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가오 해협 해전 - 죽음의 야간 행진

   한편, 술루 해를 지나 수리가오 해협을 통과할 목적으로 작전에 임한 니시무라 제독의 제1유격함대 지대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24일 오전 이미 적의 항공기에 발각되었지만 구리다 제독의 함대만을 노린 핼지 제독의 방침에 의해 피해 없이 술루 해를 통과하여 수리가오 해협 입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도중에 미군의 공습으로 전진이 지연된다는 구리다 제독의 통신을 받았지만, 니시무라 제독은 25일 새벽까지는 수리가오 해협을 통과할 생각이었습니다.

수리가오 해협 전투의 상황도

   이 쪽을 담당하고 있었던 킹게이드 제독 휘하의 전함함대 사령관 올덴도로프 제독은, 연안감시함대와 정찰기의 보고로 일본군 출현을 일찌감치 듣고 전투배치에 들어갔습니다. 지도에서 보이듯이 파나온 섬의 남단 연안에 39척의 고속 어뢰정을 배치해 놓고, 해협의 태평양쪽 연안에 어뢰공격을 목적으로 하는 27척의 구축함함대들을 배치하였으며, 마지막으로 휘하의 전함 6척과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4척을 해협을 가로지르는 상태로 배치해 놓았습니다.

미국 해군의 고속 어뢰정(PT-Boat)
케네디 대통령이 이런 보트의 정장으로 전쟁에 참여했다고 하지요.

   올덴도로프 제독의 6척의 전함들은 1차대전때와 20년대 초에 건조된 낡은 함들로, 그 중 전함 캘리포니아(California)와 웨스트버지니아(West Virginia)는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때 침몰되었고 전함 메릴랜드(Meryland), 펜실베니아(Pennsylvania)와 테네시(Tennessee)는 대파되었던 것들인데, 후에 인양하고 수리하여 다시 전선에 참가한 함정들이었습니다. 니시무라 제독의 2척의 전함 역시 1차대전 중에 건조된 낡은 함정들로 - 일본 최초의 드레드노우트급 전함들이라고 - 30년대에 개수를 받기는 하였으나, 이번 대전 기간중에는 주로 훈련함으로 쓰이던 것들이었습니다.

수리가오 해협 전투에 참여한 양국의 전함들의 내역

이름

무장

건조

완성

비고

펜실베니아(Pennsylvania)

14inch ×12

1913.10.27

1916.6.12

진주만에서 피해

미시시피(Mississippi)

14inch ×12

1915.4.15

1917.12.18

기습당시 호송임무

테네시(Tennessee)

14inch ×12

1917.5.14

1920.6.3

진주만에서 피해

캘리포니아(California)

14inch ×12

1916.10.25

1921.8.10

진주만에서 침몰

메릴랜드(Maryland)

16inch ×8

1917.4.24

1921.7.21

진주만에서 피해

웨스트 버지니아(West Virginia)

16inch ×8

1920.4.12

1922.12.1

진주만에서 침몰

후소(扶桑)

14inch ×12

1911.5.12

1915.11.18

전쟁 중 훈련함으로

야마시로(山城)

14inch ×12

1913.11.20

1917.5.31

전쟁 중 훈련함으로

   앞에 구축함 4척, 전함 야마시로 - 니시무라 제독이 승선한 기함 - 와 후소, 중순양함 모가미의 순으로 단종진을 취한 니시무라 제독의 함대는, 23:00시경에 해협 입구에 도달하여, 숨어있던 어뢰정들에게 시달리면서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25일 03:00시 경, 해협의 북단에 숨어있던 미국 구축함들은, 니시무라 함대가 7000m에서 8000m까지 접근하자, 재빠르게 뛰어나가 어뢰를 쏘고 잽싸게 반전하였습니다. 이 공격에 어뢰 2발을 얻어맞은 후소는, 그 중 한 발이 정확히 화약고를 잡는 바람에 화약고 유폭으로 허리가 꺾이며 이번 전투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10분 후에 2차 어뢰 공격이 이루어졌고, 이 공격에 구축함 야마구모(山雲)가 폭파 굉침되었으며, 구축함 미찌시호(滿朝)도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다음에 얼마 후 다른 공격을 받고 침몰하였으며, 구축함 아사구모(朝雲)는 어뢰를 맞고 함수가 완전히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미 2발의 어뢰를 맞은 전함 야마시로는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하여 함포를 난사하면서 원래 계획된 침로를 따라 필사적으로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는...

