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einkel He 100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5. 1. 5
foxmouse: 2005년의 첫 번째 업데이트로 He 100 이야기를 선정했습니다. 사실 불과 15기밖에는 생산되지 않은 너무나 마이너 아이템이지만 Bf 109와 경쟁을 했던 하인켈사의 He 112, 100에 대한 정보가 국내에는 거의 없는 것 같아서 기획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He 112, He 100에 대한 내용도 인기가 높은 Bf 109 스토리의 연장선상으로 보시면 더 재미있게 읽으실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해에는 불타는 하늘의 식구들에게 늘 좋은 일만 함께 하기를...!!!
오만의 댓가
1936년, 독일공군의 차기 전투기 사업에서 최종적으로 하인켈사의 He 112가 메서슈미트 Bf 109에게 패배가 확정되자 경합 초기만해도 승리를 낙관하던 하인켈사는 완전히 초상집이 되어 버렸다. 자국의 주력 전투기를 이름도 없는 신생 항공사에게 빼았겼다는 것은 스스로 독일 최고의 항공기 제작사라고 자부하던 하인켈사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하인켈사는 선정작업이 끝난직후 He 112의 실패원인에 대한 분석작업에 들어갔는데, 얼마뒤에 그들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He 112의 패배요인중 첫 번째로 지적된 문제점은 제작공정에서의 복잡성이었다. 유선형의 곡선으로 이루어진 동체와 커다란 타원형의 날개는 비행성능면에서는 탁월한 선택이었을지는 몰라도 직선으로 쭉쭉 뻗은 디자인의 Bf 109에 비해서 생산시간이나 비용이 훨씬 많이 들어간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경합초기부터 전반적인 성능면에서 Bf 109에 비해 약간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이점은 더욱 문제가 되었다.
두 번째 실패요인은 시험비행과정에서의 불미스런 사고로 인한 이미지의 손상이었다. 사실 시제기가 비행과정에서 사고를 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을지는 모르지만 비교적 순조로운 시험비행을 마친 Bf 109에 비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불미스런 사고가 빈발하면서 시험비행 조종사들 사이에 몇가지 나쁜 평판이 나돌게된 것이었다.
세 번째 요인은 라이벌이던 영국공군의 스핏화이어가 생산에 들어갔다는 첩보를 입수한 독일공군이 시간에 쫒긴 나머지 기존의 형에 비해서 더욱 성능이 향상된 He 112B의 성능을 충분히 검토하지도 않은채 Bf 109를 최종적인 승자로 정한후 대량생산을 급히 추진했다는 점이었다.
네 번째로는 신생 항공기 제작사였던 BFW를 너무 얕보았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제작하는 항공기마다 성공을 거두며 순항해오던 하인켈사는 스스로 어느정도 오만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어떻게 보면 이번의 실패는 오만의 댓가였다.
전혀 새롭게
이렇게 자신들이 내린 여러 가지 결론으로 볼 때 하인켈사의 입장에서는 스스로에게 운이 없었다며 위안할 수 밖에는 없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이 경합에서 탈락한 것은 어디까지나 운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하인켈이 아니었으니 이번에는 Bf 109를 완벽하게 뛰어넘는 전투기를 만들어 반드시 독일공군의 주력 전투기 자리를 차지하고야 말겠다는 강철과 같은 의지를 보이며 휘하의 연구진들을 독려했다. 사실 이무렵 독일공군이 훗날 Bf 109가 몇 년뒤 구식이 되 버릴 경우를 대비해서 보다 더 뛰어난 성능의 전투기의 개발을 은밀하게 추진할 것이라는 비공식적인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하인켈사로서는 일말의 희망을 걸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소문이었기 때문에 만일 독자적으로 전투기의 개발을 추진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독일공군측에서 개발을 중단하라는 명령이 떨어질 수도 있었으므로, 새로운 전투기의 개발은 하인켈사내에서는 절대적인 대외비로서 은밀하게 추진 되었다.
[ 또다시 Bf 109에게 도전하게 된 He 100의 원형 1번기 ]
또다시 새로운 전투기의 설계를 맡게된 하인켈사의 수석 설계사 발터 귄터는 He 112의 설계를 발전시키는 것 보다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전투기를 개발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는 He 112의 실패원인을 교훈삼아 이번에 제작하는 전투기는 제작공정이 최대한 간단하면서도 고속성능이 탁월한 기체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독일공군의 마음을 끌기 위해서는 Bf 109를 확실히 넘어서는 성능이었기 때문에 발터 귄터는 내심 이때까지 그어떤 기체도 넘어서지 못했던 시속 700km의 최고속도 기록을 넘어서는 초고속 전투기를 제작하여 독일공군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했다.
