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einkel He 112 ◇


This document was edited at 2004. 12. 9

전쟁의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아마도 ~ 했더라면...  ~ 했을 것이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접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들 실패한 쪽에서 나오는 이야기이며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접하게되면 그동안 눈여겨 보지 않았던 전쟁의 또다른 면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된다. 독일공군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다보면 이런 식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화제가 되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베일속의 전투기가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하인켈사의 야심작인 He 112이다.

이 전투기는 2차대전에서 독일공군의 주력전투기로 활약할 뻔한 기회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Bf 109에 가려 결국 전쟁의 주역이 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체를 살펴보면1930년대 후반 독일의 항공기술이 얼마나 발전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된다. 불타는 하늘 (airwar.hihomecom)의 Great War Planes... 이번회에서는 He 112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 Bf 109의 첫 번째 라이벌

흔히들 Bf 109의 라이벌이라고 하면 당연히 영국공군의 슈퍼마린 스핏화이어를 떠올리겠지만, 사실 Bf 109가 가장 먼저 넘어서야했던 라이벌은 같은 독일의 항공사였던 하인켈사의 He 112였다. 불타는 하늘의 항공전사나 Bf 109 스토리에서도 언급했지만, 1930년대 중반에 독일공군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차세대 전투기 선정사업에 경쟁기들로 참가했던 4개기종 (아라도사의 Ar 80V1, 바이예리쉐 플룩쪼이베어케 (Bayerische Flugzeugwerke, BFW)의 Bf 109V1, 하인켈사의 He 112V1 그리고 포케불프의 Fw 159V1)중에서 Bf 109와 He 112가 우수한 성능을 과시하면서 최종적인 경쟁기종으로 남아 최후까지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비록 최후의 승자는 Bf 109였지만 He 112는 여러 가지면에서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1930년대 초반, 독일의 군비를 제한하던 베르사이유 조약이 점점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하자, 독일내에서는 1차대전의 영광을 떠올리며 독일공군을 다시 창설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연합국의 감시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으므로 미래의 독일공군 조종사들은 수송기나 훈련기등의 기체를 이용해서 조종술을 연마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무렵 하인켈사는 독일의 여러 항공사들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항공기들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독일공군의 재창설 움직임에 따라 He 45, 46, 50과 같은 우수한 2인승 복엽기들을 제작하여 납품하고 있었는데 이 복엽기 시리즈의 결정판으로 완성된 He 51 복엽전투기는 매우 세련된 디자인과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최초로 날아올랐던 1933년 5월을 기준으로볼 때 영국공군이나 프랑스공군의 일선 전투기에 크게 뒤지지 않는 우수한 성능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He 51은  아라도사의 Ar 68과 함께 재창설을 선언한 독일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선정되었고 230여기에 달하는 기체가 생산되어 독일공군 조종사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 하인켈사의 초기 작품들 좌로부터 He 45, 46, 50 ]

하지만 이 He 51은 그 실전 배치가 시작될무렵 이미 구식이 되어 있었다. 이미 전세계적인 차세대 전투기의 흐름은 고기동성의 복엽기가 아닌 빠른 스피드를 주무기로하는 단발엔진의 단엽전투기로 구체화 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독일공군도 미래의 하늘을 장악하기 위한 차기 전투기 선정사업을 급히 추진하게 된 것이다. 하인켈사는 He 51의 뒤를 이을 후계기종을 제작하여 또다시 주력 전투기의 제작사가 되겠다는 야망에 불타올랐으며, 차기 전투기의 제작에 모든 정열을 쏟아붇게 된 것이다.

[ 하인켈사의 성공작 He 51, 이 세련된 전투기는 독일공군의 재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

1933년 5월 2일, 독일공군은 경합에 참가하게될 4개 항공기 제작사에 차세대 전투기의 요구사향을 담음 공문을 발송했다. 이 공문에는 다음과 같은 수준의 단좌 단발 단엽전투기를 제작해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 최고 속도는 고도 19500피트에서 시속 400km 이상이어야 하며 최고속도에서 20분 이상을 비행할 수 있어야 함.

