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29   스크랩 : 0   날짜 : 2005.10.27 22:18































































































































위 사진은 갤러리 동호 회원님들께서 찍으신 사진과
또 카페 회원님들에 사진과
또 저에 사진과 함께 편집 하여 올려 드립니다
끝까지 보아 주시는 님들께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출처 : 닥터상떼 |글쓴이 : 닥터상떼 [원문보기]
 
[김영택의 펜화로 본 한국] 청풍문화재단지(41)
풍류가 흐르는 청풍팔경(淸風八景)

충북 제천시 청풍면(淸風面)은 삼국시대에는 사열이현(沙熱伊縣)이라 불렸으나 신라 경덕왕 때 청풍현이 되고, 조선 세조 때 군으로 바뀌었다가 현종 초(1660)에 명성황후의 관향이라고 하여 도호부로 승격이 되기도 합니다. 살기 좋은 고장으로 손꼽아 주던 청풍은 충주댐 건설로 수몰이 됩니다. 청풍에 살던 사람은 이곳저곳으로 떠났으나 건축 문화재들은 망월산성 기슭으로 집단이주하여 청풍문화재단지가 됩니다. 보물 2점, 지방 유형문화재 9점 등 많은 문화재가 있고 TV사극 촬영장, 관광선 나루터 등 여러 볼거리가 있어 여름 가족 답사처로 안성맞춤입니다. 특히 호수를 따라가는 길은 배를 타고 가든 차를 타고 가든 모두 환상적입니다.

▲ 팔영루

▲ SBS 촬영장

청풍문화재단지 입구의 팔영루(八詠樓)는 청풍부의 관문입니다. 민치상 부사가 청풍팔경을 노래한 팔영시가 걸려있어 팔영루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참 멋있는 이름입니다. 문 높이가 낮아서 키가 큰 사람이 아니어도 머리에 신경이 쓰입니다. 처음 지은 시기는 모르고 숙종 28년(1702)에 중건하였고, 고종 7년(1870)에 중수하였습니다. 높이 2.2m의 기단 위에 전면 3칸, 측면 2칸의 다락집을 세웠습니다. 출입구 좌우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파수꾼 2명이 있어 어린이들의 촬영 동무가 되어 줍니다.

청풍부의 관문 팔영루

▲ 연자방아
팔영루를 지나 낮은 언덕을 오르면 가옥 4채가 나란히 늘어서 있고 그 앞에서 연자방아가 손님을 맞이합니다. 집들은 본래 있던 마을의 이름을 따서 지산리 고가, 후산리 고가, 도하리 고가, 황석리 고가라 부르는데 집의 구조가 모두 다르니 차근차근 돌아보면서 비교해보세요. 실제 사람이 살던 집으로 농기구와 살림도구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옛 생활모습을 보여줍니다. 자녀와 함께 가시면 도구들의 용도와 이름을 가르쳐주세요. 훌륭하게 설명을 해주면 자녀들이 부모를 존경스럽게 봅니다. 그러니 잘 모르시면 공부를 하세요. 서울 사시는 분은 서대문 쪽의 농업박물관을 가시면 해답이 나옵니다.

문패까지 그대로 달려있고 마당 화단에는 꽃이 한창이며 장독대에는 독이 가지런한데 사람만 보이질 않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니 제비도 들지 않는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제비는 사람과 친근한 동물로 보호를 받으려고 집안에 둥지를 틀거든요.

보물 546호 석조여래입상

가옥 다음에는 보물 제546호인 석조여래입상을 만나게 됩니다. 청풍면 읍리 대광사 입구에 있던 높이 3.41m의 큰 석불로 얼굴이 통통하여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통일신라 말기(10세기경)의 불상으로 이마에는 수정이나 보석을 박았던 흔적이 뚜렷합니다. 입상 앞에 둥근 소원돌이 있는데 나이만큼 남자는 오른쪽으로, 여자는 왼쪽으로 돌리면 아들을 갖게 된답니다. 딸을 원할 때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아무도 모른답니다.

▲ 금남루
석불 보호각을 지나면 관청 영역입니다. 금남루(錦南樓)는 청풍부 관아의 외삼문으로 2층 누각 형태입니다. 2층 누대는 밖을 감시하는 기능을 하고, 아래층 가운데 문은 부사 전용이며 양쪽 문은 평민이 출입하였답니다. 관아의 문을 누각으로 짓는 것은 관의 위엄을 세우는 역할도 합니다. 순조 25년(1825)에 세운 금남루는 이전을 하면서 양쪽의 담장이 없어져 정자처럼 쓸쓸해 보입니다.

금남루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청풍부 동헌(東軒)입니다. 부사가 떡하니 버티고 앉아 “네 이놈, 똑바로 말하렸다”하고 호통을 치던 건물입니다. 지금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부사가 정장을 차려입고 폼나게 앉아 있습니다. 숙종 7년(1681)에 처음 건립한 건물로 금병헌(錦屛軒)이라 하는데 내부에는 청풍관(淸風館)이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금병헌 오른쪽의 응청각(凝淸閣)은 토석으로 아래층 벽을 친 2층 누각입니다. 2층은 출장 온 관리들이 객사로 사용하던 건물로 명종 초 이황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망월산성 오르면 호수가 한눈에

▲ 한벽루

그 다음 건물이 청풍문화재단지의 하이라이트인 한벽루(寒碧樓)입니다. 보물 제528호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큰 누각인데 우측에 계단식 익랑을 달아서 화려합니다. 보기 드문 장치로 계단과 대기실 역할을 겸한 것입니다. 고려 충숙왕 4년(1317)에 군으로 승격한 것을 기념하여 세웠기 때문에 한껏 멋을 부렸나 봅니다. 건둥건둥 지나치지 말고 꼭 누마루에 올라 옛 사람의 풍류를 떠올려보세요. 화려한 천장 단청 아래 누대에서 청풍호반을 바라보면 시 한 수 읊고 싶은 충동이 생깁니다. 한벽루에 앉아 162m까지 뿜어 올리는 청풍호반의 분수쇼를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한벽루 앞의 잔디광장에는 지석묘, 문인석, 선정비들이 늘어서 있고 나루터 쪽으로 유물 전시관이 있어 아이들의 현장교육에 안성맞춤입니다. 단지 서북쪽 언덕에 둘레 495m의 망월산성(望月山城)과 팔각정자가 있습니다. 삼국시대에 축성된 성으로 문화재단지와 SBS드라마 촬영장, 청풍호수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사극 ‘대망’과 ‘천년지애’를 찍었던 촬영장에는 음식점도 있어 답사로 출출해진 속을 채울 수도 있습니다.

청풍문화재단지에 가실 때 집에 승용차를 두고 가신 분은 충주호수를 운행하는 관광선을 이용하여 단양팔경을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청풍나루에서 배를 타고 장회나루에 내리면 구담봉, 옥순봉,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 사인암을 돌아볼 수 있고, 단양나루에서는 도담삼봉과 고수동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짙푸른 산이 섬처럼 스쳐 지나가는 청풍호반의 뱃길 여행은 그것만으로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됩니다.

 

 

[김영택의 펜화로 본 한국] 봉화 닭실마을 청암정(42)
중종 때 충신인 충재 선생이 지은 정자로 특이한 모양
퇴계 이황 글씨 등 보물도 보관

조선 중종 때 경회루에서 어전연회가 끝난 뒤 근사록(近思錄)이란 책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보고를 받은 중종은 “그 책은 권벌이 보던 책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충재 권벌이 소맷자락에 넣고 다니며 애독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고려 공민왕 때 간행된 근사록은 성리학의 중요한 내용만을 골라서 편찬한 독본입니다.

