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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 김완 (BaB)
○ 독일 공군의 실태 (1941년 2월 - 1942년 10월)
독일 공군이 RAF를 파멸시키거나 영국 국민의 사기를 꺾는데 실패한 것이 분명해지고 있던 1941년 초에는, 많은 전투기와 폭격기 비행단 (Geschwader)들이 영불해협으로부터 이동되었다.
[ 독일의 야간 전투기 (Bf 110, Ju 88) ]
독일 공군 사령관 헤르만 괴링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1941년 6월 22일로 확정된 소련 침공을 위해서 영국은 포기하고 있었다. 독일군이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게 되는 1차 대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히틀러의 약속은 있었지만, 1942년의 독일은 실제로 여러 전선에서 전쟁을 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프랑스와 노르웨이에서 영국과 싸우면서 소련, 북아프리카, 지중해에서도 싸우고 있었다.
대부분의 비행기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중동에까지 분산되어, 독일 공군은 한계점까지 갈라져서 있었다. 따라서 서부 유럽에서 RAF와 싸울 수 있는 비행기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독일 공군의 반격이 약화되자, RAF는 더 공세를 취해서 프랑스와 독일에 대한 야간 공습과 함께 프랑스 상공에 대한 전투기 주간 출격을 시작하였다. 이 폭격에 대항하여, 요제프 캄후버 소장이 지휘하는 특수 야간 전투기 비행대가 괴링에 의해 조직되었다. 침입해 오는 적 폭격기들을 탐지하고 야간 전투기들이 요격할 수 있도록 유도해 주는 "캄후버 라인"이라는 레이더 방어체계가 건설되었다.
메서슈미트 BF 110이나 융커스 JU 88과 같은 대형 쌍발기들이 야간 전투기로서 큰 성과를 올렸다. 괴링은 미국의 초기 주간 공습을 우습게보았지만, 영국본토 항공전의 에이스로서 독일 공군의 전투기 지휘관이 된 아돌프 갈란트는 다가오는 위험을 내다보았다.
자원이 풍부하고 독일 폭격기들의 행동 범위 훨씬 밖에 위치한 미국은 수 천 대의 폭격기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비행기들이 전부 영국에서 발진한다면, 독일 전투기들이 다른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에 독일은 괴멸되어 버릴 것이다.
[ 독일의 Flak 88 대공포(상당수가 열차 위에 설치되어 운용 되었다고 한다.) ]
갈란드는 또한 영국본토 항공전 이후에 폭격기 생산을 늘리는 대신에 독일 공군의 전투기 생산은 사실상 무시되고 있음을 알았다. 이것은 방어보다 공격을 중시하는 히틀러의 군사 전략에 의한 것이었다.
'미국의 초기 공습 기간 동안에 대공포 사수들의 형편없는 사격 솜씨는 독일에서 농담거리가 되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병사가, 집행방법을 선택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대공포 사격에 의한 죽음을 선택했고, 탑 꼭대기에 묶여졌다. 3명의 독일 대공포 사수가 3주일간 그에게 쏘아대었다. 사격수들이 그 병사를 끌어내리기 위해 가보니, 그는 한발도 맞지 않았으나 그 대신 굶어서 죽어 있었다.' |
증가하는 미국의 위협에 대처하고 전투기 부대를 증강시키기 위해서, 갈란드는 새로운 조종사들이 실제 전투기 부대에서 작전 경험을 가지도록 하는 훈련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는 또한 독일 공군의 제 2인자이며 조달책임자인 에르하르트 밀히 원수를 설득하여, 전투기 생산을 1943년 중반에는 월 250대에서 1,000대로 증가시켰다.
