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호 :
명성황후 (明成皇后,
1851~1895) |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태어났다. 증(贈) 영의정 치록(致祿)의 딸이다. 9세 때 고아가 되어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책봉되었다. 그러나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完和君)이 태어나자 이를 기뻐하는 흥선대원군과 대립, 흥선대원군의 반대파를 규합하면서 민씨 척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착실히 다졌다.
1873년 일본에서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면서 내외정세가 긴박해지고, 경복궁(景福宮) 중건으로 민생고(民生苦)가 가중되는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자, 그를 탄핵하기 위해 유림(儒林)의 거두 최익현(崔益鉉)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 이어 흥선대원군파의 반대 상소와 주장을 배척하고,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함으로써 정권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뒤, 대원군파를 숙청하고 쇄국정책을 폐하여 일본과 수교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궁궐을 탈출, 화개동(花開洞) 윤태준(尹泰駿)의 집을 거쳐 충주(忠州)·장호원(長湖院)으로 옮겨 다니며 피신 생활을 하였다. 이 와중에 흥선대원군이 중전의 국상(國喪)을 선포하자,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된 뒤 다시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다시 잡았다.
1884년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실각하자, 심상훈(沈相薰) 등으로 하여금 청나라가 개입하도록 함으로써 3일 만에 개화당(開化黨)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후 일본 세력의 침투가 강화되면서 김홍집(金弘集) 등 친일(親日) 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7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흥선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公使)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을 궁중에 잠입시켜 건청궁(乾淸宮)에서 그녀를 난자시해(亂刺弑害)하고, 시신은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그 뒤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복호(復號)되었고, 1897년(광무 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해 11월 국장(國葬)으로 청량리(淸凉里) 밖 홍릉(洪陵)에 묻혔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명성황후에 대해 재평가작업이 일어나면서, 을미사변이 미우라 고로의 단독범행, 또는 그의 후원을 받은 민간인들이나 일본 낭인들의 범행,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투쟁의 산물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는데, 차츰 이러한 통설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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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마산우체국 소인 '명성황후(?)엽서' 발견 | ||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고종의 정비인 명성황후(1851-95)의 생전 모습을 담은 유일한 사진인지 아닌지를 둘러싸고 줄곧 논란을 빚어왔던 '궁중복식을 한 조선여인'의 사진을 담은 엽서 실물이 최초로 발견됐다. 이 여인 사진은 그동안 여러 인쇄매체에 수록된 형태로 전해지고 있으나, 엽서에 수록된 모습으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한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매물로 나온 이 엽서는 상단 오른쪽에 '(메이지)42년(=1909) 7월31일'자 '마산'(馬山)이라는 소인이 찍혀 있는데다, 그 하단에 걸쳐서는 '韓國宮中の老女'(한국궁중의 늙은 여자)라는 일본어 표현과 함께 이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인 'An Old Waman in the Corean Court'라는 말이 나란히 붙어 있다. 따라서 이 엽서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방되기 1년 전인 1909년 7월31일 경남 마산우체국에서 누군가에게 보낸 것임이 드러난다. 아울러 이 사진의 주인공이 '한국궁중의 노녀'임이 일본어와 영어로 나란히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엽서는 1909년 무렵 조선의 이국적인 풍물을 외부에 소개할 목적으로 제작된 것임을 추정하게 하고 있다. 엽서에 수록된 이 조선 궁중여인이 명성황후인가 아닌가를 두고 그동안 관련 학계에서는 격렬한 논쟁을 벌여왔다.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 등이 '명성황후설'을 주장하는데 대해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신복룡 교수 등은 명성황후가 아닌 '궁중여인설'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이번 엽서가 발견됨으로써 '궁중복식 여인'의 모델은 명성황후가 아닌 것으로 사실상 결론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엽서 발행 시기가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된 지 14년이나 지난 뒤인데다, 전임 황제(왕)의 정비(황후)이자, 비록 허울뿐이었지만 당시 황제(순종)의 어머니의 사진을 엽서에 수록하고, 더구나 그 위에 우체국 소인을 찍게 하는 등의 '불경스런'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사진의 주인공 논란에서 중립적 위치를 지켜온 국사편찬위원회 이민원 박사(대한제국시대사 전공)는 "엽서만 보면 분명 이 사진은 명성황후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다"면서도 "하지만 나로서는 엽서 그 자체에 대한 진품 여부를 가릴만한 위치에 있지 않아 최종적인 판단은 유보한다"고 말했다. 이 엽서는 최근 한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매물로 나왔다가 스페인으로 팔려나갔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 구체적인 경매가나 원소장자 및 현소장자 등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taeshik@yna.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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