화약고를 맞고 굉침한 일본 전함 후소

   지도에서 보다시피, 일본 함대의 숨통을 끊어버리기 위해 올덴도로프 제독의 주력인 전함 6척, 중순양함 4척과 경순양함 4척이 전방을 가로지르는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진하는 상대의 앞을 가로막고 전후의 모든 함포를 동원하여 앞부분 함포밖에 쓸 수 없는 상대를 2배의 화력으로 덮치는 이런 T자형의 배치는 항공기가 발달한 시대에는 대공 방어력이 떨어져 거의 쓰이지 않는 대형이였으나, 이번 전투 - 전함 대 전함이 맞서는 역사상 마지막 전투가 되겠다는 - 에서는 진귀하게도 공습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상황을 맞아 이런 대형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올덴도로프 제독 기함이었던 중순양함 루이스빌(Louisville)의 함장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고 합니다. "해군대학의 연습에서 구상하고 상상하고 연구하기는 하였으나 현실적으로 벌어지리라고는 도통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위치에 있었던 것이었다." 기함 갑판에 있던 올덴도로프 제독은 일본 함대가 1만5000m까지 접근해온 03:50시 경에 사격명령을 내렸고, 미국 해군의 모든 전투함은 목측 대신 레이더 사격통제장치에 의존한 사격을 일본 함대에게 퍼부었습니다. 아군 구축함이 포격에 휩쓸리게 되어 사격 중지명령을 내린 04:09시까지 모두 270발 남짓의 전함의 14inch 혹은 16inch 포탄과 4000발 이상의 순양함의 6inch 혹은 8inch포탄이 잔존 일본함대의 위에 떨어졌습니다. 니시무라 제독의 기함 아먀시로는 사격 초반에 명중탄을 맞고 순식간에 폭침하였다고 합니다. 제독 또한 그 와중에 불귀의 객이 되었을 터이지요.

수리가오 해협의 마지막 포격전. 오른쪽 빛의 궤적이 보이는 쪽이 포격을 가하는 미국 함대,
왼쪽 밝은 부분이 포격을 당하는 일본 전함 야마시로와 중순양함 모가미입니다.

   그 뒤를 따라서, 시마 제독의 제2유격함대가 또 해협으로 들어섰습니다. 서로간의 별로 안 좋은 사이 - 앞에서 말한대로 전형적인 야전군인인 니시무라 제독과 본부책상근무로 출세한 시마 제독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며, 합동작전을 벌이면 상급자인 시마 제독의 지시를 받을 것으로 생각한 니시무라 제독이 일부러 명령을 무시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고 - 와 함께 일본 대본영의 혼미한 지휘로 인하여 결국은 개별행동을 하게 되어 약간 늦게 들어오게 된 시마 제독의 함대는 이미 해협 입구에서 경순양함 아부구마(阿武 )가 03:25시에 어뢰정의 공격에 행동불능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나머지 함정들을 끌고 해협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들어선 시마 제독의 함대의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그야말로 참담 그 자체였습니다. 중순양함 나지와 아시가라는 28knot의 속력으로 어둠과 포연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해상을 전진하다가 표적이 잡히자마자 어뢰를 발사하며 뱃머리를 돌렸는데, 그 순간 포격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후퇴하고 있던 동료함 모가미를 나지가 들이받아 대파해 버렸습니다. 자신이 없던 시마 제독은 단 5분간만 해협에 머무르다가 예하 구축함들에게 어뢰를 발사하고 반전할 것을 명하고 전장에서 이탈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시마가 한 유일한 일은 니시무라 제독의 함대가 완전히 괴멸되었다는 것을 다른 함대에 전한 것 뿐이었습니다.

이 전투... 하고는 상관없는, 일본 중순양함 나지의 피격장면. 한 달 후의 일로, 여기서 어뢰 9발을 맞고 침몰합니다.

   니시무라 제독의 함대는 레이테 전투에서 가장 처참하게 괴멸되었습니다. 큰 피해를 입은 데에다가 막판에 아군 중순양함에까지 받친 중순양함 모가미는 결국 가라앉고 말았으며, 니시무라 제독의 함대 7척 중에서 살아돌아올 수 있었던 운 좋은 함정은 구축함 시구레(時雨) 단 한 척뿐이었습니다. 시마 제독의 함대에서는 입구에서 어뢰정에 당한 경순양함 아부구마가 결국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반면에 미국 해군의 피해는 구축함 알버트 W. 그랜트(Albert W. Grant)가 양 군의 포화에 끼여 일순간에 27발의 포탄을 맞고 전사24명과 부상96명의 피해를 내면서 행동불능 상태에 빠진 것이 전부였습니다. 훗날 니시무라 제독의 친구는 이 전투에 대하여 '이런 완패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이 현지에서 죽은 것이 차라리 그에게 정말 다행'이었다고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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