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sserschmitt Bf 109
Bf 109 또는 Me 109 라고 불리우는 35,000대의 생산댓수를기록한 메서슈미트 Bf 109 는 대전초 독일의 전투기는 사실상 이기종 하나였다Bf 109 가 대전초에는 세계 최고의 전투기였다 하지만 이기체를 연합군의 중폭격기 요격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화력과 방어력 위주로 개량 발전해 나갔다 그결과 기동성과 선회력이 떨어져서 점점 연합군의 신형 전투기에 뒤지게된다...하지만 독일의 슈퍼에이스들 대부분이 이기체 종전때가지 타고 있었다.. |
BF 109G-6와 Bf 109G-10 성능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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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표시된 것 이외에는 두형이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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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6) 이륙시 1475
MW 50 장치이용시 1800 18700피트에서
1355 |
최고속도 |
(G-6) MW 50사용시 해면고도에서
시속 340
마일 |
최고 |
시속 500 마일 |
상승속도 |
(G-6) 분당 3346
피트 18799 피트까지 6분 |
한계고도 |
350 마일 보조탱크 장착시 620 마일 |
표준무장 |
13밀리 MG 131 기관총 2정
1정당 실탄 300발 |
야전변형 |
551 파운드 폭탄 1개
지연신관내장 동체 및에 장착 |
◇ Messerschmitt Bf 109 ◇
♠ Part 1 - 전설의 시작 ♠
♠ Part 2 - 영광의 날개 ♠ ♠ Part 3 - 제국의 수호자 ♠
First Update - 2000. 8. 13 & Second Update - 2004. 7. 16
인류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제 2차 세계대전의 항공전을 논하는데 있어서 독일공군을 빼놓을 수 없고, 이 독일공군을 논하는데 있어서 메서슈미트 Bf 109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Bf 109는 2차 대전에서 활약한 여러 전투기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전투기중 하나이며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었던 강력한 독일공군을 상징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 걸출한 전투기는 2차대전의 항공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영국이 자랑하는 불멸의 스핏화이어와 쌍벽을 이루면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비행기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도 메서슈미트라는 이름은 들어본적이 있다고 할 정도인데, 심지어는 메서슈미트하면 모든 독일전투기를 총칭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Bf 109 또는 Me 109라고도 알려진 이 전투기는 2차 대전 전기간동안 총 3만5천여 대가 생산되어 유럽의 하늘을 누볐다. 이 생산대수는 역사에 기록된 전투기중에서 가장 많은 것이라고 한다.
불타는 하늘의 Great War Planes... 이번회에서는 독일의 천재 항공기 설계사인 빌리 메서슈미트 박사가 남긴 전설적인 전투기 Bf 109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What is the name of this fighter?!! Bf 109 ?? ...Me 109 ?? 이 전투기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다 보면 어떤 서적에는 Bf 109로 기술되기도 하고 어떤 서적 (주로 미국쪽의 서적)을 보면 Me 109라고 기술하기도 하는데....결론적으로는 둘다 틀린 것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전쟁중에 독일공군이 사용한 거의모든 문서에서 이 기체를 Bf 109라고 기술하고 있어서 메서슈미트 박사의 항공기 중 109, 110에게는 Bf를 붙이는 것이 더 옳을 것이고 이후에 개발된 기체들 예를 들어 Me 262, 163등에는 Me를 붙이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9와 110은 메서슈미트 박사의 이름을 딴 것이 아니라 이 전투기들이 설계될 당시에 그가 몸담고 있었던 항공기 회사였던 Bayerische flugzeugwerke의 이름에서 약자를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Me 109라는 기술은 주로 연합군측에서 이 이 기체를 호칭할 때 사용했다고 한다. 일부 항공전사가들은 생산 공장의 이전시기를 더욱 세분화해서 109E형까지는 Bf를 붙이고 메서슈미트 항공사로 생산이 이전된 109F형부터는 Me를 붙이는 것이 옳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불타는 하늘에서는 이 기체를 Bf 109로 통칭하기로 한다. |
* 부활하는 유럽의 독수리
