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상잔의 비극 - 한국전쟁이 끝난지도 어언 50년이 넘어 버렸습니다. 물론 당시 한국의 하늘에도 엄청난 규모의 항공전이 있었고 최초의 제트전투기간의 공중전이 벌어진 진기록도 항공전사에 기억되고 있습니다. 당시 미공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소련공군의 비밀무기 미그-15의 등장은 그야말로 한국전쟁 항공전의 최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이번 이야기는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으로 정전된이후 미그-15를 몰고 자유의 품으로 귀순한 한 한국인 조종사와 그가 몰고온 미그-15의 이야기입니다. 이번글은 불타는 하늘의 열혈 후원자이신 ihere님 (vincent@ti.com)께서 제공해 주셨습니다. 이런 좋은 내용을 찾아서 정리해주신 ihere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 미그를 몰고온 사나이
공식적으로, 한국전쟁은 끝났다. 양진영이 평화협상 테이블에서 조건을 협의 중이었다. 그렇지만, 38선 양진영은 언제라도 전투에 임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 귀순직후 촬영된 노금석 소위의 사진, 당시 북한공군의 복장을 잘 볼 수 있는 자료이다. ]
1953년 9월 21일 아침. 북한공군의 엘리트 미그기 조종사인 21세의 노금석 소위에게 있어서 오늘은 또 다른 삶을 위한 날이었다. 그에게 작전명령과 자료가 쏟아졌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질주중에 있었다. 오늘은 그가 소련의 최첨단이며 최고의 비밀병기인 미그-15기를 몰고 남으로 향하여 귀순하는 날이 될것이다.
그의 비행계획이 마침내 끝났을때, 노 소위는 그의 미그기를 남한의 김포 공군기지를 목표로 몰고 가기로 정하였다. 김포는 좋은 선택이었다. 38선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김포는 제4 전투비행대의 F-86 비행중대 그리고 제 67전술정찰대의 RF-86, RF-80, WB-26C 그리고 RB-26C 인베이더와 오스트레일리아 파견대인 제 77 RAAF 항공단의 기지이다. 이것은 거의 운명을 건 모험이다. 만약 미국이나 호주의 조종사들이 그의 미그기를 먼저 본다면 그는 확실하게 격추 당할 것이다.
노 소위는 기체번호 2057번인 미그기 조종석에 올라 재빨리 비행전 점검사항을 마쳤다. 그는 엔진의 시동을 느꼈다. 활주로로 나가기전에 그는 조준경의 아래을 보았다. 거기엔 빨간 글씨로 다음과 같이 써있었다.
“양키의 엉덩이에 분노의 총알을 남김없이 쏟아버리자!”
그는 쓰로틀을 잡아 당겼고, 오늘은 미국과의 전투가 없을 것이다.
* 남쪽으로
비행중, 노금석 소위는 남쪽을 향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과 유엔이 미그기와 함께 망명을 하는 어느 조종사에게도 10만불을 제공하겠다는 사실 따위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대신에 그가 떠난 이유는 간단했다 : 공산군의 기만에 지치고 싫증이 났기 때문이다.
갑자기, 그가 대형에서 이탈하고 자유를 향한 비둘기가 되었다. 서울은 DMZ에서 50마일 밖에 되지는 않았고, 그는 유엔의 영토로 최고 속도로 돌입을 했다. 그 때의 속도는 거의 550마일 이었고, 미그기는 1마일 6초에 달려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즉, 분계선을 넘어 긴장의 4분인 것이다. 그는 김포 비행장을 발견하고 하늘의 질서를 무시한 채 곧바로 향했다. 그는 정상적인 방법과는 다르게 바람이 부는 쪽으로 내렸다. 만약 이륙중인 F-86이 있었다면 부딪쳤을 것이다. 착륙하기에 너무나 빠른 속도였으나, 그는 해냈고, 마침내 땅위에 내려 앉았다.
그는 비행기를 활주로에서 빼냈고, 미그기를 세이버로 착각해 트랩 부근에서 손을 흔드는 지상 근무자를 보고 놀랬다. 모든 신호를 무시하고 그는 엔진을 끄고 칵핏에서 서서 항복의 의미로 두 팔을 들었다.