2. 적어도 3정의 기관총을 장착하거나 (각 기관총당 1000발의 탄환을 탑재할 수 있어야 함) 1문의 20mm 기관포를 장착해야 함 (기관포에는 200발의 포탄을 를 탑재할 수 있어야 함).

3. 기동성과 상승력의 확보를 위해 익면하중이 1평방미터당 100kg 이하로 유지되어야 함.

4. 기체의 성능이 비슷할 경우에는 수평비행속도 > 상승속도 > 기동성의 순위로 평가될 것임.

사실 독일공군이 내건 요구조건은 당시 독일의 항공기술력을 감안할 때는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런 요구조건을 달성하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판단한 각 항공사들은 즉시 새로운 전투기들을 개발하게 되었다. 하인켈사에서는 형제였던 발터 귄터와 지크프리트 귄터가 이끄는 설계팀이 이 프로젝트를 떠맡게 되었다. 사실 미리 차기 전투기 사업에 대한 정보를 얻었던 하인켈사는 독일공군이 공식적으로 공문을 보내기 이전부터 비밀리에 프로젝트 1015라는 이름으로 이미 새로운 전투기의 설계를 시작하고 있었는데  귄터 형제는 공문이 도착하자마자 그들이 제작하고 있던 신예기에 He 112라는 새로운 명칭을 붙였다.

[ 최초의 원형기인 He 112V1 ]

He 112의 개발과정에는 하인켈사가 이전에 제작했던 수송용 항공기였던 He 70 블리츠의 제작 경험이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He 70 블리츠는 민영 여객항공사였던 루프트한자의 요청에 따라 4명을 승객을 탑승시킬 수 있는 단발 엔진의 여객/수송기였는데, 실은 미래 군용기의 개발을 위하여 여객기라기보다는 군용기의 개발요건을 따르고 있었다. (실제로 훗날 이 기체는 약간의 개조를 한후 스페인내전에서 정찰/폭격기로 사용된적도 있다.)

이 블리츠는 하인켈사가 미국 록히드사의 오라이언 우편배달기의 설계를 본따 제작한 것이었지만, 하인켈사가 제작한 최초의 단엽기였고 최초의 전 금속제 기체였으며 전반적인 성능이 매우 우수한 편이었으므로 귄터형제는 이 He 70 블리츠의 설계를 기반으로 새로운 전투기를 제작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 하인켈 He 112의 설계에서 밑거름이 되었던 He 70 블리츠, 이 기체의 설계는 훗날 독일공군의 주력 폭격기로 맹활약하게되는  He 111에게도 이어지게 된다. ]

따라서 He 112는 He 70의 여러 가지 특징을 물려받게 되었는데, 우선 전금속제 동체와 두쌍의 역갈매기형 주익, 모노코크 방식으로 제작된 동체를 가지게 되었다. 주 강착장치는 주익이 꺽이는 지점에서 바깥쪽으로 접혀들어가도록 제작되었고, 완전히 펼쳐졌을 때 폭이 9m로서 충분히 넓었기 때문에 지상활주시에 매우 안정적인 성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다보니 어떻게 보면 He 112는 He 70의 축소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He 112V1의 개방식 조종석과 후방시야가 좋지 못한 점등은 아직 복엽기 시대의 구식 디자인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으므로 경합에서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우려가 있었다.

최초의 원형기인 He 112V1은 1935년 9월 1일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애초에 He 112의 심장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던 융커스 유모 210 엔진이 아직 실용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형기에는 695마력의 롤스로이스 케스트랄 엔진이 임시로 장착되었다. 첫 번째 시험비행에서 애초의 기대보다는 최고속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경합 일정이 이미 코앞에 다가왔으므로 하인켈사는 이 기체를 즉시 트라베뮌데의 독일공군 비밀기지로 급히 파견하여 경합에 참가하도록 했으며, 이후 하인켈사는 몇가지 개선을 시행한 He 112V2, V3를 연속으로 제작하여 역시 경합에 참가하도록 했다.