항공전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전쟁이 첫 선을 보였던 1차대전 당시에 알바트로스, 포커 트라이데커(삼엽기)등 연합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여러 우수한 전투기를 선보이면서 최첨단의 항공기술을 자랑했었던 독일은 1차대전의 패전이후 독일의 재무장을 철저하게 제한하는 베르사이유 조약이라는 커다란 장애물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동안 영불 연합국의 치밀한 감시로 인하여 독일의 항공산업은 크게 위축될 위기에 놓였었으나 독일은 비밀리에 항공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다. 특히 히틀러 집권이후에는 점점 더 강화되는 독일의 재무장 분위기속에서 독일의 항공기 제작사들은 수많은 군용 항공기들을 제작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빌리 메서슈미트라는 천재적인 항공공학자가 설계하고 있었던 새로운 전투기가 장차 장차 전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게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 1930년대초반 독일공군의 재건이 비밀리에 추진될무렵 주력 전투기로 사용되었던 하인켈사의 He 51 ]
1934년, 베르사이유 조약의 허점을 이용해 서서히 항공전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던 독일공군은 당시 전투기부대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주력 전투기들이었던 하인켈사의 He 51과 아라도사의 Ar 68과 같은 복엽전투기들이 비록 복엽기로서는 훌륭한 전투기이기는 하나 영국과 프랑스 공군기들에 정면으로 맞서 상공을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미래의 하늘을 제압할 차세대 전투기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이 야심찬 계획이 발표되자 이미 신예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던 독일의 유명항공사들이 사운을 걸고 경쟁적으로 참가했다. 특히 아라도, 하인켈, 포케불프, 메서슈미트의 4개 항공사가 단 하나뿐인 승리자의 자리를 놓고 최종적인 경쟁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이 차기 전투기의 개발을 시작하는 타이밍이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서 약간 빨랐으며 이 결정적인 시기에 한발 앞서 나갔기 때문에 훗날 독일공군이 개전후 수개월동안 영불 연합군의 공군전력을 압도하는 막강한 전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 차기 전투기 선점을 위한 치열한 경쟁
독일공군의 미래를 짊어지게될 차기 전투기 선정 과정에서 경쟁은 매우 치열했으며 4개 항공사는 각기 독창적으로 설계한 우수한 시제기들을 내놓았다.
아라도사의 Ar 80V1, 바이예리쉐 플룩쪼이베어케 (Bayerische Flugzeugwerke, BFW)의 Bf 109V1, 하인켈사의 He 112V1 그리고 포케불프의 Fw 159V1이 그것으로서 이후 몇 개월간 이 기체들은 사운을 건 치열한 공중전(?)에 빠져 들었다. 이중에서 포케불프사의 기체는 자국산인 610마력의 융커스 유모 210A를 장비하고 있었는데 아직 이 엔진의 신뢰성이 검증되지 않았던 데다가 생산량도 충분치 못해서, 나머지 기체들은 신뢰성이 높고 출력이 강했던 695마력의 영국산 롤스로이스 케스트랄 V 엔진을 장비한 상태였다.
[ 아라도사의 Ar 80V1, Ar 68의 뒤를이어 주력 전투기의 자리를 노렸으나 경합의 초반에 탈락하고 말았다. ]
[ 포케불프사의 Fw 159V1, 이런 파라솔윙의 촌스런 모습은 차기 전투기감으로는 어림도 없어보인다. ]
2차대전중 비행기 엔진에 대해서는 첨단 기술을 자랑했던 독일이지만 이무렵까지만해도 바르세이유 조약의 후유증으로 독일의 엔진개발 능력이 과도기에 있었기 때문에 3개 항공사들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자국산 엔진을 고집하기보다는 더욱 안정적인 자국산 엔진이 개발될때까지는 외국산 엔진을 잠시 채용하여 자존심보다는 실리를 얻는 쪽을 선택했던 것이다.
[ 하인켈사의 He 112V1, Bf 109V1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으나 경쟁에서 탈락한 안타까운 기체이다. ]
이들 4개 기종의 경합은 1935년 10월 트라베뮌데에서 본격적인 성능비교 테스트가 실시되면서 본격화 되었다. 하지만 단기간의 시험비행만으로도 어느정도 우열이 가려졌는데 하인켈사의 기체와 BFW (바이예리쉐 플룩쪼이베어케)사의 기체가 나머지 기체들에 비해서 월등히 뛰어난 성능을 보여준 것이다. 이로서 경쟁은 이들 양사의 2파전의 양상이 돼 버렸다. 이들 기체는 모두 전급속제 저익 단엽기였으며 주익하면에 인입식 랜딩기어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비행성능에서도 매우 비슷한 성능을 보였다. 이 치열했던 경쟁에서 최후의 승자는 Bf 109V1으로 결정되었는데, 이렇다보니 그동안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후발 업체인 BFW사가 제작한 Bf 109V1이 하인켈의 He 112V1을 제치고 독일공군의 차기 주력기로 선정된 과정에서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다.