▲ 청암정

책 읽기 좋아하고 성격이 강직하였던 충재 선생의 옛집이 경북 봉화군 유곡리 닭실마을에 있습니다. 고택에는 충재 선생이 아끼던 근사록이 보물 제262호로, 충재일기 7책이 보물 제261호로, 중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책들이 보물 제896호로, 교서 분재기(分財記) 호적단자 등 고문서가 보물 제901호로, 충재와 퇴계 등의 서첩과 글씨가 보물 제902호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한 집에 보물이 5점이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충재 선생의 책에 대한 애정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6·25전쟁 때 많은 책과 문서를 독에 담아 땅속에 묻어 분실을 막은 후손의 지극한 정성이 있었기에 빛을 본 것이지요.

‘丁’자 모양으로 멋ㆍ실용 겸비

충재고택에 청암정(靑巖亭)이란 빼어난 정자가 있습니다. 충재 선생이 1526년에 지은 정자입니다. 펜화를 그리며 여러 정자를 보았으나 이처럼 개성이 넘치는 정자는 기억에 없습니다. 거북 모양의 큰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주위의 땅을 파서 둑을 쌓아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거북이가 정자를 지고 물속에서 노는 모양입니다. 둑에는 느티나무 향나무 단풍나무 등을 돌려 심어 독립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뛰어난 조원계획입니다. 충재 선생의 미적 감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집터를 잡을 때 거북바위를 보고 잡지 않았을까요?

▲ 청암정 다리
6칸 넓이의 누대에 2칸 넓이의 긴 마루방 건물을 붙여서 ‘丁’자 모양의 특이한 정자가 되었습니다. 마루방은 양측에 퇴를 내고 3면에 계자난간을 둘러 멋과 실용을 겸하였습니다. 누대는 팔작지붕 건물로 3면이 터졌고 마루방 건물은 맞배지붕 건물로, 사방에 10짝의 문을 달았습니다. 누대와 마루방 사이에는 두꺼운 종이를 양면에 바른 맹장지문을 들어올리게 하여 넓게 쓸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외벽에는 나무판을 댄 골판문을 달아 추위를 막게 하였고요.

이런 구조의 마루방은 온돌이 제격인데 왜 마루방으로 만들었을까요? 처음에는 온돌을 들였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승이 지나가다가 정자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여기는 연기가 날 자리가 아니다. 거북이 등에 불을 때면 되겠느냐”고 충고하여 마루방으로 바꾸었답니다. 온돌이 없으니 추운 날에는 청암정 앞에 지은 3칸짜리 서재인 충재에서 지냈을 것입니다.

청암정으로 오르는 돌다리도 독특하고 멋진 다리입니다. 연못 속에 작은 교각을 세우고 그 위에 긴 장대석을 놓아 만든 튼튼한 돌다리는 후손을 위한 배려였을 것입니다. 정자 앞의 계단도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것입니다. 충재 선생이 얼마나 공을 들여 청암정을 지었는지 계단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청암정 연못 바닥이 주변의 논보다 높아서 물이 쉽게 빠지기 때문에 항상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물을 끌어들였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논에 물을 대고 나서야 차례가 오기 때문에 연못에 물이 제대로 찬 것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이 없으니 연꽃도 보이지 않습니다.

▲ 석천정사

그림을 그리면서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팔작지붕의 처마 선(線)이 직선이 아니겠습니까? 후손에게 물어보니 여러 해 전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그렇게 되었답니다. 공사를 맡은 사람은 물론 감독관청에까지 항의를 했는데도 그냥 통과가 되더랍니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팔작지붕의 처마선이 곡선인 것은 삼척동자도 알 만한 기초상식인데 어찌 이리 몰상식하게 일을 합니까. 최고의 문화재를 최악의 인간이 흠집을 낸 것입니다. 이런 나쁜 인간을 ‘공공의 적’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악의 축’이라고 할까요. 펜화에는 처마를 약간 곡선으로 수정하여 그렸는데도 어색해보입니다. 군청에 물어보니 내년에 지붕을 제대로 고쳐놓을 계획이 잡혀있답니다. “공사를 하는 김에 우물을 파고 펌프를 달아 연못에 항상 물이 차게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가능하다”고 하는군요. 기대하십시오. 내년부터는 찰랑거리는 물에 연꽃이 핀 제대로 된 청암정을 보실 수 있답니다.

큰아들 청암이 지은 석천정사도

▲ 석천정사 앞 계곡
청암정은 50여명이 올라도 여유가 있을 만큼 넓습니다. 많은 학자들과 교유하기를 즐긴 충재 선생의 마음 크기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청암정에는 퇴계 이황, 미수 허목 등의 명필 글씨가 걸려있습니다.

청암정을 보신 뒤 마을 앞의 개울을 건너 소나무 길을 따라 서쪽으로 돌아가면 맑은 물이 흐르는 수려한 계곡에 석천정사(石泉精舍)를 만나게 됩니다. 충재의 큰아들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가 1535년에 지은 정자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에는 2칸짜리 익랑이 달려있습니다. 정자 뒤 바위틈에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샘이 있어 석천정사가 되었나봅니다. 계곡 쪽 골판문을 전부 열면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과 울창한 소나무 숲의 시원한 풍경이 마루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석천정사 앞 계곡물에 발을 식히며 마음의 끈을 놓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보세요. 아이들이 딸린 가족이라면 청암정과 석천정사를 본 후 계곡에서 도시락을 먹고 물놀이도 할 수 있어 여름철 답사코스로 안성맞춤이랍니다.

 

 

 

[김영택의 펜화로 본 한국] 초간정과 예천 권씨 고택(43)
최초 백과사전인 ‘운부군옥’을 편찬한 초간 선생의 지혜에 세월의 윤기가 덧칠

조선시대에 백과사전이 있었을까요? 있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이라는 책으로 선조 22년(1589)에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1534~1591)가 편찬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 문학, 예술, 풍속, 인물에 산 이름, 꽃 이름, 동물 이름 등을 열거한 것입니다. 한자의 운(韻) 107자로 순서를 삼았기에 ‘운부군옥’이라 하였지요.

삼국사기, 계원필경 등 한국서적 176종에 사기, 한서 등 중국서적 15종을 더한 총 191종의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총 20권 20책을 만든 것입니다. 출판사도 아닌 개인이 영리 목적 없이 학자적 열정으로 이룩한 대단한 성과물로 보물 제878호입니다.

초간 선생이 남긴 초간일기(草澗日記)도 보물 제879호입니다. 선조 13년(1580)에서 선조 24년(1591)까지의 일상사와 국가의 크고 작은 일에 대한 기록이 담겨있습니다. 많은 자료들이 불에 타고 없어진 임진왜란 이전의 역사적 자료를 보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초간 선생의 아들인 죽소(竹所) 권별(權鼈·1589~1671)도 국내 최초의 인물사전인 해동잡록(海東雜錄)과 죽소일기(竹所日記)를 남겼습니다. 부전자전이라고 대단한 아버지에 대단한 아들입니다.

▲ 종택 안채
학문이 뛰어난 학자들이 높은 안목으로 훌륭한 정자를 남긴 경우가 많습니다. 초간 선생이 지은 초간정(草澗亭)이 무척 아름답다고 하기에 벼르고 별러 취재를 가보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보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택은 보수가 끝날 무렵이라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었으나 초간정은 비계를 세우고 장막까지 둘러쳐놓아 취재가 도저히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래도 취재대상을 바꾸기는 싫더군요. 초간정 주변의 풍광이 펜화가를 매혹시켰거든요.