[ 하인켈 He 112V2와 V3, 기체의 형태에 약간의 변화가 보인다. ]

차기 전투기 선정을 위한 성능시험은 1936년초에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는데, 경합에 참가한 4기의 시험기체들중에서 포케불프사와 아라도사의 기체들이 예상외로 낮은 성능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게 되면서 조기에 경합에서 탈락함에 따라 경합은 He 112와 Bf 109의 2파전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경합에서 패하다

사실 그동안 많은 우수한 항공기들을 생산하면서 널리알려졌던 하인켈사에 비해 BFW사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신예 항공기 제작사였다. 그러므로 하인켈사의 설계팀은 이 경합에서 자신들이 제작한 He 112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며 내심 BFW사를 깔보고 있었던 것이다.

본격적인 경합이 시작되면서는 융커스 유모 210 엔진을 장착하여 속도가 약간 더 빨라진 He 112V2과 추가적인 개량을 가한 He 112V3가 나섰는데, 경합이 시작되자 두 전투기의 장단점이 점점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큰 날개를 가졌던 He 112는 선회성능에서 우수했지만 속도면에서는 Bf 109가 거의 모든 고도에서 우세한 성능을 보였다. 하지만 급강하와 급상승으로 이어지는 여러 가지 거친 기동 시범에서도 Bf 109의 우세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어지는 스핀 테스트에서 Bf 109V2가 아무런 무리없이 테스트를 통과한 반면 He 112V2는 스핀에서 회복하는 단계에서 불안정성을 보이다가 결국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에 놀란 하인켈사는 급히 기체를 수리하여 다시 스핀 테스트를 받게 했으나 이번에도 다시 추락하고 말았다.

여기에다가 바다건너 영국에서 전해진 첩보가 이 경합과정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첩보의 내용은 바로 독일공군이 내심 운명의 라이벌로 여기고 있던 영국공군이 곧 차세대 전투기인 스핏화이어를 대량 발주했으며 곧 이 전투기의 대량 생산을 추진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은 독일공군 수뇌부의 마음을 다급하게 만들었고, 괴링은 하루빨리 경합을 마무리짓고 차세대 전투기를 선정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사실 영국공군측에서도 독일공군이 차세대 전투기를 이미 개발했다는 첩보에 따라 스핏화이어의 개발을 급히 추진했었다. 이런 양국의 경쟁 관계가 훗날 스핏화이어와 Bf 109라는 희대의 라이벌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보인 것이다.) 그리고 결국 독일공군에서는 그동안 성능 테스트를 무리없이 통과한 유일한 기종인 Bf 109를 일단 최우수 전투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결정은 아직 잠정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하인켈사는 아직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더구나 독일공군내에는 아직 하인켈사에 호감을 가진 고위간부들이 많았기 때문에 하인켈사에게 일단 성능 개량을 계속 추진할 기회를 준 것이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귄터 형제는 다시 몇가지 성능 개량 작업에 들어갔으며 이른 바 zero 시리즈라 불리는 He 112A-0 원형기 15기를 다시 제작했다.

[ 양산형으로 계획되었던 He 112A-0, 여전히 개방식 조종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

이 He 112A-0 시리즈의 기체들은 원래 하인켈사가 주력전투기로서의 정식채용이후 대량생산을 목표로 설계를 추진했던 기체들인데, 사내의 기호로는 He 112V4 ~ V8에 해당되는 기체들로서 기본적으로는 출력이 더 향상된 유모 210Da 엔진을 장착하고 있었으며 시리즈의 마지막 기체인 He 112V8의 경우에는 당대 최고의 엔진이던 다이믈러 벤쯔 DB600A 엔진을 장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Zero 시리즈는 버전이 올라갈 때마다 몇가지 개량이 가해지고 성능도 좋아졌지만 BFW사도 Bf 109를 계속 발전시키고 있었으므로 이 Zero 시리즈의 기체들역시 계속 발전하고 있었던 Bf 109V시리즈의 성능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 1936년 10월 독일공군은 최종적으로 BFW사의 최종적인 승리를 선언하기에 이르른다.