[ 당당히 경합에서 1위를 차지하여 차기 주력 전투기로 선정된 BFW사의 Bf 109V1 ]
Bf 109를 선정한 공군측의 공식 발표에는 상승성능 및 최고속도에서 Bf 109가 He 112를 압도했으며 조종성도 더 양호하며 대량 생산이 수월하기 때문에 BFW의 기체를 주력 전투기로 선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시험비행기간동안 하인켈사의 He 112V1은 부드러운 유선형의 디자인과 공기역학적인 설계로 인해 비행특성이 좋아서 많은 조종사들의 호평을 받았었으며 특히 주익 랜딩기어의 폭이 약간 더 넓어 이착륙시에 안정성이 더 높다는 점과 탁트인 시야를 자랑하는 조종석의 구조가 Bf 109V1의 그것에 비해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었기 때문에 이 결정이 정경유착에 의한 특혜가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물론 하인켈사의 기체가 Bf 109와 동시에 주력전투기로 발탁되었다면...하는 아쉬움은 있을 수 있지만 그당시 독일공군의 입장에서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쫒기보다는 확실한 한가지 기체를 선정해서 집중적으로 개발, 생산하는 것이 바람직했으며, 홈지기 개인적으로는 Bf 109가 주력전투기로 선정된 것이 결과론적으로 볼 때는 매우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 foxmouse: 이 흥미로운 독일공군의 차기 전투기 경합에 대해서는 얼마뒤에 업데이트가 예정된 '비운의 전투기 He 112, He 100'편에서 보다 상세하게 다룰 예정입니다. )
* 영광을 향한 청사진
사실 Bf 109는 그 원형기가 세상에 선보이기 10여년 전부터 이 전투기의 개발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1927년 다른 명문 항공기 제작사에 비해서 뒤늦게 군용기 개발사업에 뛰어들었던 Bf 사는 기술력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독일 항공공학계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던 빌리 메서슈미트 박사를 영입했으며 메서슈미트 박사의 요구로 1933년에는 아라도사에서 설계를 담당하고 있었던 발터 레델 박사까지 끌어들이게 되었다. 이 두 항공공학자는 고성능 소형전투기의 개발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들에 의해서 훗날 전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게되는 Bf 109의 청사진이 그려진 것이다.
[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항공공학자 빌헬름 메서슈미트, 스핏화이어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레지널드 미첼과 함께 가장 유명한 항공 공학자였다. ]
이전에 성공적인 민간용 단발 단엽기로 평가받는 Bf 108을 설계해본 적이 있었던 메서슈미트 박사의 주도하에 시작된 차기 전투기의 개발사업은 레델 박사의 합류로 더욱 탄력을 받았다. 이들은 새로운 전투기의 개발 방향을 당시 한창 개발이 추진되고 있었던 독일의 엔진기술이 허용하는 한까지 작고 날렵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기본적인 동체의 설계는 한창 개발이 진행중이던 자국산 융커스 유모 엔진이나 벤쯔사의 엔진을 탑재할 수 있는 최소한의 크기에 맞추어 진행되었다.
이 기체는 한눈에 독일 전투기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쭉쭉 뻗은 직선과 각이진 전통적인 독일 전투기의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메서슈미트 박사는 이 항공기를 가볍고 날쌘 전투기로서 개발하기를 원했으므로 기체는 최대한 경량화되어 원형기의 익면하중 (wing loading)은 1평방 피트당 24파운드가 채 안될정도였다. 하지만 메서슈미트 박사와 레델 박사는는 이 기체가 주력전투기로 선정되면 수많은 개량을 거치게 될 것이고 점점 기체 중량이 증가하여 익면하중도 같이 증가하리라는 것을 직감했으므로 이에 대비하여 몇가지 예비적인 장치를 도입했다. 필요시에 양력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주익 앞전에 자동으로 작동되는 슬롯 (autonomic leading edge slot)을 도입하여 실속에 가까운 속도에서 보조익의 조종을 원할하게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최대 10도까지 전개되는 넓은 보조익 (aileron)과 플랩 (flap)도 고안되었다. 주익의 부담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서 주익에는 무장을 장착하지 않도록 설계되었고, 랜딩기어의 작동부를 동체쪽에 위치하도록 설계했으며 이로 인해 랜딩기어가 안에서 밖으로 접히는 특이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 109V1의 정면 모습, 커다란 공기흡입구와 2날 프로펠러, 바깥쪽으로 접히는 폭이 좁은 랜딩기어등의 특징이 보인다. ]
이렇게 탄생한 원형기 Bf 109V1은 첫 비행을 1935년 9월에 실시했으며 이후 몇차례의 시험비행후에 사소한 문제점들을 수정하고 1935년 10월 차기 전투기 경쟁에 참가하기 위해서 트라베뮌데로 보내졌다. 이 사이에도 메서슈미트와 레델박사는 계속 개선작업에 착수하여 1936년 1월에는 2번째 원형기인 Bf 109V2를 제작했다. 이 기체에는 109V1에서 신뢰성에 의구심을 갖고 장착을 하지 않았던 융커스 유모 210A 엔진이 장비되었다. 그동안 이 엔진도 신뢰성이 입증되고 안정적인 공급량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형은 목재로된 고정식 2날 프로펠러를 장비했으며 엔진 상부에 프로펠러 사이로 발사되는 2정의 MG 17 기관총을 장착할 수 있는 여유공간이 만들어 져서 기수의 형태가 변하게 되었다. 이 형이 양산 전투기형인 Bf 109A로 발전하게될 예정이었다.