초간 선생의 종손이 제공한 겨울사진 바탕에 새로 찍은 자료사진을 이용하여 여름 풍경을 담은 펜화를 만들었습니다. 힘들었던 것은 오전 11시경에 찍은 겨울사진의 명암을 오후 4~5시경의 명암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물 위의 기암괴석이 제대로 표현되어 초간정의 멋이 120% 살아났으니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펜화의 장점이기도 하고요.

초간정은 소백산에서 흘러내리는 금곡천이 기암괴석 사이에서 깊은 웅덩이를 이루는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정자 앞 계곡은 나무 그늘로 어둑한 것이 심산유곡에 온 듯합니다. 이만한 정자터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에 반했기에 집에서 5리나 떨어진 곳에 초옥을 마련하고 학문의 장소로 삼았던 게지요.

선조 15년(1582)에 초가로 짓고 ‘초간정사’라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중건합니다. 그러나 병자호란에 다시 불에 탑니다. 지금의 건물은 1870년에 다시 지은 것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마루 구석에 2칸짜리 온돌방을 들였습니다. 전면은 개방하였으나 좌우측에는 나무판자를 끼워 넣은 골판문을 달았습니다. 온돌방에도 골판문을 달았습니다.

▲ 초간정 여름
초간정은 밖에서 바라보아도 아름답지만 마루에 앉아 계곡을 내려다보는 풍류도 일품입니다.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이지 싶습니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은 집안에 연못을 파고 인공 섬을 만든 위에 예쁜 다리를 놓고 기화요초를 심어 인공미가 넘치는 정원을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인위적인 아름다움을 체질적으로 싫어합니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즐기는 것이 최상의 삶이 아닙니까?

요사이 일본식 건축방식을 모방해놓고는 선(禪)의 일본식 발음인 ‘젠’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 놓고는 한술 더 떠서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현대화하였다고 우기는 경우도 있으니 사기도 그런 사기가 따로 없지요.

초간 선생의 고택을 ‘예천 권씨 종택’이라고 부릅니다. 초간 선생의 할아버지가 선조 22년(1589)에 지은 집입니다. 사랑채가 걸작인데 독립된 형태를 취하고 있어 ‘별당’이라고도 부릅니다. 왼쪽에 온돌방 2개를 붙여놓고 오른쪽으로 6칸 넓이의 마루를 두었습니다. ‘육간대청’이란 바로 이런 넓이의 마루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루와 방 주위에 쪽마루를 덧대고 난간을 둘러 다락집 모양이 되었습니다. 기단이 높직하여 누대처럼 멋이 있습니다. 대청 앞은 전부 개방하였고 옆면과 뒷면은 골판문을 달았습니다. 천장을 올려다보면 상당히 공을 들여 꾸민 모양이 눈에 들어옵니다. 조선 초기의 우수한 건물로 보존 상태가 좋아 보물 제45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초간정 앞 계곡

종택은 보수공사가 끝마무리 단계였습니다. 새 목재로 갈아 끼운 기둥과 서까래의 밝은 나무 색이 오랜 세월에 퇴색한 목재와 뒤섞여 눈에 거슬려 보였습니다. 그런데 기술자가 칠을 하니 감쪽같이 고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황토와 먹물에 철을 산화시켜 만든 석간주를 아크릴 에멀션에 탄 도료인데 나무를 보호하는 기능도 한답니다.

‘ㅁ’자 안채도 중요민속자료 제201호인데 초간 선생의 13대 종손 내외가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집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생명력을 잃고 쉬 망가진다는데, 고택에는 사람 냄새가 배어있고 윤기가 돌아보입니다. 종부의 음식 솜씨가 좋아서 육류를 못 먹는 펜화가에 맞추어 채식 국수를 처음 만들었다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권씨 종택이나 초간정만으로는 답사 일정이 남는다는 분은 초간정에서 가까운 용문사를 찾아보세요. 용문사는 신라 때 창건한 고찰입니다. 용문사 대장전의 목각탱과 윤장대(輪藏臺)만 보셔도 답사의 내용이 알차게 됩니다. 경전을 넣은 8각 구조물인 윤장대는 국내 단 하나뿐인 희귀한 문화재로, 돌리는 것만으로 큰 공덕이 있다는 예불도구입니다. 솜씨좋은 소목장이 정성을 다해 만든 윤장대의 8면에는 아름다운 꽃살장식이 베풀어진 문이 있어 8장의 그림엽서를 보는 듯합니다. 대장전은 보물 제145호이며, 윤장대는 보물 제684호이고, 목각탱은 보물 제989호입니다.

 

 

 

[김영택의 펜화로 본 한국] 양주 회암사지(44)
영욕(榮辱)으로 점철된 불교역사 간직한 조선 최대의 절
발굴 작업만 12년…즐비한 초석, 화려한 청기와 등 궁궐터를 보는 듯

조선시대에 제일 큰 절은 어디였을까요? 불보사찰인 양산 통도사였을까요, 아니면 법보사찰인 합천 해인사일까요. 그도 아니면 승보사찰인 순천 송광사였을까요? 전부 아닙니다. 정답은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檜岩寺)입니다.

▲ 무학대사 부도, 석등

옛 사진만 보고 찾아간 회암사 터는 너무 크고 웅장하여 벌어진 입을 닫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기에 양주시에 부탁을 하여 항공사진을 빌렸습니다. 1997년 시굴작업부터 2008년 완료될 9차 발굴 작업까지 총 12년이 걸린다니 경주 황룡사지와 비슷한 국내 최장기 발굴 작업입니다. 본 절의 면적만 1만여평이 넘는 방대한 유적입니다.

조선 태조, 왕위 물러난 뒤 거처로

큰 장대석을 높직하게 쌓은 기단이 9줄이나 늘어선 모습과 무수하게 박혀있는 주춧돌은 절터라기보다 왕궁 터를 보는 듯합니다. 계단 소맷돌도 큼직큼직하여 보는 이를 압도하는데 태극무늬가 조각되어 높은 품격을 보여줍니다. 관솔불을 올려놓아 야간 조명등 역할을 하던 정료대(庭燎臺)도 8개나 보입니다. 큰 절에서도 한 쌍 이상은 본 적이 없습니다.

주불전인 보광전 뒤에는 많은 건물이 서있던 자리에 초석이 즐비합니다. 조선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 거처로 이용하였다니 별궁으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토수와 잡상, 청기와에 직경 30㎝의 청동풍탁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궁궐 수준의 화려한 건물이 있었을 것입니다.

불교 탄압 속에도 왕실 전용사찰로

▲ 승탑
이렇게 웅장하였던 조선 최대의 중심 사찰이 어떻게 망하였을까요? 회암사는 인도의 고승 지공(指空)대사와 그 제자 나옹(懶翁)대사, 손제자 무학(無學)대사로 이어지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한국 불교의 중심 법맥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공 스님은 인도 마갈제국(Magadha) 만왕(滿王)의 셋째 아들로, 아란타사 불교대학을 졸업한 후 충숙왕 13년(1326) 고려에 입국합니다. 충숙왕의 환대를 받으며 2년 반 동안 전국을 돌며 법회를 엽니다. 원나라로 간 스님은 공민왕 12년(1363)에 입적하면서 자기의 유골을 고려로 보낼 것을 유언으로 남깁니다. 공민왕은 지공 스님의 제자 나옹 스님에게 회암사에 지공 스님의 부도를 세우게 합니다.

고려의 국사 자리에 오른 나옹 스님은 스승의 지시대로 회암사를 동방 제일 사찰로 중창합니다. 낙성식에 앞서 1376년 문수회(文殊會)가 열리자 전국의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려듭니다. 성리학을 내세우는 관료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나옹 스님을 지방으로 추방시킵니다. 병중이던 나옹 스님은 여행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을 합니다. 스님의 다비식에 여러 가지 이적이 일어나는 바람에 회암사는 나옹 스님을 추모하는 인파가 더욱 많아집니다. 불교를 탄압하려던 관료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된 것이지요.