제작공정의 단순화를 위해서 전체 부품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우선 He 112에 사용된 유선형의 동체와 타원형의 날개를 포기하고 최대한 직선형으로 설계를 변경했다. 특히 기동성을 포기하면서 주익의 길이를 짧고 직선형으로 변형하여 많은 수의 부품을 줄일 수 있었으며 제작 시간도 짧아졌다. 이에 따라 He 112에서는 2885개의 부품과 26864개의 나사가 필요했었지만, 새로운 기체에는 969개의 부품과 11543개의 나사가 사용되도록 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고속성능을 얻어야 했으므로, 최대한 공기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서 조종석도 돌출된 부분이 없이 동체와 딱 맞도록 설계되었으며 Bf 109에 사용되던 수평미익의 지지대와 같이 공기저항을 유발할 수 있는 것들은 사용하지 않았고, 꼬리 바퀴도 완전히 동체속으로 인입되도록 했다. 주익의 길이도 축소되어 비교적 짧은 편이었던 Bf 109보다도 더 짧게 설계되었다. 이것은 이 새로운 전투기의 설계개념이 고고도 작전이나 기동성보다는 오로지 빠른 속도를 추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서 고속성능에 필요한 엔진의 출력을 최대한으로 늘리고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 그 어떤 전투기에서도 시도된적이 없었던 새로운 엔진 냉각방식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것은 냉각수를 최대한 기체표면 전체로 분산시키는 방법으로 순환시켜 냉각수의 온도를 최대한 낮추는 것이었다. 이 냉각방식에 따르면 고온의 엔진에서 온도가 올라간 냉각수가 동체표면으로 순환하다가 주익의 앞전을 따라 멀리 돌아서 다시 엔진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으로서 냉각수 파이프가 공기에 노출되는 면적이 증가되어 냉각 효율을 매우 높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며 저항을 유발하는 공기흡입구도 없어지는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지상활주시에는 주익으로 냉각수를 돌릴 필요가 없었으므로 작은 가동식 공기흡입구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어떻게 보면 모험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냉각계통이 복잡해지고 냉각수를 순환시키기 위해서 소형 모터가 22개나 필요했다. 게다가 냉각수가 주익까지 순환하다보니 냉각계통의 면적이 넓어지게되어 전투중에 냉각계통이 피탄될 확률이 높아질 수 있는 커다란 약점이 있었다. 단 한발의 기관총탄이라도 냉각계통에 손상을 입히면 냉각수가 유출되기 때문에 곧 엔진이 과열되어 전투기를 포기할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을 선도하던 발터 귄터가 1937년 3월 25일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불길한 사건이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그의 동생 지크프리트 귄터에게 넘겨지게 되었고 그는 최대한 빨리 이 전투기를 마무리하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이 새로운 전투기의 최종적인 윤곽이 드러났다. 이 기체의 주익은 수평으로 뻗다가 약간 위쪽으로 굽어지는 형태였으며 (마치 현대의 F-4 팬텀의 주익을 연상시키는 형태..), 주강창작치는 안쪽으로 접히도록 설계되어 완전히 펼쳐졌을 때 폭이 넓었기 때문에 지상 활주시 안정성이 높았다. 조종석은 He 112B의 돌출형 캐노피와는 전혀 달리 동체와 연장선상으로 설계되어 속도를 높이는 대신 시야는 불량해졌지만 Bf 109보다는 약간 시야가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1937년 10월, 원형기의 제작이 끝나자 하인켈사는 독일공군에 원형기를 테스트해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실 이기체는 He 113으로 명명될뻔했으나 이미 실패한 He 112의 개량형으로 비춰질 우려가 있다는 사장 하인켈의 지적에 따라서 서류 수정작업을 거쳐 He 100으로 명명된후 독일공군에 제출되었다. 이 계획은 당시 독일공군 항공기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던 에른스트 우데트가 하인켈사에 기회를 주는 식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원형기 테스트 과정에서는 언론에 He 112U (U는 Udet에서 따옴)으로 알려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1938년 1월부터 독일공군 주관으로 시행된 원형기의 테스트 과정에서 이 기체는 몇가지 문제점을 드러냈다. 우선 He 112에서부터 계속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비행시 수평 불안정성이 발생했으며, 주익의 익면하중이 높아서 착륙시에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에 시험비행 조종사들로부터 큰 불평을 샀다. 여기에 더해서 독일공군의 정비병들은 이 기체에 혁명적으로 채용된 표면냉각방식의 엔진 냉각장치가 야전에서 정비하기에 너무 복잡하고 엔진 카울링이 너무 꼭 맞게 제작되어 있어 엔진 정비시에 불편한 점이 많다는 지적을 했다.