[ Bf 109의 조종사를 정면에서 촬영한 사진, 조종석의 협소함과 후방시계의 불량함으로 테스트 기간동안 조종사들에게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
하지만 이무렵 숙적 영국공군이 차기 전투기들을 개발하고 있는 중이라는 첩보가 입수되었는데 이 전투기들 (허리케인과 스핏화이어)이 8정이나 되는 기관총을 고정무장으로 장비할 예정이라는 내용이 독일공군을 긴장시켰다. 영국 전투기들의 고정무장은 주익에 설치된 7.7mm 브라우닝 기관총이었는데 이것이 8정이나 된다면 그 화력은 당시 기준으로 볼 때는 정말로 대단한 것 이었으며 아무리 생각해도 2정의 7.92mm MG 17 기관총만으로는 대적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산술적으로 볼 때 Bf 109A형에 장비될 예정이던 2정의 MG 17 기관총은 기총탄 확보를 위해 기수의 연료탱크를 조종석 뒤쪽의 동체로 이동시켜 공간을 확보한 결과 각 기관총당 1000발씩의 탄약을 탑재할 수 있었다. 반면 영국 전투기들은 기관총 8정이 모두 주익에 위치해 있었는데 각 기관총당 300발씩의 탄약을 탑재할 수 있었다. 총 탑재 탄수를 비교해보면 Bf 109A의 2000발에 비해서 영국 전투기들은 2400발로 우위에 있었으며 8정이나 되는 기관총이 동시에 발사되므로 순간적으로 집중되는 화력에서 약 4배의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었다. 비록 사격 지속 시간은 Bf 109A쪽이 3배정도 더 길었지만 야전부대의 조종사들은 실제 공중전에서는 순간적으로 승부가 나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집중되는 화력이 더 중요하다며 화력 강화가 절실함을 요구했다.
[ 조종석의 구조를 보여주는 일러스트 ]
더구나 항공기술과 엔진의 발달로 각국의 전투기들은 목재골조에 천을대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던 1차대전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점점 금속으로된 외피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특히 엔진이나 조종석등의 취약부위를 장갑판으로 강화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2정의 기관총으로는 점점 성능이 좋아지는 적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가 없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이에 독일공군은 1차대전 수준의 무장인 MG 17 2정으로는 너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려 Bf 109A의 양산을 전격적으로 취소시키고 Bf 사에 최소한 3정의 MG 17 기관총을 장비할 수 있는 개량형을 제작하라는 요구를 했다. (이런 이유로 제작이 중단된 Bf 109A는 완성에 이르른 기체가 없었다고 함.)
그런데 문제는 Bf 109의 설계 자체가 소형의 날렵한 전투기로 추구되다보니 추가적인 기관총을 탑재할 공간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Bf 109A의 주익은 너무 얇아서 주익에 각 1정의 MG 17 기관총을 간신히 장착할 수는 있었지만 여기에 탄약을 공급할 탄창의 부피가 커서 공간을 확보할 수가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에 벨트식의 급탄장치를 통해서 주익 전체에 탄약을 탑재하는 방법이 시도되었으나 몇가지 기술적 어려움으로 완전히 실용화 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결국 고민끝에 엔진의 V자형 실린더 사이의 공간에 기총을 설치하는 방법이 시도되었다. 여기에는 충분히 MG 17 기관총과 탄약이 수납될수 있었으므로 약간의 개량을 통해서 프로펠러축의 정가운데를 통해서 발사되는 기관총의 탑재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끝에 추가적인 기관총 1정을 엔진 축을 통해서 발사하는 방식을 채택한 3번째 원형기 Bf 109V3형이 제작되었으며 이것이 무장강화형인 Bf 109B의 모태가 되었다.