고려가 망하고 억불승유 정책을 택한 조선왕조가 시작되지만 회암사는 무학 스님을 왕사로 모신 태조 이성계의 후원으로 더욱 번창합니다. 이후 극심한 불교 탄압 시기에도 회암사는 왕실 전용사찰로 그 지위가 유지됩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탄압을 견뎌온 회암사도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문정왕후 중창불사 후 기록도 없이 역사 속으로

명종의 섭정을 맡은 문정왕후는 1551년 보우(普雨) 스님을 선종판사(禪宗判事)로 임명하고 도첩제를 부활시켜 불교 중흥을 꾀합니다. 이렇게 15년간 불교를 지원하던 문정왕후가 1565년 봄 회암사 중창불사를 마친 후 세상을 떠납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보우를 제주도로 유배보냅니다. 제주목사 변협은 이유도 없이 보우를 죽입니다. 이후 큰스님을 잃은 회암사는 언제 어떻게 폐사가 되었다는 기록도 없이 역사 뒤로 사라집니다.

▲ 지공대사 부도, 석등, 비

회암사 좌측으로 난 길을 800m쯤 올라가면 순조 28년(1828)에 지은 또다른 회암사가 있습니다. 이 절 옆 언덕에 지공·나옹·무학 스님의 부도가 있습니다.

제일 아래에 태종 7년(1407)에 세운 무학 스님 부도가 있습니다. 2벌대의 높은 기단에 팔각 난간을 둘렀습니다. 고급시설입니다. 두 마리 용이 감싸고 있는 몸돌은 조각수법이 우수하여 용이 살아있는 듯합니다. 지붕돌은 목조건물을 본떠서 만들었습니다. 처마는 겹처마 형식으로 아래에 연꽃잎을 새겼습니다. 지붕 내림마루에 용두를 배치하고 보주 모양의 상륜부를 올렸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부도로 보물 제388호입니다.

사각석등은 한 쌍의 사자가 석등을 받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법주사와 영암사지의 쌍사자 석등은 사자가 일어서 있는 모습이나 회암사의 사자는 쪼그려 앉은 모양으로 앙증맞습니다. 머리 갈기와 꼬리털이 살아 있는 듯 보입니다. 보물 제389호입니다.

▲ 회암사지 항공사진
무학 스님 부도에서 6m쯤 위에 지공 스님 부도와 석등 부도비가 있고 그 위로 나옹 스님의 부도와 석등이 있습니다. 무학 스님의 부도에 비하여 문양이 없는 단순한 형태입니다. 나옹 스님의 부도비는 별도로 있었는데 1997년 보호각에 불이 나서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예서로 쓴 소중한 비석으로 보물 제387호인데 새로 만든 복제 비석을 보면 가슴이 쓰려옵니다. 절터 동북쪽 구석에 6m 높이의 길쭉한 탑이 있습니다. 부도라고 하였으나 근래 들어 승탑으로 고쳐 부르는 분이 늘었습니다.

회암사지 앞에 큰 레미콘 공장이 있어 분위기가 영 아닌데 양주시에서 땅을 사들였답니다. 유구들을 복원하고 기념관을 지어놓으면 훌륭한 답사처가 될 것입니다. 지금은 발굴 중이어서 출입이 불가능하여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셔야 하지만 그래도 가볼 만합니다.

 

 

 

[김영택의 펜화로 본 한국] 대흥사 무염지(45)
초의(草衣)선사 발자취 따라 마음을 씻는 곳
절묘한 굴곡으로 보는 위치에 따라 연못 모양 달라…
초의가 말년 보낸 일지암도 가까이에

▲ 무염지.

남녘 땅 해남에 대흥사(大興寺)라는 큰 절이 있습니다. 몇 차례 방문하면서도 절 마당에 있는 연못을 무심히 지나쳤으나 꼼꼼히 살펴보니 보기 드문 걸작이어서 펜화에 담았습니다. 땅은 네모지고 하늘은 둥글다는 이론에 따라 만든 특성이 없는 연못만 보다가 대흥사 무염지(無染池)를 보니 눈이 다 시원해지는 느낌입니다.

연못의 가장자리를 이리 돌아가고 저리 들어가는 절묘한 굴곡으로 만들어놓아 연못의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섬은 하나뿐인데 보는 위치에 따라 몇 개가 더 있는 듯 보입니다. 섬을 중심에 두지 않은 것은 구성의 원리를 이용한 중심점 이동 기법으로 변화와 생동감을 줍니다. 돌아가며 보면 연못의 모양이 다 달라 보입니다. ‘폭 20여?에 불과한 연못이 이렇게 커 보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오묘한 설계 때문입니다. 절에서는 마음 ‘심(心)’자 모양이라고 합니다. ‘경주 안압지를 본뜬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 금당천과 침계루.

▲ 대웅보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곳

무염지라는 이름도 참 멋있지요? 참선문구인 처염상정(處染常淨)에서 나온 것으로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한국 차(茶)의 중흥조로 손꼽히는 초의선사(草衣禪師)가 화재로 소실된 남원 지역의 건물을 중창하면서 만들었는데 후에 응송(應松)스님이 현재의 모양으로 고쳤답니다. ‘향로봉의 화기를 막는다’는 풍수의 비보입니다. 연못은 화재시 물탱크 역할도 하지요.

연못 안에 노랑어리연이 가득 피었습니다. 노랑어리연은 전날 꽃봉오리가 올라와 다음날 아침에 피었다가 한낮이면 지고마는 작은 꽃입니다. 그런데 예쁜 어리연도 너무 많으니 지저분해 보입니다. 안압지에 연꽃이 너무 번지지 못하도록 목곽에 심었다는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못에 연꽃이 가득하면 답답해 보이거든요. 오지자배기에 작은 수련을 심어 배치하면 품위가 살아날 것 같습니다.

▲ 대흥사 사랑나무.

▲ 천불전 천불.

연못에 바짝 붙여 길을 내는 바람에 분위기가 산만해졌습니다. 동다실 앞 도로로 올라가는 길은 가허루 앞으로 옮기고, 동다실 앞 도로에는 연못가로 낮은 축담을 쌓아주면 좋을 듯 싶습니다.

이왕 초의스님 말씀이 나왔으니 스님이 말년을 보낸 일지암(一枝庵)으로 먼저 가볼까요. 대흥사에서 700m쯤 위에 있는 일지암은 한국의 다성(茶聖)이라고 하는 초의선사(1786~1866)가 만년 40년 동안 다선일체(茶禪一體)를 행한 곳입니다. 다산 정약용, 완당 김정희 등 여러 석학들과 차와 학문을 주고받았던 스님은 차의 교과서가 된 동다송(東茶訟)과 다신전(茶神傳)을 지었습니다. 요즈음 ‘차인’이라고 자처하며 동다송을 모르면 간첩이 됩니다. 시, 서, 화에 능하여 소치 허백련에게 남종화를 가르치기도 합니다.

▲ 일지함 초의다합.