[ 하인켈사의 공장에서 He 112를 조립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 ]

사실 지금까지도 이 경합과정에서의 패배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거론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하인켈사가 경합에 투입한 He 112의 시제기들은 거의 모든 기체들이 이전 버전에 비해 조금씩 달라진 비행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시험 비행 조종사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모든 변형들이 모두 Bf 109를 능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험비행기간 내내 He 112는 측면 안정성에 문제를 드러냈다고 하는데 개량형들에게서 보이는 다양한 수직 안정판들의 사진들에서 이 점을 알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 테스트 기간내내 He 112를 계속 괴롭힌 측면 안정성을 해결하기 위해 수직안정판과 러더에 많은 수정이 가해졌다. ]

그리고 무엇보다 경합당시에 시험비행과정에서 결국 사고로 이어진 스핀테스트에서의 불안정성이 He 112의 이미지에 가장 큰 결정타를 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여기에 더해서 사실 하인켈 He 112는 Bf 109보다 더 세련되고 발전적인 기체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발전적인 구조로 인해 기체 제작시에 복잡성이 증가하게되고 결국 높은 제작단가를 초래하며 제작에 필요한 시간이 길어져서 결국 대량생산의 효율성을 떨어지게 만든다는 지적을 받게 되면서 약간 더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대량 생산이 용이한 것으로 평가받은 Bf 109쪽으로 대세가 기울었다는 의견도 타당성을 얻고 있다.

* 포기는 없다

최종적으로 쓰라린 패배를 받아들이게된 하인켈사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He 112의 성능을 더욱 발전시켜 Bf 109를 능가하도록 만든다면 결국 독일공군이 어느정도의 기체를 발주하게 될 것 이라는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체 개발비를 들여 He 112를 계속 발전시킬 예정이었던 것이다. 우선 기존의 zero 시리즈를 양산형으로 전환시켜 양산기의 생산 체재로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6시는 각각 He 112A-01 ~He 112-06으로 명명된후 다양한 용도의 시험비행이나 에어쇼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특이한 것으로는 He 112A-05, 06의 기체들에게 일본해군이 관심을 보여 1937년 일본으로 수출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 더해 하인켈사의 집중적인 로비로 독일공군에서 약간의 추가적인 기회를 주기로 함에 따라 희망은 커져만 갔다. 독일공군에서는 만일 He 112가 더욱 개선되어 Bf 109를 능가하는 경우에는 주력 전투기로 발주할 수도 있다는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 He 112A-0과 He 112B형의 측면도, 마치 전혀 다른 기체처럼 느껴질 만한 파격적인 변화가 느껴진다. ]

이에 따라 하인켈사는 기존의 He 112-A 시리즈의 생산을 중단하고 전면적인 기체의 재설계에 들어가 여러 가지면에서 일신한 면모를 가진 He 112-B 시리즈의 개발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사실 He 112-B형은 A형에 비해서 완전히 달라진 기체로서 이 B형에 이르러서야 Bf 109의 진정한 경쟁기 자격이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될 정도였다.

[ He 112의 기수에 장착되는 MG 17 기관총을 잘보여주는 사진, Bf 109와 달리 기수의 양 측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우선 외형에서는 동체의 전면적인 재설계로 보다 공기역학적으로 우수해졌으며 새롭게 설계된 수직안정판과 러더가 장비되고, 개방형 조종석도 폐쇄식으로 전환되었으며 기존형에 비해 Bf 109의 그것에 비해 후방 시야가 탁월한 돌출형 캐노피가 도입되었다. 기체의 무장능력은 각 500발의 탄환을 탑재할 수 있는 7.92mm MG 17 기관총 2정을 기수에 장비하고 주익에 각 60발의 포탄을 가진 MG FF 20mm 기관포를 2문 장비하여 Bf 109에 손색이 없었다.

