢族)인
공손헌원이었다.
그리하여 치우천왕은 공손헌원과 일전을 별렀다. 그러 던 중 마침내 공손 헌원족의 한갈래인 '소호'의 부대와 맞 붙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치우천왕은 각종 기술과 기상을 조화하여 커다란 안개를 펼쳤다고 한다. '소호'의 부대는 앞을 가리지 못한 채 괴멸하여
갔다.
이 전투가 끝난 뒤에도 '공손헌원' 부대는 치우천왕 측에게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물과 불을 마음껏 다스릴 줄 알았던
치우천왕측을 도저히 담당할 수 없었다. 게다가 치우천왕의 놀라운 웅략(雄略)이 그들을 압박하였 다.
이른바
'분출사도(分出四道)'라고 하는 전법이 공손 헌원 부대를 여지없이 깨뜨려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치우 측은 '돌날림치게'라는 신전투장비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치우천왕부대는 대승하였다. 뛰어난 전법과 신장비의 효과가 컸던 것이다. 그리하여 치우천왕은 겨레 의 오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치우천 왕은 각종의 기와에 '도깨비'무늬라고 하여 남아있다. 어느덧 치우천왕의 영웅적 자취는 엉뚱한
도깨비 환상으로 옮겨진 것이다.
어쨋거나 치우천왕의 웅략은 소중한 우리의 정신자산 이 분명하다. 몹시 어려운 오늘에 있어 더욱
곱씹어 볼만 한 가치가 있으리라.
기왓장 도깨비문양으로 남아있는 치우천왕의 놀라운 지혜
박선식
<민족병학문화연구가>
1998.5.14.자 뉴스메이커지(경향신문사)
치우(蚩尤) (?∼?)
배달의 제14대 환웅(桓雄)인 자오지 천황. 치우(蚩尤)는 세속에서 부르는 별칭이다.
이 분은 머리에 최초로
철두갑을 만들어 써서 동두철액(銅頭鐵額 : 구리머리에 무쇠이마)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당시에 채광주철(採鑛鑄鐵)을 하였으며
치우천황이 갈노산겳槪;遠 쇠를 캐내 투구ㄱ㈎?칼겷 등을 만들었다. 자오지 천황
은 신농의 마지막 후예인 8대 임금 염제
유망(楡罔)이 쇠퇴하는 것을 보고 서방으로 출정하였다. 처음에 유망이 대패하여
수도인 공상(空桑)으로 도망가자 이를 일거에
멸한다. 이 때 자오지 천황의 공상 입성 소식을 듣고 서방의 한족문화권을
통합하려는 웅지를 품고 있던 황제 헌원이 천자의 뜻을
나타내며 대군을 일으켰다. 이에 자오지 천황과 헌원과의 사이에
탁록에서 일대 대결전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당시 10여년 간
73회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치열한 격전이었다. 치우
천황은 법력이 고강하여 큰 안개를 잘 지었다. 탁록의 싸움에서는 헌원이
치우천황의 안개술법에 대항하기 위해 방향을 가
리키는 지남차(指南車)를 만들어 싸웠다. 이 때 치우천황의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급공을 하려다 오히려 진중이 몰살당
하였고 이에 노기 충천한 치우천황은 ‘비석 박격기’를 최초로 제작하여 헌원의 군사들이 항전을
못하게 하여 황제의 항복을 받고 그를 신하로 삼았다.
치우천황은 수천 년 동안 한민족은 물론 한고조 유방과 진. 한시대의 중국
백성들에게까지 위력적인 숭배와 추앙의 대상
이 되어 왔다. 중국 진·한 대의 백성들이 치우천황에게 해마다 시월에 제사를 지내면
‘붉은 기운이 반드시 뻗쳤다’고 한다.
이를 사람들은 치우기(蚩尤旗)라고 불렀다. 중국인들이 동방 배달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부른
것은 치우천황이 큰 활을 만들어 쓴 이 때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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