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rumman F9F Panther ◇
항공전에 제트기의 시대가 활짝 열렸던 한국전쟁에서 한국해역에 전개했던 미해군 기동부대 역시 북한지역에 대한 항공작전에서 맹활약했다. 특히 항공모함의 함상에도 제트 전투기가 새로이 선을 보였으니 그 주력은 F9F 팬써였다. F9F는 그라만사가 제작한 첫 번째 제트기이자 해군기로서는 최초로 미그-15를 격추한 기록도 가지고 있는 기체였으며, 미그-15와 격전을 벌인 F-86 세이버의 명성에 가려 그 활약상이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공군의 F-80처럼 전쟁 초기부터 묵묵하게 임무를 수행했던 한국전쟁의 숨은 공로자였다. 불타는 하늘의 Great War Plnanes... 미해군의 제트 고양이 F9F 팬써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 함상에도 제트기의 시대로...
2차대전이 끝난후 한달이 지난 1945년 9월, 미해군은 다가오는 제트시대에 맞추어 항모에서 작전이 가능한 제트기를 원하고 있었다. 미해군의 요구사항은 레이더를 장착하고 승무원은 2인이 탑승해야하며 야간에 작전이 가능한 제트 전투기였다. 더글러스와 커티스사가 이 프로젝트에 뛰어들었으며 해군 항공기의 명가를 자부하던 그라만사는 한발 늦게 이 경쟁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 주익에 로켓탄을 장착하고 비행중인 F9F-3 팬써, 전면이 짙은 청색으로 한국전쟁당시 미해군 팬써의 전형적인 도색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
사실 그라만사는 전쟁중에 제트전투기를 연구해본 경험이 있었는데, F6F와 F8F의 동체를 베이스로 제트엔진을 장착해서 시험 비행을 실시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로펠러기였던 F6F나 F8F에 장착된 제트엔진은 별 성과를 보이지 못했으며 그라만사는 2차대전중에는 제트기의 개발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었던 것이다.
뒤늦게 해군 제트기 개발 경쟁에 참가한 그라만사는 F7F 타이거캣 공격기의 동체를 베이스로 해서 주익의 엔진을 제트화시킨 G-75라는 자체 모델을 구상했다. 이 모델은 제트엔진 2개를 주익에 장착하고 4문의 20mm 기관포와 기수에 레이더를 장착했으며 XF9F-1이라는 제식 기호를 달고 미해군 제트전투기 개발 경쟁에 참가했다.
[ F9F 팬써의 조종석 사진 ]
애초에 미해군은 커티스사가 제시한 안보다는 더글러스사가 제안한 XF3D-1에 관심을 보였으나 막상 이 기체가 날아올랐을 때 애초에 해군이 요구하던 사항에 많은 부분에서 도달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면서 해군 당국은 실망을 금치 못하고 이 XF3D-1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서 그라만사에게 XF9F-1의 개발을 계속 추진 할 것을 요구했다.
이로서 그라만사는 개발도 하지 못할 뻔한 위기에서 벗어나 2기의 XF9F-1 원형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XF9F-1은 더글러스사의 XF3D-1에 비해서 덩치가 크고 무거워서 미해군이 실시한 비행 테스트에서 전반적으로 XF3D-1보다 뒤지는 성능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실망한 미해군은 이 기체를 형편없는 물건이라고 혹평했으며, 그라만사는 이 경쟁에서 탈락할 위기에 몰렸다.