조선불교의 중심, 부도 50여기 즐비

화재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곳에 1979년 초당과 자우홍연사(紫芋紅蓮社)를 복원하였습니다. 옛 모습을 살리려고 여수 율촌공단 공사로 허물게 된 고가의 100년 묵은 춘양목을 썼습니다. 초의스님의 시와 편지, 소치의 몽연록 등을 참고하여 조자룡이 설계한 것입니다. 초당 옆 계곡에 연못을 만들고 장주석이 아닌 단주석 여러 개를 포개 쌓은 위에 올린 누대 건물은 참 멋이 있습니다. ‘자우홍연사’라는 현판이 걸린 누대에서 대둔산 계곡을 내려다보며 차를 마시는 정취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일지암 뒤 유천(乳泉)이란 샘물은 차맛을 특급으로 만든답니다. 일지암을 찾게 되면 주지스님께 인사드리고 차를 한잔 청해보세요. 못 얻어 마셨다고 펜화가에게 불평하지는 마세요. 그도 인연입니다.

‘대둔사(大芚寺)’라고도 부르던 대흥사는 임진왜란 이전에만 하여도 그저 그런 크기의 산골 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서산대사의 유발과 제자들이 대흥사로 옮겨오면서 대흥사는 조선불교의 중심사찰이 됩니다. 조선 승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큰 전공을 세운 스님은 은퇴 후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을 앞두고 남쪽 해남의 대둔사에 자신의 유발을 전하라고 유언을 남깁니다. 서산대사를 승군의 사령관으로만 알면 곤란합니다. 스님은 선(禪),교(敎) 양종판사를 지낸 조선 최고의 큰 스님으로 제자가 1000여명에 달했습니다.

대흥사 시대가 열리면서 스님의 제자들 가운데 13명의 대종사(大宗師)와 13명의 대강사(大講師)가 배출됩니다. 대흥사 부도전에 즐비하게 늘어선 50여기의 부도와 14기의 탑비들은 조선시대의 승보사찰(僧寶寺刹)인 대흥사에서 조선불교를 이끌던 큰 스님들의 증거입니다.

대흥사에는 여느 절에서 볼 수 없는 표충사(表忠祠)라는 사당이 있습니다. 절 안에 사당이 들어선 것은 서산대사가 큰 전공으로 높은 관직을 추증받았기 때문에 나라에서 세운 것입니다. 현종 10년(1669)에 건립되고, 정조 12년(1788)에 임금이 사액을 하고 친히 현판글씨를 써서 내립니다. 표충사에 보관하던 대사의 유품은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유물관에 들어가시면 탑산사 동종도 눈여겨보세요. 높이 79㎝에 불과한 작은 종이지만 잘 만든 것입니다. 종 고리에 용이 두 발을 든 모습은 세련된 조각으로 살아있는 듯 용맹해 보입니다. 신라 종 모양을 간직한 고려 종으로 보물 제88호입니다.

서산대사 전공 기린 사당도

대흥사는 금당천을 중심으로 침계루, 대웅보전, 응진전이 있는 북원과 천불전, 가허루, 표충사가 있는 남원으로 구획이 나누어집니다. 10년 전 남원에서 북원으로 내려가는 계단 옆에 서있는 느티나무 두 그루를 그리고 있는데 젊은 보살이 “저 나무 이름이 무엇인지 아세요?” 하고 묻더군요. “서산대사의 지팡이냐”고 하였더니 “사랑나무래요” 하고는 깔깔 웃었습니다. 두 나무의 뿌리가 얼키설키 되어있어 그렇게 부른답니다. 겁도 없이 절 마당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도 있네요.

대흥사를 찾아가실 때는 입구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 들어가세요. 십 리 가까운 길에 각종 나무들이 원시림처럼 터널을 이루어 장관입니다. 이것을 못 보면 소중한 추억거리 하나를 놓치는 것이 됩니다. 대흥사를 보고 나면 대흥사와 한 집안이라는 달마산 미황사를 찾아보세요. 달마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대웅보전의 자태가 무척 아름답고, 국내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부도전이 있어 미황사를 사랑하는 분들이 많답니다.

 

 

 

[김영택의 펜화로 본 한국] 연곡사 동부도(46)
화려한 상륜부의 극락조, 천년의 이끼 털고 날아오를 듯

▲ 연곡사 동부도

국내 부도 중 가장 잘 생긴 것을 고르라면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를 드는 분과 ‘구례 연곡사(燕谷寺) 동부도’를 손꼽는 분이 계십니다. 둘 다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부도로 쌍벽을 이룬다고 봅니다. 철감선사 부도는 대석과 몸돌, 지붕돌의 비례가 좋고 몸돌이 크고 수직적이어서 남성답습니다. 거기에 비해 동부도는 조각이 섬세하며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형태여서 여성적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둘 다 신라 때 만든 소중한 문화재로 철감선사 부도가 국보 제57호이고, 동부도는 국보 제53호입니다.

연곡사에는 동부도 외에도 국보 제54호인 북부도, 보물 제154호인 소요대사 부도가 있습니다. 동부도비와 현각선사 부도비도 보물 제153호, 보물 제152호이며 절 아래 마당에 있는 삼층석탑이 보물 제151호입니다. 큰 절이면서도 보물 한 점 없는 곳이 허다한데 국보가 2점, 보물이 4점이 있으니 연곡사는 ‘산골 박물관’인 셈이지요.

▲ 삼층석탑

▲ 현각선사 부도비

지리산 피아골 입구에 자리 잡은 연곡사는 유물이 말해주듯 무척 큰 절이었답니다. “한때는 화엄사가 연곡사의 말사였다”고 주장하는 스님도 계십니다만 믿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통일신라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인조 5년(1627)에 소요대사(逍遙大師)가 중창하였습니다. 구한 말 의병장 고광순이 연곡사를 본부로 하여 의병활동을 하다 패하는 바람에 절이 불타버립니다. 이후 6·25전쟁 때 다시 재난을 입습니다. 근래에 지은 여러 당우들이 있습니다만 넓은 빈터는 사라진 옛 영화를 말해줍니다.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와 함께 국내최고로 꼽아

연곡사 동부도는 세밀한 조각의 화려한 상륜부가 온전하게 남아 있어 전문가들을 흥분케 합니다. 하나로 만들어진 상륜부도 남아있는 경우가 드문데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만든 상륜부가 완전하게 남아있다는 것은 기적이지요. 다만 극락조의 머리는 모두 훼손이 되었습니다. 도굴꾼들이 부도의 사리기를 훔쳐가려고 부도를 쓰러뜨리는 등 사고로 상륜부의 부재들을 다시 얹을 때 순서가 바뀐 경우도 있었습니다. 펜화는 순서가 뒤바뀌었을 때 그렸기 때문에 현재의 모습과 다릅니다.

▲ 북부도

동부도는 어느 스님의 부도라는 기록이 없어 절의 동쪽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동부도로 부릅니다. 동부도는 팔각원당형으로 크게 나누어 지대석, 대석, 몸돌, 지붕돌 그리고 상륜부로 구분합니다. 사각 지대석 위에 놓인 하대석에는 8면마다 사자를 한 마리씩 조각하였습니다. 사자는 부도를 지키는 수호동물입니다만 장난꾸러기 같아서 놀기에 바빠 보입니다. 사자 아래에는 구름과 용이 어우러졌으니 부도가 천상의 세계, 즉 불국토라는 뜻입니다.

중대석에는 각 면마다 팔부신 중 한 분씩 조각하였습니다. 부도는 오랜 세월 거친 풍상을 겪으며 조각이 마모되고 이끼가 덮여 세밀한 조각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루종일 부도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으려니 해가 움직일 때마다 그림자가 변하며 조각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장의 손톱만한 발바닥에 발가락 다섯 개가 보이고 상대석의 가릉빈가는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줍니다. 천년 저편의 석공이 말을 걸어오는 듯 온몸을 스치는 전율에 휩싸였습니다.