기지 저쪽편에 있던 십여명의 조종사와 항공기 승무원들이 미그기를 보았다. 그들은 정확하게 그것이 어떤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좀 더 자세하게 보기위해 짚차와 트럭에 타고 달려 왔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기를 가지고 왔다. 사진으로 역사의 한 순간을 잡고자해서 였다. 그 흥분된 순간이란 것은 확실했다. 김포 관제소는 이미 대응에 들어가 있었다. 미그기를 맞이 하기 위해 두 대의 주기중인 F-86에 오르던 조종사들은 다시 내렸다. 관제소는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비상 수단을 사용 하였다. 잠시 후 전체 제4비행단과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제 77 비행중대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각각의 중대가 차례로 날아 올라 기지 상공을 방어하기 위해 광범위한 전투 초계 비행에 들어갔다. 그후 바로 즉시 다른 중대와 다른 기지의 비행대에도 똑같이 비상체제에 들어갔다. 소련이나 북한 공군에게 김포 공항위에 놓인 미그기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 귀순직후 미군의 집중 경비를 받고 있는 미그-15, 도색은 벌써 미국식으로 바뀌었다. 자료의 설명이 부실해서 이곳이 김포비행장인지 일본의 가데나 기지인지 확실하지 않다. ]
기지의 전투 중대의 비상상태에도 불구하고, 김포는 벌집을 쑤셔 놓은 것 같은 상태 였다. 기지내 정찰중대원중 4명이 헌병대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미그기 옆에 서 있었다. 지금 이순간, 가까이 접근한 AP 기자의 플래쉬 라이트를 본 것을 느낀 순간 그들은 최대한 사진을 찍은 후에 그들의 짚차로 돌아가 가버렸고, 놀라 칵핏에 서 있는 조종사는 누군가에게 항복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지상 요원들은 가능한 빨리 비행기로 향했다. 제 11전술 정찰대 조종사중에 하나인 진 존슨 중위는 미그기를 봤을 때 활주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페달을 힘껏 밟은 덕에 그는 그곳에 도착한 몇 안 돼는 사람들 중 하나였고, 미그 조종사가 아직 미그기에서 나오기 전이였다. 사람들이 몰려 들기 전이었다.
헌병대는 제빠르게 지역을 소개했고, 조종사를 데리고 갔으며, 비행기를 숨기기 위해 가까운 격납고로 이동 시켰다. 수 많은 사진들이 그 광경을 잡았으며, 헌병대는 능숙하게 필름등을 회수 했다. 40년이 지나고, 라이트-페터슨 공군 전시관에 착륙한 후 나타난 그 비행기의 단 한 장의 사진을 전시하였다. 이 사진은 마침 그곳을 멀리서 지나는 트럭이 사진을 찍었지만 사진은 희미하게 나왔다.
최대의 효과는 미그기를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믿지 못하겠지만, 여전히 연료를 싣고 있었고 기관포엔 탄약이 고스라니 장전 되어 있었다. 사실 미그기는 최전방에서 전투 준비가 되어있었던 전투기로 크나큰 횡재였다. 수일내에 미그기는 사라졌다. 수송기에 실려 오키나와로 보내졌다. 테스트를 위해서.
* 오키나와에서의 시험비행
오키나와에서의 안전을 위해 미그기는 미공군의 마킹과 기체번호를 달았다. 비행중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미군은 이 비행기의 성능, 비행 특성, 그리고 능력을 알기 위해서 최고의 조종사 두 명을 착출했다. 미그-15는 미국의 F-86과 비교해 광범위하게 연구되어졌다.
그 최고의 시험 비행 조종사로는 H.E. 톰 콜린스 대위와 6년전 음속의 벽을 최초로 돌파한 C.E. 척 예거 소령이 선정 되었다. 콜린스가 첫번째 그리고 예거가 그 다음 비행을 하였다. 최초의 보고서는 성능과 수집된 자료로 작성 되었으나 더욱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 하였다.
성능 테스트는 몇 달간 계속 되었고 F-86과 비교하기 위해 다양한 고도에서 이루어 졌다. 연료 소비량, 하중, 거친 성능 시험과 그 외의 시험 자료들이 수집 되었다. 기관포는 총구 속도 및 사거리를 확인하기 위해 시험을 하였다. 가능한 빨리 수집된 자료가 운영중인 전투단들에게 전달 되었다.
이러한 성과와 함께 더욱 자세한 자료가 요구 되어졌다. 12월에 라이트 패터슨 공군기지로 극비리에 옮겨졌다. 그곳에서 미그기는 믿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연구 되어졌다. 볼트 케이블등 모든 요소요소가 분석되고 기록 되어졌으며, 연구 되어졌다. 그 결과는 지구상의 모든 미군 조종사들과 센츄리 씨리즈(F-100, F-102, -104)를 제작하는 항공업계들과 공유 되었다.