[ 화력 강화의 해법으로 제시된 MGFF 20mm 기관포, 초기에는 기축에 장착이 시도되었으나 여러 가지 문제점이 많았으며 Bf 109E형에 이르러서야 표준 무장으로서 주익에 장비가 가능하게 된다. ]
얼마후에는 기축의 기총을 MG FF 20mm 기관포로 대체하여 화력을 더욱 강화하고 영국의 차기 전투기들에 비해 사거리가 길고 화력이 강력한 무장을 가지도록 한다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이 기관포는 스위스의 오리콘 사가 제작해서 실용화했던 대공 기관포를 약간 개조하여 전투기에 장착이 가능하도록 변형시킨 것이었다. 만일 이 기관포의 장착이 실용화만 된다면 화력의 열세를 단숨에 만회할 만한 야심찬 계획이었으며 이 기관포의 성능 시험을 위하여 Bf 109V4 ~ V7까지의 원형기들이 제작되었다.
[ MGFF 20mm기관포를 기축에 장착한후 테스트 비행에 나선 Bf 109V4, 하지만 이 기축선 기관포는 끊임없이 이런저런 말썽을 일으켜서 끝내 양산단계에서는 채용되지 못했다. ]
하지만 기축에 시범적으로 설치된 MG FF 기관포는 엔진룸의 높은 온도로 인해 쉽게 과열되어 몇발의 사격후 탄약공급이 정지해 버리거나 발사시에 기체에 불규칙한 진동을 유발하는 등의 잦은 말썽을 유발했고 결국 시간에 쫒긴 Bf사는 일단 기축 기관포의 실용화를 안정성이 검증될 때까지 무기한 연기하고 양산형에는 3정의 MG 17 기관총을 표준무장으로 하는 Bf 109B-0형의 양산을 시작했다.
* Bf 109B (최초 양산형) *
촉박하게 양산이 결정되기는 했지만 Bf 109B형은 몇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양력 증가를 위한 주익 설계로 인해서 기체의 착륙시에 필요한 받음각이 다른 기체에 비해 컸으며 지상에 접지하기 바로 전에 좌측으로 기우는 현상이 있었던 데다가 폭이 좁은 강착장치로 인해 이착륙시에 숙련된 조종사들을 필요로 했으며 미숙한 조종사들이 조종하기에는 위험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여기에 고속 비행을 하는 경우 주익에 불안정한 진동이 발생한다는 점이 가끔 보고되었으며 꼬리날개의 안정성에도 불안요인이 있다는 점들이 제기 되었다.
하지만 독일공군 원수 괴링은 이런 문제점을 보고받은 후에 이런 것은 비밀리에 해결하도록 하고 독일공군이 다시 부활했다는 것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라이벌인 영국과 프랑스에게 독일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도록 기만하기 위해서 하루빨리 이 '놀라운 전투기'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독일공군의 선전기관은 이 전투기의 성능을 과대 포장한 내용의 선전물을 각국에 유포했으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기간중에 각국의 유력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Bf 109V1의 시범 비행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후 한동안 기체의 성능에 대한 자세한 정보나 더 이상의 공개 비행이 없어 1년여가지난 1937년에는 외국 언론들이 이 검증되지 않은 비밀 전투기의 성능에 대해서 '별 것 아닐 것이다.'라는 식의 회의적인 기사들을 싣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독일공군은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공군을 얕보지 못하도록 그들의 실력을 전세계에 과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1937년 7월 스위스의 쮜리히에서 개최될 예정인 국제 항공대회에 3기의 Bf 109B로 구성된 시범비행팀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Bf 사는 이 전투기의 불안요인들을 어느정도 해결한 상태였으므로 독일공군은 이 전투기의 성능에 자신이 있었다. 단, 여전히 이착륙시에는 숙련된 조종기술이 필요했으므로 대회 참가자들은 공군내에서 최고의 비행기술을 가진 조종사들중에서 선발했다.