서양의 사실적 조각에 비해 차원높은 정신세계 조각

많은 한국인이 ‘서양의 사실적 조각에 비해 우리의 조각이 빈약하고 사실적이지 못하다’고 낮추어 봅니다. 서양은 인간 중심입니다. 그래서 사람도 실물처럼 만들어 놓습니다. 자연과 우주를 중심으로 하는 우리는 사람을 조각하는 경우가 적었습니다. 왕릉의 문인석이나 무인석을 포함해 부처와 신장 등 도식적인 조각이 전부입니다. 인체를 사실적으로 만들 일이 없었던 것이지 재주가 없어서 만들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경복궁 영제교 좌우에서 금천을 지키는 4마리의 천록을 보시면 우리 선조들의 조각 능력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종교와 정신세계를 조각한 것입니다. 차원이 다르지요. 요즈음 간략화, 추상화되고 있는 세계 조각의 추세를 일찌감치 앞서간 것입니다.

▲ 동부도비

상대석의 두 겹 연잎은 정교하기 그지없습니다. 연잎 가운데의 국화 문양이 아름답습니다. 그 위의 몸돌 받침은 상다리 모양인데 그 사이에 가릉빈가가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고 있습니다. 불국토에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는 상징입니다. 팔각 몸돌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비가 2면, 사리기가 2면, 사천왕이 4면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큰스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겹처마지붕을 본뜬 것입니다. 서까래와 부연이 확실하고 추녀에 사래도 사실적입니다. 기왓골도 훌륭한데 추녀마루도 명확합니다. 풍탁을 달았던 구멍도 있습니다. 온전한 모습에 풍경소리가 아름답던 옛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신라와 고려 때는 국가와 종단에서만 부도를 만들었습니다. 국사와 같은 큰스님의 부도만 크고 정교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절에서 만들게 되면서 작고 소박한 부도가 나옵니다.

상륜부에는 연잎을 위로 향한 앙화 위에 보륜이 겹쳐있고 그 위에 극락조 네 마리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려 합니다. 새의 머리까지 남아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맨 위에는 보주로 끝마무리를 하였습니다. 동부도는 일제 때 일본인들이 너무 탐나서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했답니다.

동부도 옆에 동부도비가 비신을 잃어버린 채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습니다. 거북 등에 날개가 있고 이수 위에 보주가 하나 있습니다. 제작연대는 동부도와 다른 고려시대로 봅니다. 따라서 같은 스님의 부도와 부도비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동부도 왼쪽으로 난 길을 오르면 절 북쪽에 북부도가 있습니다. 동부도를 모방하였는데 격식이 좀 뒤떨어져 보입니다. 하대석의 사자 대신에 연꽃잎으로 바꾸었을 뿐 모든 것이 동부도와 닮았습니다. 석질이 약해서 마모가 심해보입니다.

서부도라 불리는 부도는 소요대사 부도로 명문이 뚜렷하여 조성연대(1649)가 확실합니다. 몸돌에 새긴 사천왕상의 조각이 큼직하게 돌출되어 있고 지붕돌의 귀꽃이 화려합니다. 소요대사 부도의 상륜부가 동부도와 북부도의 상륜부를 바로 올리는 데 표준이 되었습니다. 두 개로 나눠져 있어 뒤섞일 염려가 없었거든요.

절 서쪽에 놓인 현각선사(玄覺禪師) 부도비는 큰 거북머리통에 등짝의 무늬가 선명하여 용맹스러워 보입니다. 고려 경종 4년(979)에 만든 것으로 파손된 것을 붙여놓았습니다.

연곡사 답사의 특징은 지리산 피아골의 수려한 풍광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절 앞 계곡도 좋지만 올라가면 갈수록 계곡의 깊은 맛은 더해집니다.

 

 

 

[김영택의 펜화로 본 한국] 성주군 한개마을(47)
선비의 글 읽는 소리 들릴까… 세월도 걸음을 멈춘 곳

▲ 한주정사

답사여행을 하다보면 모처럼 기대를 하였다가 실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은 번지르르한데 내용이 빈약하여 분칠한 작부의 얼굴 같은 곳, 주민이 떠나 ‘죽은 마을’에 장사꾼만 남은 곳, 한적해야 할 장소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장터같이 된 곳, 주변에 양옥이나 빌딩이 들어서 옛 풍치가 사라진 곳 등이지요.

그러나 간혹 큰 기대 없이 찾아갔다가 숨은 보석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으니, 경북 성주군 한개마을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한개마을은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 9채를 포함하여 70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형적인 양반촌입니다. 취재 도중에 산에서 내려온 고라니까지 맞닥뜨릴 만큼 한적한 마을로, 군내 버스가 하루에 두 번밖에 운행을 하지 않습니다.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고, 구멍가게 하나 찾기 힘듭니다. 좁고 구불구불한 돌담길을 걷노라면 도포 입은 선비와 마주칠 것같이 세월의 감각이 흐려집니다.

▲ 북비고택 대문과 사랑채

▲ 북비고택 장독대

한개마을은 성산 이씨의 집성촌으로, 조선 후기 위세가 당당하였던 선비촌입니다. 예와 의를 존중하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학문을 중시하고 처신을 신중히 하여 성산 이씨라는 관향보다 ‘한개양반’으로 더 잘 알려져 왔습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자 세손을 업고 어전에 나아가 세자를 구하려다가 파직되어 낙향한 북비(北扉) 이석문의 고택에는 북쪽으로 문을 내고 사도세자를 추모한 별채가 있습니다. 영조가 지난 일을 후회하며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답니다.

북비고택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ㄱ’자 형태의 사랑채가 나옵니다. 사랑채 우측의 안행랑채를 돌아 안채 마당으로 들어가면 사당과 안채가 보입니다. 사당 옆 담에는 사랑채로 통하는 샛문이 있습니다. 보기 드문 아름다운 문입니다. 안채 우측의 장독대도 참 예쁩니다. 낮은 담장을 쌓고 기와를 얹은 ‘ㅁ’자 형태의 장독대를 보면 정갈한 음식을 만들던 종부를 보는 듯합니다.

▲ 북비고택 샛문

근세 유학(儒學)의 3대가로 손꼽히는 한주 이진상의 한주정사(寒洲精舍)는 한개마을 답사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정사는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우측 침방 앞에 누마루 1칸을 내달아 전체적으로 ‘T’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경사가 진 곳에 기단을 2단으로 높직하게 지은 정사에 잘생긴 소나무가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 되었습니다. 누마루 난간은 가늘어 섬약해 보이지만 사슴의 뒷다리처럼 날씬합니다. 누아래 기둥에 까치발을 세워 계자 난간을 받치게 하였습니다. 넓은 처마를 받쳐주는 활주에 돌을 다듬어 만든 장주석만 보아도 꽤나 공을 들여 지은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자 오른쪽으로 원시림처럼 숲이 무성한 속에 수초가 가득한 직사각형 연못 2개가 있습니다. 쌍지라고 부르는데 계곡의 물이 자연스레 흐르던 연못이었으나 마을의 상수도 공사 후 물줄기가 끊겨 그리되었답니다. 정자 앞 축대 아래 건물들이 퇴락하였고 잡초가 무성하여 어수선합니다만 잘 가꾸어 놓으면 명승지로 손꼽힐 것입니다.

▲ 교리댁 사랑채

한주정사 마루에 달린 조운헌도제(祖雲憲陶齊)란 편액은 주자와 퇴계의 학문을 사숙하는 곳이란 뜻입니다. 한주선생은 퇴계의 주리론을 발전시켜 심즉이설(心卽理設)을 세웁니다.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여 문인록에 올린 제자만 137인으로 이들을 ‘한주학파’라 부릅니다. 한주의 아들 대계(大溪) 이승희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5적신의 참형과 조약의 파기상소를 올려 옥살이를 한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이상설과 독립운동을 펼칩니다.