"하늘의 새를 전부 없앤다고 해서 그 새를 멸종시킬 수는 없다. 알들과 둥지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 이태리의 줄리오 듀헤 장군, 비행기 공장과 다른 산업목표들에 대한 폭격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
[ 독일의 주력 전투기 Bf 109와 Fw 190 ]
그 당시, 갈란트는 메서슈미트 Bf 109와 포케불프 Fw 190이라는 두개의 우수한 전투기를 휘하에 보유하고 있었다. Bf 109는 이미 유럽점령의 전쟁 초기에 이미 성능을 입증하였으며, 최신형 109G는 더 강력한 엔진을 장비하고 거의 시속 400마일 가까운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새 엔진의 증가된 무게는 기동성을 저하시키고, 짧은 항속거리와 잘 손상되는 좁은 바퀴를 포함해서 Bf 109의 다른 문제점들에 추가 요인이 되었다.
1941년에 등장한 Fw 190은 세계 최첨단의 전투기로서 빠르게 인정을 받았다. Bf 109보다 더 빠르고 튼튼하며 기동성이 우수한 Fw 190은, 초기의 엔진 문제가 해결된 이후부터 독일 공군 비행대들에서 빠르게 사랑받는 기종이 되었다.
게다가 더 강력한 전투기 두 가지가 개발단계에 있었으며, 이들은 이제까지의 공중전에서는 전혀 등장한 적이 없는 종류들이었다.
○ "비밀 무기"들의 탄생
1930년대에는, 나치 통치하에서 전국을 휩쓴 반 지성주의, 인종 차별, 종교적 탄압에 의해서 독일의 우수한 과학자들 중 많은 수가 희생되었다. 독일 지도부들에는 이론 과학자들 보다는 기술자들이 훨씬 더 많아졌고, 연구개발 분야가 이 기술자들에 의해 주도되게 되었다.
[ He 178 (상), He 280 (하) ]
독일인의 "지적인 우월성", 군사적인 면의 강조, 기술을 중시하는 독일의 전통을 존중하는 나치의 정책에 의해서, 이 독일 기술자들은 새로운 전쟁용 기술의 개발에 크게 박차를 가하였다.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들이 정부의 후원으로 운영하는 연구소들이 전 독일에 설립되었고, 그중 비밀시설의 대부분은 독일 공군의 것이었다. 이 시설들에서는, 신형 비행기와 고체 연료 및 액체 연료 로케트, 제트 엔진 계획들이 1930년대 중반에 이미 설계 단계에 있었다.
1936년에, 에른스트 하인켈의 항공사는 제트 추진의 가능성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많은 실험 후에, 독일 최초의 제트 엔진인 HES 3이 개발되었다. 이 엔진을 사용한 시험기 He 178은 1938년 8월 24일에 세계 최초의 제트 비행을 실시하였다. 이것은 2차 대전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 후 이 비행기는 독일 공군의 기술 책임자인 밀히 원수와 에른스트 우데트 장군에게 시범을 보였으나, 놀랍게도 아무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독일 공군의 자원이 다른 분야에 쓰여야 하며 이런 비행기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He 178시험기에서 발전시킨 제트 전투기 He 280은 사장되고 말았다.
[ Me 262와 유모 004엔진 ]
다른 회사들도 자체 제트엔진 개발을 시작하여, 융커스도 독일 공군의 지정을 받아 1,300마력의 유모 004엔진을 1938년부터 개발하였다. 여기에 맞추어 메서슈미트 회사는 새로운 엔진에 맞는 비행기 개발을 의뢰받아, 영국의 전투 시기인 1940년에 시험을 시작하였다. 기체는 1년 후에 완성되었고, 신형기의 초기형인 Me 262 슈발베(Schwalbe), 즉 "제비"가 1942년에 첫 비행을 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발전이 아니라 큰 도약이다!"