[ 당시 리히토펜 비행단의 칭호를 가지고 있던 JG 132에 최초로 배치된 Bf 109B ]
스위스에 모습을 나타낸 3기의 Bf 109B (Bf 109B-1, Bf 109B-2, Bf 109V13)은 군용기 부문의 거의 모든 종목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며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최고 속도, 평균 속도, 상승률, 하강능력 등등에서 발군의 성능을 자랑하는 Bf 109B앞에 감히 도전장을 내밀 만한 라이벌은 없었다. 사실 이 3기의 109중 기록 수립에 앞장선 Bf 109V13은 대회 참가를 위해서 960마력의 다이믈러 벤쯔 DB600 엔진을 장착한 특별 모델이었다. 몇 개월뒤인 1937년 11월, 이 기체는 1000마력급의 DB601엔진을 장착하고 시속 614km라는 놀라운 속도를 과시하여 전투기 부문의 세계 속도 신기록을 이전의 기록에 비해 시속 50km이상 빠른 것으로 갈아치웠다. (이 Bf 109V13은 후에 Bf 109E형의 근간이 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DB600, 601 엔진은 아직 양산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태여서 실험적으로 제작된 기체였지만 이 벤쯔 엔진과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Bf 109는 더욱 힘찬 도약을 하게될 것이다.)
[ 국제 항공대회에서 놀라운 속도를 과시하며 세계를 놀라게했던 109V13, 훗날 Bf 109E로 발전하게되는 시제기이다. 외형에서도 DB 601엔진 장착에 따라 Bf 109E의 이미지가 느껴진다. ]
사실 이무렵 선전에 광분했던 독일공군은 속도기록을 위해 새롭게 설계한 기체를 이용해 1939년 4월 26일 시속 759km라는 경이적인 속도 기록을 수립했는데 이 기체의 상세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외국언론에서는 'Me 109R'이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이 기체는 순전히 최고 속도 기록만을 위해 1기가 제작된 것으로 Bf 109의 계보에는 속하지 않는 전혀 다른 기체였다. (사실 이 기체는 경쟁사였던 하이켈이 He 112를 개량해서 Bf 109의 최고속도기록에 도전장을 내밀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서 속도기록이외에는 전혀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이 기체는 후에 Bf 209라는 공식적인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37년에는 635마력의 융커스 유모 210D 엔진을 장착한 Bf 109B-1이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했으며 이무렵 리히토펜 비행단의 호칭을 가지고 있었던 JG 132가 가장 먼저 Bf 109를 수령한 전투비행단이 되었다. 이 기체는 13,100피트의 고도에서 시속 473km의 최고속도를 나타냈으며 9.8분만에 19,685피트의 고도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때 고정식 피치의 목재 프로펠러가 한계를 나타냈으므로 Bf 109B-2형에서는 미국의 해밀턴사로부터 프로펠러 기술을 사들인후 2단계 피치를 가진 금속 프로펠러로 교체하게 되었으며 엔진도 2단 변속 슈퍼차져를 장착한 670마력급의 융커스 유모 210E, 210G엔진을 장비하게 되었다.
* 스페인에 나타난 하늘의 마왕
이무렵 독일공군은 스페인 국민당의 프랑코장군의 요청으로 점차 국제 대리전이 되어가고 있었던 스페인 내전에 콘돌 군단이라는 명칭의 파견 부대를 참전시키고 있었다. (사실은 요청이라기 보다는 독일측의 적극적인 의지에 의해 파견이 결정된 상태였다.) 이때 공화당을 지원하고 있었던 소련공군이 신예전투기인 폴리카르포프 I-15, 16을 선보이면서 콘돌군단이 주로 사용하던 He 51 복엽전투기의 성능상 열세가 명확해졌다.
[ 스페인 국민당군의 도색을 하고 있는 독일 콘돌군단의 Bf 109B ]
이에 1937년 7월경에 독일공군은 스위스에서 국제 항공대회가 열리던 비슷한 시기에 24기의 완전무장된 Bf 109B를 급히 콘돌군단으로 보냈다. 독일공군에게 있어서 스페인 내전은 그들이 개발한 신예기들의 성능을 실전에서 테스트해볼 수 있는 그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였다. Bf 109와 더불어 장차 전유럽의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게될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도 스페인 내전을 통해 그 진가를 과시하게 된다.
이 Bf 109B 전투기들은 아직 주익의 미세한 진동과 꼬리날개의 불안정성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전투에 투입되자마자 그 특유의 상승력과 고속성능을 이용해서 물을 만난 고기처럼 맹활약하여 기대이상의 큰 성과를 올렸다. 이 전투기들은 주로 폭격기 엄호 임무나 적 전투기 소탕작전에 투입되어 적기들을 보이는 족족 떨어뜨렸던 것이다. 특히 독일공군을 일시적으로 긴장시켰던 소련의 신예 I-15, I-16 전투기들을 잡는데 매우 효과적인 무기로 인정받게 되었다.