한주종택에는 대계의 손자인 97세 이해석 옹이 부인과 함께 종가를 지키고 있습니다. 어느 고택이든 답사 때 어른을 만나면 꼭 허리숙여 인사를 드리고 “집안을 둘러보아도 되겠습니까?”라고 양해를 구하세요. 입장을 바꾸어 시도 때도 없이 구경꾼이 몰려드는 것을 좋다고 하는 분이 있겠습니까. 종택 대문에 하인들이 출입하였다는 작은 쪽문이 있으니 찾아보세요.

▲ 한주정사 쌍지

한주종택을 나서 30여보를 내려오면 오른쪽에 하회댁(河回宅)의 잔디 마당이 보입니다. 본래 한옥의 마당은 백토를 깔아야 제멋이 난다고 합니다만 서양식으로 잔디를 깐 마당도 보기 좋습니다. 문화재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는 사람 생각도 해야지요. 겉모양은 한옥이지만 수세식 화장실과 욕실을 갖추고 입식 부엌에 보일러 온돌을 갖춘 한옥에서 살면 한옥의 멋과 실용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하회댁은 목재의 표면을 깎아내고 칠을 하여 고색은 사라졌지만 깔끔한 손길이 느껴지는 살림집입니다. 흙과 돌로 두껍게 지어 단열 기능을 갖춘 고방채도 볼 만하고, 사랑채가 아닌 안채에 난간을 두른 쪽마루가 달린 것도 특이합니다. 그래서 집 이름에 부인의 고향이름이 붙었나봅니다.

하회댁 바로 아래가 교리댁(校理宅)입니다. 조선 영조 36년(1760)에 이석구가 지은 집으로 홍문관 교리를 지낸 이귀상이 1870년에 고쳐지었답니다. 정면 7칸, 측면 1칸 반의 큰 안채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사랑채, 대문채, 중문채, 서재, 사당 등이 넓은 터에 늘어서 있는 한개마을에서 제일 큰 집입니다. 안채 뒤의 후원에는 가꾸는 이가 없어 잡목과 잡초가 무성한 연못이 숨어 있습니다.

극와(極窩)고택은 한주정사 바로 아랫집으로 조선 철종 3년(1852)에 극와 이주희가 지은 집입니다. 이주희는 한일병합이 되자 흰옷과 흰 종이갓을 쓰고 마루에 거적을 깔고 집밖으로 외출조차 하지 않았던 애국지사였습니다. ‘ㅁ’자형의 배치를 이루었던 광이 없어지고 사랑채와 정침만 남았습니다.

이외에도 월곡댁, 도동댁, 진사댁 등이 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이며 첨경재, 서륜재, 월봉정, 여동서당, 일관정 등이 있어 이곳저곳 보물찾기하듯 찾아보는 재미가 있어 답사가 즐겁습니다.

 

 

 

 

 

 

[김영택의 펜화로 본 한국] 주왕산 대전사(48)
기암절경 앞에 서면 누구나 부처가 됩니다
경북 제일의 절경인 주왕산의 기가 모인 곳…의상대사의 화엄경이 들리는 듯

▲ 주왕산 대전사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고 소문난 산 중에 청송 주왕산(周王山)이 있습니다. 주왕산은 기암(旗巖)이라는 특이한 모양의 산으로 유명합니다. 두툼한 가죽으로 만든 장갑의 손가락 같은 기암에 형형색색의 단풍이 어울리면 중국의 명산에라도 온 듯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깁니다. 그러나 여름 주왕산도 가을 못지않게 아름답습니다. 수직 암벽이 장관을 이룬 사이로 맑은 계곡물이 흘러내리다 폭포가 된 곳이 세 곳이나 됩니다. 특히 비가 온 뒤에는 이름 없는 폭포까지 생겨 골짜기는 물소리로 가득 찹니다.

주왕산은 백악기 화산암이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기암괴석과 폭포, 소를 이룬 빼어난 경관으로 경북 제일의 절경지로 손꼽습니다. 바위가 많은 산은 늙은 땅으로, 영기(靈氣)가 강합니다.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윤회를 많이 한 늙은 영혼의 소유자가 많답니다. 영혼도 늙으면 고향으로 회귀하려는 본능이 커집니다. 영혼의 고향은 기독교의 천당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불국토입니다. 그러니 바위가 많은 나라에서는 종교가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티베트를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한국도 바위가 많은 늙은 땅입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한국에 몰려있는 것입니다.

▲ 대전사 돌탑

▲ 대전사 삼층탑

주왕산 같은 명산에는 큰 절이 있게 마련입니다. 대전사(大典寺) 터가 기암의 기가 모인 자리입니다. 대전사 마당 한쪽에 기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눌러주는 돌탑이 있습니다. 풍수에서 비보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들은 기도가 잘 되는 명당을 찾게 마련입니다. 최치원, 나옹선사, 도선국사, 보조국사, 무학대사 등 쟁쟁한 인물이 대전사에서 수행을 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대전사에서 승군을 훈련시켰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대전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버립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5방, 3불전, 3루각에 쌍탑이 있는 큰 절이었답니다. 이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건물은 보광전과 명부전뿐입니다. 보광전 앞에 오래된 부재를 끼워 넣어 세운 3층 석탑이 있습니다. 기단석의 사천왕상 조각이 정교하며 무척 세련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쌍탑의 부재를 하나로 조립을 하다보니 조각의 크기와 솜씨가 다른 것이 뒤섞여 부자연스럽습니다. 어둑한 새벽에 떠오르는 햇빛이 기암을 비춘 모습이 인상 깊어 펜화에 담아 보았습니다.

▲ 주왕암 앞 촛대바위

대전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합니다. 의상스님은 귀족불교였던 신라에 화엄종을 널리 알립니다. 화엄경은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일반 백성에게 인기가 많았답니다. 그러나 화엄경은 많은 불경 중 가장 수준 높은 경입니다. 의상스님은 화엄경을 한자 210자로 요약한 법성게(法性偈)를 만듭니다. 불성이 무엇인지 설명한 것인데 난해하기 짝이 없습니다. 요즈음 불경을 첨단 현대과학으로 풀이하는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펜화가도 법성게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첨단과학으로 풀어 보았습니다.

법성게 중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를 직역하면 ‘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 모든 세상이 들어있고, 일체의 티끌이 역시 그러하다’가 됩니다. 너무 어렵지요? 예를 들어 풀이해 보겠습니다.

▲ 학소대 계곡

인간은 약 100조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답니다. 이 티끌보다도 작은 세포를 복제하면 인간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작은 세포 안에 인간의 설계도와 제조방법까지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냥 세포증식을 하면 고깃덩어리만 되지요. 그런데 복제된 인간이 태어나면 가르쳐주지 않아도 사람으로서의 생각과 행동을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인간이 수행을 하다 깨달으면 ‘불성’ 즉 ‘이 세상의 참 모습’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배움이나 알음알이로 해결될 수 없다고 하였으니 ‘본래 갖고 있던 것’을 스스로 깨친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세포 하나에 인간을 구성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정보가 몽땅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미진중함시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해가 좀 되셨습니까. 3차원의 상식인, 크기에 대한 개념을 버리시기가 어렵지요?

이야기가 옆으로 흘렀네요. 대전사를 보시고 나면 대전사 좌측으로 난 산길로 올라갑시다. 계곡을 따라가는 길은 물소리처럼 시원합니다. 산성을 쌓았던 돌무더기를 지나 언덕을 오르면 깎아지른 암벽 사이가 좁아지는 곳에 주왕암(周王庵) 가학루(駕鶴樓)가 길손을 반깁니다. 주왕암은 이끼 낀 바위틈에 나한전 등 여러 법당이 몰려 있는데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대전사와 같은 시기에 지은 암자로 일급 기도처입니다.