[ 팬써의 정면모습, 기수에 보이는 4문의 20mm 기관포구에서 강력한 화력이 느껴진다. ]
하지만 그라만사는 이무렵 2인승 야간 제트기 프로젝트와는 별도로 1인승 단발 제트기를 설계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G-79라는 자체 모델명을 가진 기체였다. 이 기체는 동체에 1기의 영국제 롤스로이스 넨 제트 엔진을 장착하고 있었던 단좌 전투기로서 개발이 추진되고 있었는데 XF9F-1에게 실망한 해군의 관심을 따내기에 충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롤스로이스 넨 엔진은 소련에도 수출되어 미그-15에 장착되게 된다.) 이로서 그라만사는 이 기체에 XF9F-2라는 새로운 제식기호를 붙여 미해군의 제트 전투기 경쟁에 계속 참가했다. 그라만사는 이 기체에 엘리슨사의 J33 터보 제트엔진을 선택했으며 주익 끝단에 고정식 연료탱크를 붙이기로 하였으며 사출식 조종석을 설치했고 4문의 20mm 기관포를 고정 무장으로 선택했는데 기관포 1문당 190발의 기관포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 미해군 곡예비행단 블루 엔젤스의 F9F 팬써, 이로서 블루엔젤스의 역사에도 제트시대가 열렸다. ]
이후 몇 가지 테스트를 거쳐 나타난 문제점이 해결되자 1949년 8월 최초의 F9F-2가 창공으로 날아올랐으며 똑같은 기체에 플랫 휘트니사의 J42 엔진을 선택한 F9F-3 모델도 같이 개발되었다. 미해군은 이 기체의 성능에 크게 만족하여 주력 함상 제트기로 F9F-2/3를 선택했으며 그라만사는 자사의 기체에 고양이과의 동물 이름을 붙이는 전통에 따라서 팬써 (panther; 표범)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1949년 봄이되면서 실전배치가 추진된 F9F-2/3는 최초의 기체들을 미해군의 곡예비행팀 블루엔젤스에 납품하는 것을 시작으로 미해군 전투기 부대에 공급되기 시작했는데, 실전 부대로는 VF-51이 최초로 제트 전투기를 운용하는 영광을 얻었다.
1951년 한국해역에서 활약중인 VF-781 소속의 F9F-2B 팬써, 짙은 청색에 붉은색의 기수를 특징으로 하는 전형적인 한국전쟁중의 도색이다. |
Grumman F9F-3 Panther | |
분 류 |
1인승 함상 전투폭격기 |
동 력 |
플랫 휘트니 J42 터보제트 엔진 (추력 6125 파운드) |
최고속도 |
시속 948km |
상승속도 |
분당 1144m |
항속거리 |
1842km |
무 장 |
기수 - 20mm 기관포 4문 |
* 한국 해역으로...
[ 어레스팅 후크를 펴고 항모에 착함 준비중인 팬써, 한국해역에 전개했던 항모 박서 소속의 기체이다. ]
1950년 6월,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미해군은 즉시 F9F를 장비하고 있던 VF-51, 52 를 동원하여 한국해역으로 전개했다. 선발로 파견된 항모 밸리포지에서 작전을 시작한 VF-51은 7월 3일에 시작된 평양비행장 공습작전에서 2기의 야크-9을 격추하여 첫 번째 격추기록을 올리게 된다. 이후 F9F는 지상공격 임무를 주로 수행하여 북한군에 큰 피해를 주었으며 항모에 탑재되어 작전했으므로 주로 북한 지역에 대한 공습작전에 참가했다. 항공모함에 실려 작전하는 함재기의 특성상 F9F는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에 대한 근접 지원보다는 주로 북한의 후방 지역에 대해서 공격하는 임무에 주로 투입되었으며 따라서 북한에게는 언제 뒤통수를 치러 날아들지 모르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때까지 북한공군이 보유했던 야크-9과 같은 전투기들은 F9F에 적수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작전에 방해가 되는 요인은 거의 없었다.
[ 출격 준비중인 F9F 팬써, 주익이 완전히 접혀 공간을 활용하는 함재기의 특성을 잘 볼 수 있는 사진이다. ]
그러나 1950년 11월 미그-15가 출현하면서 F9F의 한국상공에서의 우세는 큰 위협을 받게된다. 후퇴익의 미그-15는 속도도 훨씬 빨랐고 경량이어서 기동성에서도 우위를 보였던 것이다. 미해군은 미그-15가 출몰하는 지역에는 F9F를 투입하지 않으려 했으나 미그-15의 활동영역이 넓어지면서 몇 차례의 공중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1950년 11월 9일 최초로 벌어진 미그-15와의 공중전에서 VF-111 썬다우너스의 에멘 대위가 조종하는 F9F가 미그-15를 격추시키는 성과를 올렸으며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그-15에게 단 한 대의 F9F도 손실하지 않으면서도 4기의 미그-15를 더 격추시켰다. (미국측의 주장이며 소련의 기록에는 이보다 많은 F9F를 격추시켰다고 함.)