[ He 112B의 외형을 잘 보여주는 사진, 특이한 티원형의 역갈매기형 주익과 공기역학적으로 설계된 동체, 시야가 좋은 돌출형 캐노피등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

그러나 이 신형기와 궁합이 맞는 엔진을 찾는 과정에서 몇가지 문제가 발생하여 완성단계까지 이르지 못하고 개발이 지연되었다. 이 과정에서 DB 600Aa 엔진을 장착한 He 112B (He 112V9)이 고도 13500피트에서 시속 485km의 최고속도를 기록하여 당시 BFW사가 양산기로 내놓은 Bf 109B-2를 상회하는 성능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개발과정이 한창 진행되던 1936년, 현대화를 한창 진행중이던 독일공군은 독일공군 전투기부대를 빨리 최신 전투기로 편시켜야 했기 때문에  이미 대량생산 체제로 들어간 Bf 109의 실전배치를 대대적으로 추진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하인켈사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주력전투기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독일공군내의 촉박한 분위기 때문에 아직 신뢰성이 입증되지 못하고 언제 대량생산이 가능할지 모르는 He 112-B 시리즈를 주력 전투기 선정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시키기로 한 것이다. 당시 차기 전투기의 개발, 배치사업을 주도하고 있었던 에른스트 우데트는 이미 성능이 입증되고 빠른 생산이 가능했던 Bf 109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일선의 독일공군 전투기부대에게 공급하는 쪽으로 정책결정을 일단락 지은 것이다.

[ He 112 시리즈의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일러스트 ]

 

해외로의 수출

그는 하인켈사에게 공식적으로 공문을 보내 이미 독일공군의 주력전투기는 Bf 109로 결정되었으니 하인켈사는 He 112-B를 해외 수출용으로 개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권유를 했다. 하인켈사로서는 정말로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미 엄청난 개발비를 쏟아부었기 때문에 이 전투기를 해외에 판매해서라도 어느정도 자금을 회수하는 것이 바람직했던데다가, 이무렵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구식 복엽기들을 대체할 새로운 전투기가 필요했다. 특히 전투기의 개발능력이 없었던 국가들이나 독일의 선진기술에 눈독들이던 국가들에서는 He 112-B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He 112-B의 해외판로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 해외의 여러나라에서 사용된 He 112B의 일러스트, 위에서부터 헝가리, 루마니아, 스페인의 기체이다. 스페인 공군의 경우 주익의 국적마크로 독일공군 콘돌군단과 식별이 된다. ]

이에 하인켈사는 본격적인 유럽 순회비행에 나서게 되는데, 많은 나라에서 시범비행을 실시하여 He 112-B의 선전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수출 작업도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아서 일본에 4기가 판매된 것을 시작으로 스페인, 루마니아, 헝가리등에 수십기의 He 112를 판매하는데 그치게 된다.

 

Heinkel He 112B-1

엔진: 융커스 유모 210G (700마력)

전폭: 9.10m

전장: 9.22m

전고: 3.82m

기체중량: 1627kg

최대중량: 2248kg

최대속도: 510km/h (고도 4,120m)

최대고도: 31200피트 (9500m)

항속거리: 1150km

무장: MG17 기관총 2정 (기수, 각 500발) + MG FF 20mm 기관포 2문 (주익, 각 60발)

 

수데텐 사건과 스페인내전

하지만 독일공군이 He 112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938년 체코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던 수데텐 지방에서 이 지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군사적인 긴장상태가 높아지자 히틀러는 이 지역에 독일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서 신생 독일공군을 대대적으로 파견하여 위압감을 조성하려 했다. 하지만 아직 일선에는 Bf 109로 무장한 독일 전투기부대의 숫자가 매우 부족했으므로 당시 일본에 수출되기 위해 완성된 12기의 He 112B 전투기들이 항구에서 선적을 기다리고 있는 단계에서 독일공군에 의해 차출되어 JG 132 4중대로 급히 배속된후 수데텐 지역으로 이동했다.

[ 수데텐의 위기상황으로 인해 잠시나마 독일공군의 제식 도색을 할 수 있었던 He 112B 전투기들 ]

사실 이런 수데텐 지역에서의 위기상황은 하인켈사로서는 He 112B의 재평가를 받게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만일 이 지역에서 군사적인 충돌이 벌어졌다면 He 112 전투기들은 실전에서 성능을 검증받을 기회가 있었을지도 몰랐지만 아쉽게도 독일이 군사력을 과시하자 수데텐 지역에서의 위기상황은 싱겁게 끝나 버렸으며 Bf 109C의 실전배치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자 모든 He 112B 전투기들은 실전에 투입될 기회도 가지지 못하고 다시 하인켈사로 반환되었다. 게다가 이렇게 일본 수출작업이 지연되는 동안 미리 인도받은 4기의 기체를 테스트해본 일본해군측에서 성능은 우수하나 일본해군이 필요로하는 전투기의 용도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이유로 남은 선적분의 인수를 취소하게 되면서 수데텐 위기상황은 하인켈사에게 있어서 실전투입 기회도 얻지 못하고 일본 수출작업도 좌절되 버리는 2중의 악재가 된 것이다.

