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


이슬람권―중동은 물론 동유럽의 일부(알바니아, 불가리아, 유고)를 포함하는―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먼 과거로 빠져들게 된다. 신비로우면서도 매혹적이고, 때로는 몽환적이면서도 안타까움에 가슴을 저며야하는 그런 분위기로……

이들이 다루는 소재는 이미 신화가 되어 전해 내려오는 먼 과거의 얘기, 인간 숙명에 끈질기게 도사리고 있는 비극적 부조리, 그리고 관습과 억압이라는 어찌할 수 없는 굴레 속에서 일어나는 민중의 고단하고 슬픈 삶의 모습 등이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과 『꿈의 궁전』에서도 그랬고 <아민 말루프>의 『타니오스의 바위』와 『사마르칸드』, 그리고 <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쉽게 느낄 수 있다.    또 이번 추석 연휴 때 읽었던 <야샤르 케말>의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와 『아으르 산의 신화』라는 소설 속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예외는 아니다.


    <야샤르 케말>의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

    는 매혹적인 사랑과 슬픔의 이야기로 납치혼과

    명예죄(피의 복수)라는 그릇된 전통에 희생되

    는 여인의 삶을 아이의 시선으로 면밀히 파헤치

    고 있는 책이다.   명예죄란 무엇이던가? ‘피는

    피로써 갚는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관습

    법이다. 어떤 이유로 한 가문의 누군가가 다른

    가문으로부터 살해나 모욕을 받았을 때는 그에

    따라 복수가 시작된다.   상대 가문의 누구이든

    죽여야만 하고  그리하여 피의 복수는  끊임없

    이 반복된다.  이슬람문화,  특히 유목민들의

    문화권에서는 이러한 ‘피의 복수’를 용인한다.

     그러나 복수의 명분이 되는 그 명예라는 게 순전히 남성의 명예이며 가문의 명예를 뜻한다. 결코 여성을 위한다거나 올려 세우기 위한 게 아니다. 오히려 여성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물론 이런 사고방식은 이네들만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뿌리 깊게 박혀있는 전통이다. 앞서 소개한 <김탁환>의 소설 『열녀문의 비밀』에서도 잘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비판받아 마땅한 관습이며 진작에 없어져야 할 유풍이지만 전통이란 게 얼마나 생명력이 끈질기던가?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는 1950년대에 작가가 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 만난 소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아름답기로 소문이 난 에스메는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던 할릴이라는 부유한 사내에게 납치―우리나라 풍속으론 ‘보쌈’이라는 약탈혼에 해당되겠다―돼 강제로 혼인하게 된다. 그녀는 체념한 채 아들 하산을 낳고 살지만 옛 애인 압바스가 찾아오자 “돌아가 달라”면서도 만남을 지속한다. 할릴과 압바스의 갈등이 적개심으로 치달으면서 할릴은 압바스의 총에, 압바스는 할릴의 친족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후 에스메의 시어머니와 시동생을 비롯한 할릴의 친족들은 어린 하산에게 총을 선물한다. 그러면서도 지속적으로 “네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결국 저 여자”라며 몇 년간이나 에스메를 손가락질하며 에스메가 스스로 죽기를 종용하고 그녀가 이를 거부하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아들 하산에게 엄마가 죽어야 함을 계속 주장한다.

결국은 주변 사람들과 가족들의 압력에 못 이겨 어머니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었던 하산의 복잡한 심정을 처절한 가족사, 사람들의 질투와 증오를 섞어 간결한 문체로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케말>은 명예 살인 가운데 최악의 경우를 소설화해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충격적인 의구심에 대해 “아, 이렇게 벌어지는 구나” 하고 현실을 알게끔 해준다. 여러 시점을 다양하게 섞어 가면서 긴장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솜씨는 현대 이슬람의 아픈 비극을 말하면서도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고 간다.


『아으르 산의 신화』는 <케말>의 작품 중 가장 많이 번역된 작품으로 전설이 되어버린 슬픈 남녀의 사랑과 소수민족에게 가해진 차별의 역사를 되새기고 있다. 아으르 산은 성경에서는 ‘아라랏 山’으로 표현되는 聖山이다.


아으르 산자락에 사는 청년 아흐멧에게 어느 날 말 한필이 찾아든다.  말을 세 번 놓아 주고도 그 말이 같은 사람에게 찾아오면 말은 그 사람의 소유가 된다는 이 지방 관습에 따라 아흐멧은 말을 자기 소유로 삼는다.  한편, 이 사실을 안 말 주인, 제후 마흐뭇은 말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지만 아흐멧은 이를 거부하고 분노한 제후는 아흐멧의 삼촌 소피와 아흐멧을 잡아 가둔다.  우연히 감옥에서 아흐멧을 보게 된 제후의 딸 귈바하르는 아흐멧과 사랑에 빠지고 이들의 절절한 사랑은 제후와 산 사람들 간의 화해를 이끌어내지만 결국 귈바하르의 정절을 의심하는 아흐멧으로 인해 파국을 맞는다. 터키와 쿠르드족의 갈등을 비유하는 설화적 형식과 연인들의 아름답고도 비극적인 사랑이 긴 여운을 남기는 이 작품은 그 이면에 깔린 작가의 정치적 의도로 인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은 오스만 제국 말기 쿠르드족에게 동화 정책을 강제 집행하던 오스만 제국과 쿠르드족의 갈등을 풍자한 소설이다. 쿠르드족은 세계 최대의 소수민족이며 천만 명 정도가 터키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민속 의상 등 자신들의 전통과 관계된 많은 것들을 금지당했고 쿠르드어 저술과 출판, 방송이 철저히 봉쇄된 상황이며 계속적인 정치적·문화적 탄압 아래에 있다. 작가는 이러한 쿠르드족의 현실을 이 작품에서 설화 형식과 상징을 통해 세상에 드러내고자 했다.


[ 작가 소개 ]

1923년 터키 아다나시의 작은 마을인 헤르미테에서 출생했다. 1944년 『추한 이야기』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공산당을 조직하는데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구속된 후 풀려나 1951년부터 <줌후리에트Cumhuriyet>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아기』, 『가게 주인』, 『땡볕』 등 여러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채집한 아나톨리아 민속 자료를 바탕으로 훗날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대표작 『의적 메흐멧』과 『아나톨리아의 세 가지 신화』를 집필하였다. 1962년 터키 노동당에 입당하면서 작가로서의 기반을 확고히 하게 되는 여러 작품들을 집필하였으며, 1969년 발표한 『이슬람 사원의 겨울』이 정부를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이후 터키 작가 협회 회장, 터키 작가 노조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정치 활동에도 주력하였다.

『철공소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으로 마다라르 소설상(1974)을 수상하였으며, 1970년 프랑스에서 『불로초』로 최고의 외국 문학상을, 『빈보아 신화』로 그해 최고의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1982년에는 ‘국제 델 두카’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1987년에는 스웨덴 한림원과 작가 협회의 추천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그는 여성, 소수민족, 가난한 소시민과 도시 빈민의 이야기를 현대의 신화로 다시 창조해내고 있으며. 꾸준히 수집한 민속자료를 바탕으로 서구화를 통해 잃어버린 터키의 전통과 가치 회복을 염두에 두면서도 그릇된 전통과 악습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이고 긴박감 넘치는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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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삶의 힌트 |글쓴이 : AMANO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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