[ 주기중인 콘돌군단의 Bf 109B ]
재미있는 것은 공중전중에 피탄되어 손상된 Bf 109B 1기가 급강하를 시도하던중 꼬리날개가 분리되어 추락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 장면을 목격한 소련 조종사들사이에서 'Bf 109는 너무 경량화를 추구한 나머지 기체구조가 약해서 급격한 기동을 하다가는 기체가 분해되 버린다.'라는 소문이 떠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Bf 109의 기체강도는 그렇게 허약한 것이 아니었으며 대부분의 거친 기동을 무리없이 소화해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선입견은 상당히 오랜기간동안 지속되었으며 일부 독일 조종사들 사이에서도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만들어서 급격한 선회를 꺼리게 만들었다고 한다.
* Bf 109C & D *
하지만 실전에서 Bf 109B형이 드러낸 가장 큰 문제점은 뭐니뭐니해도 무장이 7.9mm MG 17 기관총 3정으로 너무 빈약하다는 점이었다. 1차대전에 비해 전투기들의 속도가 훨씬 빨라지고 구조가 튼튼해져서 적기를 포착한 순간에 단시간의 사격으로 적기를 비행불능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강력한 화력이 절실하게 요구된 것이다.
[ 두 번째 양산형인 Bf 109C - 외형상으로는 공기흡입구의 형태가 약간 커진 것 말고는 B형과 큰 차이가 없어보인다. ]
이에 BFW사는 다시 20mm MGFF 기관포를 기축에 설치하도록 해보았지만 실전에서 사용해본결과 이전에 지적된 문제점들 (몇발 발사하지 못하고 작동이 정지해 버리거나 사격시에 심한 진동이 발생하는..)이 다시 발생해 신뢰성이 떨어져 조종사들로부터 더 불평만 사는 경우가 많아 결국 기축 기관포는 또 다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안으로 기수에 2정의 기관총, 주익에 2정의 기관총을 장착하여 총 4정의 MG 17 기관총을 장착하는 쪽으로 무장 강화의 결론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로인해 주익에 고르지 못한 진동이 자주 발생하게 되자 보조익과 앞전 슬롯의 밸런스를 다시 조정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 문제가 해결된후에는 주익의 무장을 2문의 20mm MGFF 기관포로 강화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이 무장 강화형의 연구를 위해 제작된 시제기들이 Bf 109V8, V9로서 두 번째 양산형인 Bf 109C 시리즈의 근간이 되었다.
이처럼 Bf 109C는 기본적으로 Bf 109B의 틀을 유지하면서 무장을 강화하는 형태로 생산되었으며 엔진은 융커스 유모 210G엔진을 도입했는데 이 엔진은 연료 직접 분사방식을 실험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엔진중 하나였다. 이 연료 직접 분사방식을 이용하게 되자 기화기를 사용하던 이전의 엔진에 비해서 급격한 선회나 급강하, 기수를 급격히 앞으로 숙이는 마이너스 G등의 거친기동을 할 때 엔진에 연료공급이 순간적으로 끊기는 현상이 사라지게 되어 조종사들로부터 매우 좋은 평가를 었얻다. 훗날에는 이 엔진이 미래의 공중전에 혁명적인 기능을 수행하게될 것이며 Bf 109의 비밀무기 역할을 하게된다.
[ 콘돌군단에 파견되어 실전 테스트를 받고 있는 Bf 109C ]
양산형인 Bf 109C-1형의 무장은 기수와 주익에 각 2정씩 장착된 총 4정의 MG 17 기관총으로서 이었으며 기축에도 1정의 기관총을 추가하여 5정의 기관총을 장비한 Bf 109C-2형도 시험적으로 제작되었으나 역시 기축 기관총의 안정성에 문제가 제기되어 Bf 109C-1형이 주로 생산되었다. 1938년 8월 훗날 스페인 내전에서 최고의 에이스로 등록하게되는 유명 조종사 베르너 묄더즈의 지휘하에 12기의 Bf 109C-1으로 이루어진 전투비행대가 파견되어 실전에 투입되었다. 베르너 묄더즈는 공중전술에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Bf 109의 성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편대전술인 로터 (Rotte)와 슈밤 (schwarm)을 고안하여 독일공군의 표준 편대전술로 정착시키게 된다. Bf 109C형은 총 58기정도만이 생산되는 과도기적인 기체였다.