* 후퇴익의 고양이
F9F 계열기 중에서 특징적인 후퇴익을 가지고 있는 기체가 있다. 이것은 F9F 팬써에 후퇴익을 도입한 개량형으로서 제식 기호로는 F9F-6 부터가 해당된다. 이 기체는 같은 F9F 계열기면서도 외형에서 워낙 차이가 나므로 쿠거 (cougar)라는 새로운 별명을 부여받게 된다.
[ 완전한 후퇴익을 자랑하는 F9F-8 cougar, 사진으로 보면 panther와는 전혀 다른 기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
사실 그라만사는 F9F-2를 제작하기 시작할 때부터 기체의 설계에 후퇴익을 적용하는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었지만 미해군은 후퇴익의 기체가 저속에서의 비행특성에 문제가 있어 항모에서 이착함할 때 불안정하다는 것을 문제삼아 고전적인 직선익으로 제작할 것을 요구했었다.
그러나 미그-15의 출현에 놀란 미해군은 고속의 제트시대에는 후퇴익이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미그-15는 F9F-3 팬써와 같은 성능의 엔진을 가졌으면서도 무려 시속 160km이상의 차이가 나는 최대 속도를 자랑했던 것이다. 비록 미그-15와 맞붙은 공중전에서 팬써가 몇 차례 승리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조종사의 기량 차이였을 뿐, 만일 비슷한 기량의 조종사가 조종한다면 미그-15가 절대적인 우위에 설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 안정되게 착함중인 쿠거, 해군 관계자들의 예상을 깨고 후퇴익의 쿠거는 항모에서의 운용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
다급해진 미해군은 그라만사에 F9F의 후퇴익 버전을 급히 제작해 줄 것을 요구했으며 그라만사는 F9F-5의 동체를 기본으로 세이버와 같은 35도의 후퇴익을 갖는 기체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난 1951년 9월 21일 드디어 최초의 F9F-6 쿠거가 날아올랐는데 기대했던 최대 속도에서는 여전히 미그-15에 뒤떨여졌지만 기존보다는 시속 80km정도 빨라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F9F-5 팬써에 비해서 운동성이나 저속에서의 조종성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우수한 성능을 자랑했다. 이에 만족한 미해군은 즉시 이 기체를 양산해 줄 것을 요구했으며 미해군의 차기 전투기로 채택했다. 그러나 F9F-6가 다급히 생산된후에 최초의 F9F-6 전투비행대가 구성될 무렵에는 이미 한국전쟁이 끝나게 되어 한국전에는 투입되지 못했다.
[ 팬써와 쿠거의 특징을 비교하는 일러스트, 주익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거의 동일하다. ]
* 마치면서
비록 F-86과 같은 공군의 주력 전투기보다는 성능에서 떨어졌으나 함상에서 작전하는 제트기로서 F9F 팬써는 분명히 성공적인 작품이었다. 미공군의 F-80 슈팅스타와 같이 F9F는 한국 전쟁 초기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전장으로 출동하여 묵묵하게 일한 전장의 일꾼이었다. 이 F9F의 성공을 통해서 전통적인 함재기의 명가 그라만사는 제트 시대에도 부동의 함재기 제작사로서 인정받아 그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으며, 이후 계속 미해군의 함상전투기 제작에 참여하여 F11F 타이거와 같은 혁신적인 함상 전투기를 개발하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세계 최강의 전투기로 인정받는 고양이 가문의 총아 F-14 톰캣이 탄생하게 되는 기틀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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