[ 시험비행 도중 주기중인 원형 2번기 - He 100V2]
이런 불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원형기가 제작되었는데 이 기체는 1050 마력의 신형 DB601M 엔진을 장착하고 있었으며, 1938년 6월 5일의 테스트 비행에서 시속 635km라는 놀라운 속도를 기록했다. 이는 1937년 11월, 비슷한 엔진을 장착하고 있던 Bf 109V13 (훗날 Bf 109E로 발전하게되는 원형기)가 속도부문의 세계신기록을 수립할 당시의 기록인 시속 614km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기록은 당시 독일의 항공기술을 세계에 자랑하는데 여념이 없었던 각종 언론에 대서 특필되었지만, 테스트과정에서 냉각계통에 문제점이 발생했다는 보고서로 인해 독일공군측에서는 여전히 이 기체의 성능에 대해서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으며, 이 두 번째 원형기는 얼마뒤 사고로 손실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주익과 동체에 수정작업을 계속한 하인켈사는 원형기의 제작을 계속 추진했다. 이무렵 하인켈사의 특별 주문으로 He 100V3, V4에 시험적으로 장착된 DB601R이라는 강력한 엔진이 장착되어 속도 부문의 신기록을 계속 갱신했다. 이 엔진은 벤쯔사가 아직 실험단계로 추진하던 것으로 메틸알콜와 물의 혼합물을 주입하여 순간적으로 최대 1776마일까지 엔진 출력을 상승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물론, 이 엔진은 아직 과도기적인 것으로 수명이 짧고 정비와 운용에 어려움이 많아 아직 실용화되기에는 이른 것이었지만, He 100V4는 1939년 3월 30일에는 시속 746km라는 경이적인 속도를 기록했다.
(하인켈사가 끈질기게 도전해오자 이에 자극받은 BFW사도 오로지 속도 기록만을 의식한 Bf 109R을 개발했으며 이 기체는 시속 795km의 최고 속도를 기록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체는 Bf 109와는 전혀 다른 오로지 속도만을 위해 제작된 실험기로서 전투기로 사용될 수가 없는 기체였다. 이 기체는 훗날 Bf 209로 불리게 되었다. 하인켈사는 또다시 속도면에서 Bf 209를 넘어서는 기체를 개발하려고 했으나 독일공군측에서 주력 전투기의 제작사로 선정된 BFW사가 최고 속도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모양새가 좋다는 이유를 들어 하인켈사로 하여금 더 이상의 속도경쟁을 금지하도록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런 결과에 만족한 하인켈사는 이후 양산에 대비하여 정식으로 무장을 장착하는 He 100C 시리즈의 개발을 추진했다. 기체의 고정무장은 주익에 MGFF 20mm 기관포 2문과 엔진주위에 장착되는 4정의 MG 17 기관총을 장착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하지만 독일공군의 정식 전투기로 채용되리라는 하인켈사의 희망과는 달리 V1 ~ V10까지의 원형기들은 시험 비행과정에서 계속 발생하는 냉각계통의 트러블과 주강착장치의 오작동으로 골치를 썩고 있었으며, 결국 이로 인한 사고로 인해 V2, V3, V4, V6 원형기들이 파손되거나 손실 되었던 점으로 인해 기체 전체의 신뢰성이 아직 검증되지 못한 상태였다.
희망은 절망으로
하인켈사는 이 기체의 첫 번째 양산형을 He 100D-0형으로 명명하고 독일공군에 이 기체를 주력 전투기로 채택해 줄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이 D-0형은 조종석과 캐노피를 다시 디자인하여 조종사의 시야를 개선하도록 하고 방향 안정성을 위해서 수직 미익을 좀더 크게 디자인한 했으며, C형의 테스트과정에서 중무장으로 인한 과도한 중량 증가가 비행성능을 떨어뜨리는 점이 지적되어 무장은 엔진축의 20mm 기관포 1문과 기수의 MG 17 기관총 2정으로 축소되었다.