- 독일 공군 아돌프 갈란드 장군, 1943년 5월 22일 ME 262 제트기의 시범비행 후 -
그러나 독일 항공 산업이 그전에 저지른 실패들에서 생긴 두려움과 불신 때문에, 이 제트 전투기의 초기 개발이 지연되었다. 또 다른 계획인 He 177 중폭격기는 계속되는 엔진 화재로 지연되고 있었으며, 그 실험형은 자주 공중 폭발을 일으켰다. (후에 He 177은 "독일 공군의 라이터"라는 뜻의 별명이 붙었다)
[ "독일공군의 라이터" He 177 ]
밀히 원수는 Me 262의 제트 엔진이 대량 생산에 들어간 후에 이런 문제를 일으킬까 염려하고 있었다. 게다가 많은 문제를 일으키다가 결국 취소되어 버린 Me 210 2인승 전투기로 인해서, 그는 사장인 빌리 메서슈미트를 불신하고 있었다. 원래는 Bf 110의 대체용으로 설계되었던 Me 210은, 기체가 불안정하여 스핀 (Spin : 기체의 회전현상)을 자주 일으켰음에도 생산에 들어갔다. 그러나 계속 추락사고가 발생하여, Me 210 계획은 결국 취소되고 말았다.
밀히는 이에 대한 대가로 메서슈미트의 Me 262개발을 중지토록 명령했다. 메서슈미트는 이 명령을 무시하고 비밀리에 Me 262계획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독일 공군의 제트기 개발 지연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 동안 메서슈미트의 회사는 더 혁신적인 비행기인 Me 163로케트 전투기도 개발하고 있었다. 독일의 로케트 실험은 1920년대부터 실제로 시작되어, 독일 로케트 협회라는 단체가 액체 연료 로케트들을 실험하였다. 같은 시기에, 자동차로 유명한 프리츠 폰 오펠은 고체 연료 로케트를 연구하고 있었으며, 1929년에 글라이더에 장착해 사용해 보았다.
[ Me 163과 발터로켓 ]
독일군 무장 개발 부서는 극비리에 액체 연료 로케트 개발 계획을 1929년에 수립하고, 베를린 남쪽에 시설을 갖추었다. 1939년에 나치가 권력을 잡은 후, 이 시설들은 발트해 연안의 페네뮌데로 옮겨졌다. 베르너 폰 브라운의 지취로 액체 연료 로케트가 개발되고 1936년 4월에는 피스톤 엔진 비행기인 He 112에 장착하여 시험 비행을 했다. 다른 시설에서는, 헬무트 발터가 과산화수소를 추진 연료로 하는 로케트 추진기를 설계하고 있었다. 1936년에 그는 알렉산더 리피쉬의 제안에 의해 삼각 날개 또는 꼬리 없는 비행기로 설계되고 있던 고속 실험기 "X계획"에 사용될 엔진을 개발하고 있었다. 발터의 새 엔진은 1937년 He 87복엽기에서 시험 비행에 처음 성공하였다.
1939년에 "X계획"은 메서슈미트사로 넘겨졌다. 1940년에는 리피쉬의 새로운 로케트 추진 실험기로서, DFS 194라는 꼬리 없는 1인승기가 시험 비행을 했다. 그 성능은 예상을 뛰어 넘었다. 장착된 발터 액체 연료 로케트 엔진은 최고속도 342마일, 상승속도 분당 5,300피트를 낼 수 있었다. 이 비행기는 생산이 결정되어, Me 163이라는 새 모델명과 코메트(Komet)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최초의 Me 163A는 1941년 8월에 비행하였으며, 두 달 후에는 시속 623마일의 속도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였다.
아직도 복엽기가 군용으로 사용되던 시기에, Me 262와 Me 163은 항공기술의 큰 도약을 이루었다. 전쟁이 임박하면서 더 추진이 가속되어, 독일 설계가들과 기술자들의 상상력은 최대한으로 발휘되었다. 그러나 독일 최고 지도자들과 독일 공군은 연합군과 제 8공군에 대해서 이를 어떻게 활용하였는가?
'폭격임무를 비행할 때, 사격수들은 적 전투기들의 공격 방향을 표시하기 위해서 "시계 자판" 체계를 사용했다. "12시"는 정면, "6시"는 바로 뒤쪽을 의미했다. 만약 사격수가 "2시 방향에 적기"라고 외치면, 전투기들이 정면에서 오른쪽으로 60도 방향에서 공격해 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
'군사무기.비행기.전차.개인화기.항모.전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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