* 성능 및 특성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모든 면에 있어서 미그-15는 미국내 최고의 전투기인 F-86과 동등한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예리한 기동성과 가속성으로 도그파이터로선 더욱 나은 전투기였다. 그러나 최고 속도에 있어서는 F-86에 조금 못미치는 속력이었다. 미군 조종사들은 두 개의 전투기의 다른 성능이 서로 다른 잇점으로 이용 되었는지 결정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연구 결과중 미그기의 조종석이 히터 및 환경상의 시스템이 매우 열악하다는 것을 발견 했다. 만약 조종사가 높은 고도에서 비행장으로 급강하 한다면 캐노피가 흐려지면서 시야에 제약을 받데 된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높은 고도에서의 북한과 소련 조종사들의 만족도가 그들의 전투 능력을 방해 하였다.
미그기를 일직선상으로 강하 하였을 때 거의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 했다. 예거는 가파르게 강하 시험을 할 때 조종능력을 상실해서 거의 죽을 뻔 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입에서 입으로 미군 조종사들에게 퍼져 나갔다. 높은 고도와 추운지역에서 적과 조우 했을시에 만약 당신이 이탈을 해야 한다면 급강하하여 이탈해라.
이 시험에서 유일한 문제라면 미국의 기술자들과 시험요원들이 전체 비행대중 한 대의 비행기의 성능과 시스템을 추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험요인으로 알려 졌지만 기술자들은 다양한 모델들에서 근접한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느꼈다.
소련 연방이 붕괴된 후에 수년이 지나서야 위험성을 알았다. 그외 미그기나 미그기 조종사들은 이제 분석을 하기 위해 공공연하게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미그-15는 이제 현격하게 구식의 전투기가 되었고 궁금증은 줄어들었으나, 한 가지 사실이 밝혀 졌다. 김포에 도착한 미그기는 완전한 상태의 것이 아니었다. 조종석의 히터와 환경 시스템이 고장난 상태인 것이었다. 게다가 다른 미그기 조종사들은 한결같이 미그-15가 높은 고도에서 편안하고, 잘 디자인되었고 히터 시스템이 훌륭한 비행기로서 기억을 하고 있다.
급강하시의 문제점에 대해선 정확한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 척 예거는 오키나와 실험뒤 수년 뒤에 소련의 미그 기술자와 만나 그 문제점에 대해 토의를 했었다. 그 기술자는 척 예거가 어쨋던 간에 급강하시 비행기의 콘트롤을 회복하고 살아났다는 사실에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설계상의 기본적인 결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항은 후에 17과 19에서는 개선이 되었다.
이상은 제가 자유세계에 최초로 안착한 미그기에 대한 이야기를 인터넷상에 있는것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걸 찾은 이유는 우선 척 예거 아찌를 하는데 노 소위 스토리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쇼킹한 사건이었으면 외국 게임에도 나올까? 하고서요.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인데다가 비행기와 전쟁얘기라면 눈이 벌개지도록 밤이 새는 지도 모를정도로 파고들었던 저가 모르는 얘기란 사실에 그만 충격을 받아서리...
foxmouse : 정말로 좋은 내용을 보내주신 ihere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이 노금석 소위의 이야기는 홈지기도 언젠가는 꼭 불타는 하늘에 올려야할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홈지기 역시 ihere님처럼 '척예거 아찌의 공중전'에서 처음으로 이 노금석 소위의 이야기를 접했지요. 이당시 미군은 미그를 몰고 귀순하는 조종사에게 당시돈으로 10만달러라는 거금을 현상금으로 내건 일명 '무라 프로젝트'를 추진중이었 다고 합니다.
그러나 뒷이야기를 알길도 없고 그때의 자세한 전말에 대해서 궁금했었습니다.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신 ihere님께 다시한번 감사를~~~~!!!
한가지 재미있는 것이 척예거를 보면 미션 설명중에서 이 북한 조종사의 이름이 '노금석'이 아니라 '김석호'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것이 맞는 것인가 했는데 이게 노금석을 미국식으로 표기하니깐 '금석-노'가 되었구요. '금'자를 한자로 쓰니까 나중에 '김'이라고 읽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노(Ro)를 누가 호(HO)로 잘못 옮겨 적은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김석호'라는 전혀 엉뚱한 이름이 척예거의 공중전 매뉴얼에 올라있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나 잘못 알고 계셨던 분들은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아두면 좋겠습니다.
'군사무기.비행기.전차.개인화기.항모.전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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