일본으로의 수출이 좌절된 기체들은 하인켈사의 본사에 남겨진후 하인켈사가 자체적으로 운용하는 공장 방어 비행대에서 운용되었다고 한다. 이 비행대는 하인켈사에 고용된 민간 조종사들이 전투기의 조종을 맡았으며 실전에는 참가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 스페인에 파견되어 콘돌군단 소속으로 활약한 He 112B, 그러나 스페인 내전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기록하지 못했다. ]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스페인 내전에도 적은 수의 He 112B가 하인켈사의 요청으로 콘돌 군단에 파견되었다. 하인켈사에서는 실전에서 He 112B의 우수한 성능이 검증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투입된 기체들을 모두 무료로 독일공군에 헌납했다.

하지만 콘돌군단의 전투기조종사들은 대부분 Bf 109를 조종해보기를 갈망하고 있었고 He 112에 대해서는 Bf 109보다 떨어지는 성능의 전투기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콘돌군단 사령부는 He 112B를 공중전 임무에 사용하지 않고 지상공격임무에 주로 투입했다. 지상공격 임무에서는 어느정도 활약을 했지만 이 전투기는 지상공격을 전문으로 하는 기체가 아니라 공중전을 위해 태어난 기체였으므로 Ju 87 슈투카나 Hs 123과 같은 지상공격기들의 후광에 가려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었다.

[ 스페인 내전중의 스냅, 좌측에는 He 51 복엽기들이 보인다. ]

오히려 스페인 국민당군에 공여된 He 112B 전투기들이 공중전에 투입되곤 했는데 이때 공중전에서 스페인 조종사가 공화당군의 I-16 전투기를 1기 격추시켜 이 전쟁에서 He 112B가 거둔 유일한 공중전 승리를 기록하기도 했다. 스페인 내전에서도 He 112B에게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으며 오히려 Bf 109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독일공군 최강의 전투기로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 He 112 일러스트 ◆

 

1937년 수데텐 위기상황으로 인해 급히 독일공군에 차출되어 JG 132 전투비행단 4연대에 배속된 He 112B-1, 그러나 이 상황이 싱겁게 종료되면서 결국 실전에 투입되어 보지도 못하고 얼마뒤 Bf 109C에게 밀려나면서 하인켈사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말았다.

 

1937년 콘돌 군단소속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던 He 112B-1, 스페인 내전에서도 He 112B는 제대로 공중전에 투입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마무리하면서...

He 112는 항공전사에서 길이 기억될 치열한 경쟁에서의 패배자로 기억될 전투기였지만 아직도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하인켈사의 설립자인 에른스트 하인켈을 비롯한 하인켈사의 관계자들은 이 경합은 공정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자기들에게는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고 강변했으며, 심지어는 메서슈미트사와 독일공군과의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해 He 112가 빛을 보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루마니아 공군 소속의 He 112B, 루마니아는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He 112를 사용했다. ]

하지만 분명한 것은 He 112는 Bf 109에게 항상 성능면에서 약간씩 떨어졌다는 것이었고, 치열한 생존경쟁에서는 최고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좋은 예가 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Bf 109와 동시대에 태어난 것이 그 저주받은 운명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만일 이 전투기가 조금이라도 일찍 태어났더라면 영국공군의 허리케인과 스핏화이어의 관계처럼 최소한 Bf 109와 함께 독일공군의 양대 주력전투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훗날 하인켈사는 이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He 112의 뒤를 있는 보다 뛰어난 전투기인 He 100을 제작하여 또다시 Bf 109의 아성에 도전하게 되는데 이 He 100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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