[ 시험 비행을 위해 날아오른 He 100D, 고속성능을 위해 철저하게 공기저항을 줄인 외형이 특징적이다. ]
하지만, 하인켈사의 희망과는 달리 아직 이 기체의 전반적인 성능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던 독일공군에서는 전혀 이 전투기의 발주를 요청해 오지 않았으며, 이에 실망한 하인켈사는 단지 3기의 기체만을 제작하고 생산을 중단했으며 발전형인 He 100D-1형의 생산을 추진하게 되었다.
He 100D-1형에서는 조종석을 좀더 개량하고 수평미익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약간 크게 설계했으며 그동안 가장 골치거리로 지적된 표면냉각방식의 냉각계통을 완전히 포기하기로 하고 가동식의 대형 공기흡입구를 가진 새로운 냉각장치를 장착했다. 이런 변화를 거친후 기체의 공기저항이 약간 증가되어 최고 속도는 시속 700km 미만으로 줄어 들었지만 비행안정성이 높아졌다. 무엇보다 고속성능에 더해서 항속거리가 약 1000km에 이르를 정도로 (Bf 109의 경우 약 600km) 장거리 비행이 가능했다.
Heinkel He 100D-1 |
엔진: 다이믈러 벤쯔 DB 601Aa (1175마력) 전폭: 9.41m 전장: 8.19m 전고: 3.60m 기체중량: 1810kg 최대중량: 2500kg 최대속도: 670km/h 최대고도: 36090피트 (11000m) 항속거리: 1050km 무장: MG17 7.92mm 기관총 2정 (기수) + MG FF 20mm 기관포 1문 (엔진축) |
하지만 이 전투기가 생산되기 시작할 무렵에는 이미 서유럽에서 독일의 본격적인 군사행동이 시작되고 있었으며 야전부대에서는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신예 전투기의 수요량이 크게 증가했다. 게다가 BFW사도 세계최고 수준의 전투기인 Bf 109E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전시체제로 돌입한 독일공군 사령부는 이미 스페인 내전이후 야전에서 성능이 입증된 Bf 109의 생산량을 대폭으로 늘리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더욱이 Bf 109E는 참가하는 전투마다 최고의 성능을 과시하며 적국의 항공기들을 일방적으로 격추시키고 있었고, 독일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은 모두들 최고의 전투기인 Bf 109E에 탑승하는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런 정황으로 인해 독일공군은 오로지 Bf 109E에게만 찬사를 보냈으며, He 100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이 기체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또다시 발주를 받는데 실패한 것이다.
[ 정비중인 He 100D-1, 엔진 카울링이 지나치게 꼭 맞도록 설계되어 있어 정비사들이 엔진 정비를 위해 카울링의 해체나 조립을 시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
이제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어졌다. 포기를 모르던 하인켈사도 그들이 승부에서 졌으며, 이제는 전투기 개발 사업에서 손을 떼어야 할 시기가 왔음을 인정해야 했던 것이다.
뒷이야기
결국 제대로 날아보기도 전에 생산이 중단되는 불운을 맞이했지만, He 100D는 몇가지 흥미로운 뒷이야기를 남기게 된다.
[ He 100D-1의 컬러사진, 마치 실전배치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연합군을 기만하기 위해 촬영된 사진이다. ]
첫 번째는 독일공군이 적국 (특히 영국)에 대해서 자국 공군력을 과대하게 보이고 혼선을 유발시키려는 목적의 거짓 정보를 만드는데 사용된 것이다. 실제로 괴펠스가 이끄는 독일 선전성에서는 이 새로운 전투기가 야전부대에서 배치되었으며 대단한 성능을 가지고 있는 비밀 무기인 것처럼 과대선전을 했으며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리기 시작했다.
따라서 불과 15기가 생산된 He 100D에는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부대마크가 그려 넣어졌으며 마치 야전에서 작전중인 것처럼 보이는 사진이 촬영되었다. 물론 촬영이 끝나면 부대마크를 지우고 다른 마크를 다시 그려넣은후 다시 촬영했다고 한다.
독일공군의 선전용 잡지였던 '데어 아들러 (Der Adler)'에서는 이런 사진을 대대적으로 싣고는 이 전투기의 명칭은 He 113 (이것도 기만용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며 덴마크와 노르웨이 작전에서 실제로 전투에 투입되어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심지어는 He 100D의 야간 비행 훈련 장면을 촬영하여 이 전투기가 야간 전투기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내용의 허위 정보를 유포하기도 했다.