한편, 이런 무장강화를 위한 개량과는 별도로 더욱 강력한 엔진을 장착하려는 시도가 추진되고 있었는데 이무렵 독일에는 출력이 무려 960마력에 달하는 다이믈러 벤쯔 DB600엔진이 개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엔진은 Bf 109B형의 동체에 장착되어 성능 시험을 받았으며 보다 개선된 DB600A 엔진이 생산되자 이를 장착한 기체들이 계속 성능 시험을 받게 되는데, 이때 제작된 시제기들이 Bf 109V10~V12까지의 기체들이다.
[ Bf 109C형과 D형의 비교사진, 두 기체가 사용한 엔진에 따라 기수에 큰 변화가 오게된다. ]
이 벤쯔 엔진의 장착은 Bf 109의 성능을 한차원 높게 만들었다. 시제기들이 보인 최고 속도는 Bf 109B형에 비해 시속 50km나 증가한 시속 523km를 기록했으며 작전 가능한 고도도 31,170피트로 높아졌다. 결국 Bf 109C형의 무장을 유지하면서 엔진을 DB600A로 장착하는 새로운 양산형 Bf 109D-1형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DB600A엔진을 장착한 Bf 109D형은 1개 연대분량의 기체만 생산된후에 생산이 중단되게 되는데 이것은 다이믈러 벤쯔사가 DB600A의 생산을 중단하고 보다 야심차게 개발중인 보다 새로운 DB601엔진을 생산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 원형기인 Bf 109V1부터 Bf 109D형까지의 외형의 변화 ]
이 DB601엔진은 공중전에 혁신적인 기능을 수행하게될 연료 직접 분사방식을 본격적으로 채용하고 있었으며 슈퍼차져의 기능도 보다 강화되어 출력이 무려 1000마력에 달하게될 이른 바 '꿈의 엔진'이었다. 이 엔진을 장착하기 위해서는 기체의 개수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DB601엔진의 양산이 시작될 때까지 Bf 109D형의 생산은 중단되었으며 융커스 유모 210D엔진을 대신 장착하고 생산된 647기의 Bf 109D형은 대부분 차기 모델인 Bf 109E가 실전배치될 때까지 임시로 독일공군 전투기부대에 배치되어 일부 기체들은 스페인내전에서 실전테스트를 받았지만 대부분 훈련기로 전용되거나 스위스, 헝가리등에 판매되었다.
결국 당대 최고의 엔진중 하나인 DB601을 장착하게되는 새로운 Bf 109가 운명적인 탄생을 기다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전격전의 하늘에서 독일공군의 신화를 창조하게되는 Bf 109 가문의 진정한 맡형인 Bf 109E형이다.
* 일러스트레이션 *
1937년 최초의 양산형으로 실전 배치되기 시작한 Bf 109B-1이다. JG 132가 그 Bf 109를 최초로 운영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 부대는 Bf 109B-1을 이용해서 실전 테스트를 많이 실시 했으며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병합 작전, 체코 침공 작전시에 상공에서 무력 시위를 전개했다. |
1938년 베를린의 수도방공 사령부 소속 Bf 109B-1, 이무렵까지 수직 꼬리날개에 사용된 붉은 바탕의 검은색 하켄크로이츠 (철십자)의 형태가 약간 달라진 것에 주목! |
1938년, 자국의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국제 비행대회에 독일측이 참가시켰던 Bf 109D이다. 총 5기의 팀으로 참가했었으며 역시 거의 모든 부문에서 대부분의 상을 휩쓸어 버렸다. 이 기체는 몇차례의 데몬스트레이션 비행에 사용되었으며 몇 개월후 추락하여 폐기되었다. |
1939년, JG 26 전투비행단에 배치된 기체로서 전반적으로 단조로운 진한 녹색으로 도색되어 있다. 수직 안정판의 하켄 크로이츠 마크는 이후 크기가 축소되고 위치가 바뀌게 되었다. 이 기체는 Bf 109E의 실전 배치에 따라 곧 훈련부대로 인도되었다. |
1939년 초 베른부르크에 주둔중이던 제 102 전투비행연대 (JGr 102) 소속의 Bf 109D-1, 본기는 유모 210D 엔진을 장착했던 모델로 DB600A를 장착했던 형에 비해서 기수의 형태에 차이가 있다. |
스페인내전에 실전테스트를 위해 파견된 Bf 109D-1, 이후 전쟁이 끝나자 나머지 잔여기체들은 신생 스페인공군에게 공여되었다. |
Bf 109 사진과 그림....
Bf 109 F-4/Trop; 6./JG 53 Bf 109 E-4/B; III./SKG 210 Bf 109 K-4; I./JG 27 Bf 109 G-2; II./JG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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