[ 야간 출격 장면을 담은 사진, Der Adler지에 실린 사진으로 이 역시 기만용의 연출된 장면이다. 워낙 그럴 듯해서 훗날 전쟁이 끝난후에 발행된 2차대전 관련 서적중에는 이 사진을 실제 독일공군의 야간출격 장면으로 잘못 기술한 경우가 많다. ]
당연하게도 이런 정보들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영국공군측에서는 이런 내용의 정보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장래에 자국에 큰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이 비밀 전투기의 실체를 알아내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특히 영국공군이 촉각을 기울인 부분은 이 전투기의 항속거리가 무려 1000km나 된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영국본토의 거의 절반이상이 행동반경에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항속거리는 사실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영국 첩보부는 이 전투기의 식별표까지 제작하여 영국공군 전투기부대에 배포했다고 하며, 훗날의 '영국본토 항공전 (Battle of Britain)'에서 일부 조종사들이 He 113으로 보이는 적기를 격추했다고 보고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He 100은 전혀 실제 전투에 참가하고 있지 않았다.
[ 연합군을 기만하기 위해 가짜 부대마크를 도색하고 실전 배치된 것처럼 촬영된 사진 ]
두 번째로는 외국으로 팔려나간 경우이다. 1930년대말 어느정도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소련이 신예 전투기를 개발함에 있어서 He 100 원형기들의 신기술에 관심을 보이게 되면서 원형기중 6기 (V1, V2, V4, V5, V6, V7)를 구입했다. 이 기체들은 소련으로 넘겨진후 소련 기술자들에 의해서 평가받았는데 그들은 획기적인 표면냉각방식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의 기술자들도 이 냉각방식은 실용화 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전투손상시 쉽게 손상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고, 결국 소련에서도 이 냉각방식은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일설에 의하면 소련은 이 원형기들의 공기역학적인 측면을 우수하게 평가하고 디자인을 모방했다고 하며 Lagg-3와 같은 신예 전투기의 설계에 적용했다고 한다.
독일과의 동맹관계였던 일본도 He 100D-0 전투기 3기를 구입했다고 하는데, 이후 이 전투기의 성능에 큰 인상을 받아 대량생산을 위한 세부계획까지 세웠다가 취소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전투기의 시험비행 과정에서 이 기체에 장착된 DB601 엔진의 높은 출력과 신뢰성에 큰 인상을 받은 일본육군 항공대는 훗날 같은 엔진을 사용하는 Ki-61 히엔을 개발, 생산하게 된다.
[ 기만작전이 끝난후 He 100D-1은 모두 하인켈 본사로 반납되었다. ]
나머지 12기의 He 100D-1은 독일공군의 선전작업이 끝난후 모두 하인켈사로 돌려보내졌으며, 하인켈사 자체가 운영하는 '공장 방어 비행대'의 He 112 전투기들이 수출된후 그 자리를 메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이 비행대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연합군 전투기들은 He 100D-1과 교전했다는 기록은 없다.
◆ He 100D 일러스트 ◆
1940년초 독일공군의 선전용 잡지이던 '데어 아들러'에 실린 사진을 근거로 작성된 일러스트, 마치 실전부대에 배치된 듯한 도색을 하고 있지만 이는 거짓 정보로 적국을 기만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달형상의 부대마크도 실제로는 사용된 적이 없는 가상의 전투비행대 마크이다. |
역시 인위적인 기만용 도색을 하고 있는 He 100D-1, 이 기체의 그럴 듯한 부대마킹도 조작된 것이다. |
마치면서
사실 He 100D의 경우 불과 3기의 He 100D-0와 12기의 He 100D-1이 생산되었을 정도로 소량만이 생산된채 더 이상의 개발이 중단되었고 실전을 경험한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2차대전의 전투기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He 112와 He 100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Bf 109가 독일공군의 주력전투기로 자리잡아 가는 과정에도 큰 도전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었으며, 그 그림자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다른 항공기 제작사들의 기체들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게 된다.
[ 미국의 한 항공박물관에 전시된 He 100D-1, 하지만 이 것은 실물이 아니라 모형이라고 한다. ]
사실 He 100D는 그 수치상의 성능으로는 당대 최고의 스피드를 가지고 있었으며, 만일 이 기체의 개발이 차라리 조금더 늦게 추진되었다면 Fw 190의 강력한 경쟁상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을 표현하는 전문가도 있다. 하지만 그 이유야 어떻든 간에 He 100도 역사속의 패자에 불과하며 이런식의 만일 ~ 했다면...의 이야기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역시 세상일이란 모두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며, 어느정도의 실력과 어느정도의 행운이 함께 따라주어야 한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군사무기.비행기.전차.개인화기.항모.전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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