▲ 주왕암

주왕암 뒤쪽에 주왕산에 숨어있던 주왕이 폭포에서 세수를 하다 화살을 맞고 죽었다는 주왕굴이 있습니다. 주왕암을 되돌아 나와 오른편 산길을 택하면 급수대(伋水臺) 밑을 지나서 학소대(鶴巢臺)를 보게 됩니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깎아지른 바위 절벽으로 싸인 학소대는 주왕산 계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학소대 돌다리를 건너면 선녀탕과 구룡소를 돌아 나온 계곡물이 흰 물보라를 뿌리며 떨어집니다. 제1폭포라 합니다. 1㎞를 더 올라가면 중용추(中龍湫)라 부르던 제2폭포를 만나게 됩니다. 계곡 물이 절구처럼 생긴 바위 웅덩이에 떨어졌다가 넘쳐서 다시 떨어진다고 하여 ‘절구폭포’라고도 합니다. 제3폭포는 2단 폭포로 내용추(內龍湫)라고도 합니다. 등산을 하시지 않을 분이라면 제3폭포에서 되돌아나오면 약 3시간의 답사코스가 됩니다. 대체적으로 길이 평탄하여 노약자도 큰 부담이 없이 답사를 할 수 있으니 어른을 모시고 가기에 좋습니다. 물론 젊은 연인은 손잡고 답사할 수 있는 곳입니다.

 

 

 

 

[김영택의 펜화로 본 한국] 강화 전등사와 정수사(49)
그림 같은 꽃살문, 막 꺾은 연꽃을 꽂아놓은 듯
문살이 아닌 통판 전체에 조각, 한 폭의 그림을 새긴 것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워

▲ 정수사 대웅보전, 2005, 종이에 먹펜, 48*36cm

건축문화재가 있는 현장에서 펜화를 그리고 있을 때 옆에서 서너 시간씩 지켜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 중 반수 이상이 화가입니다. 같은 화가인데도 펜으로 기와 한 장, 벽돌 한 장까지 꼼꼼하게 그리는 것이 신기한가 봅니다. “어떻게 그리 꼼꼼할 수 있느냐”는 분도 있고, “힘들지 않느냐”는 분도 있습니다.

▲ 정수사 대웅보전
세밀한 묘사를 하는 경우에는 하루 온종일 그려도 10×10㎝ 정도밖에 못 그립니다. 그러니 펜화가라고 어찌 지겹지 않겠습니까. 특히 벽돌 건물을 그리려고 수만 장의 벽돌을 한 장 한 장 그릴 때면 한숨이 절로 납니다. 한번은 꾀를 내서 손재주 좋은 후배에게 대신 그리게 하였습니다. 연필로 완전하게 잡아놓은 밑그림을 따라 단순한 선만 그으면 되는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저녁에 보니 후배의 선과 펜화가의 선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림 한 점을 망쳐 놓고서야 선 하나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하나의 선도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주간조선 연재가 1년을 넘었습니다. 주간연재를 위하여 1주일에 한 점의 펜화를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 4절(48X36㎝) 규격의 펜화 한 장 그리는 데는 열흘 정도가 걸리거든요. 더구나 취재에 이틀 정도 걸리니 4~5일에 한 장을 그려야 하는 셈이지요. 그러니 하루 16~18시간 작업을 하여 이틀치 작업을 하루에 해결합니다. 마감 전날은 꼬박 날밤을 새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습니다.

▲ 삼랑성 남문
이번 추석합본호 덕분에 1주일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 덕에 그동안 미루었던 강화 정수사(淨水寺) 법당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정수사 대웅보전의 꽃살문과 공포의 첨차, 화반은 아름답고 섬세한 목각이어서 세밀한 묘사가 필요하거든요. 일부분이 세밀해지면 전체가 같은 필법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곱으로 늘어납니다.

정수사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정면보다 측면이 긴, 보기 드문 규격의 건물입니다. 본래 측면 3칸의 건물에 앞쪽으로 한 칸의 퇴칸을 달아낸 것이지요. 그 때문에 지붕 용마루가 뒤쪽에 치우쳐 있어 측면 풍판의 모양이 이상합니다. 안동 개목사 원통전과 함께 드문 형태의 건물입니다. 작은 법당에 여러 사람이 예불할 수 있도록 개조한 것입니다. 작년에 끝난 8중창 공사 때 목재의 벌채연도를 측정해본 결과 툇간을 내단 것이 1524년으로 추정된답니다.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에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정수사가 유명해진 것은 퇴칸보다는 아름다운 꽃살문 때문일 것입니다. 사분합문인 꽃살문은 화병에 꽃이 꽂혀 있는 모양을 통판투조방식으로 만든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두께 45㎜의 널판에 꽃을 조각하여 문울거미에 끼워넣은 것입니다. 가운데 두 짝은 연꽃, 연봉, 연잎과 줄기를 새겼고 좌우 두 짝에는 목단 꽃, 봉오리, 잎과 줄기를 널판 가득하게 조각해놓았습니다. 불상 옆에 장엄을 하던 크고 화려한 조화를 문짝에 옮겨놓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문살 자체에 무늬를 새긴 꽃살문이나 살교차점에 꽃을 붙인 꽃살문은 연속무늬 형태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통판에 조각한 정수사 꽃살문은 꽃 그림을 보는 듯한 개성이 넘치는 문입니다.

꽃살문과 똑같은 디자인을 법당 정면 공포의 첨차와 창방 위의 화반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첨차 좌우에 연봉을 새겨놓고 소로를 받치게 하였습니다. ‘연봉형 첨차’로 보기 드문 걸작입니다. 투각된 연봉과 줄기를 보고 있노라면 너무 예뻐서 꺾어다가 화병에 담고 싶어집니다. 창방 위의 화반은 넓적한 수반에 연꽃과 연잎을 꽂아놓은 꽃꽂이 작품처럼 아름답습니다. 모두 집을 짓는 대목의 솜씨가 아닌 가구를 만드는 소목장의 솜씨인데 뛰어난 창의력이 돋보입니다.

▲ 정수당 법당 꽃살문(왼쪽), 함허대사 부도(가운데), 정족산 사고(오른쪽).

정수사는 법당이 둘, 요사채가 하나인 작은 절입니다만 꽃살문과 연봉형 첨차, 화반만으로도 보는 이를 행복하게 합니다.

강화도를 한반도의 중심부라고 합니다. 한반도에서 지기가 가장 센 곳이라는 마니산(摩尼山)에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참성단(塹城壇)이 있습니다. 마니산은 ‘우두머리산’이라는 뜻으로 마리산(摩利山) 또는 두악(頭岳)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마니산 동쪽 기슭에 정수사가 있고, 가까운 정족산(鼎足山)에는 단군이 운사 배달신에게 명하여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 안에 전등사(傳燈寺)가 있습니다.

강화도는 수도 서울의 입구인 한강을 방어하는 요충지로서 삼별초의 대몽항쟁,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 사건, 강화도 조약 등 큰 사건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해안을 따라 12진보, 54돈대, 5포대가 잇달아 늘어서 있습니다. 전등사는 호국사찰로서 수도방위와 왕실의 원찰 기능을 함께 담당하였습니다.

▲ 전등사 전경
전등사는 1920년대에 발간한 조선고적도보의 사진과 현재의 모습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큰 불사를 일으켜 절을 키우는 것이 자랑이 된 요즈음 변함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전등사에 정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거목이 된 은행나무뿐만 아니라 절마당의 느티나무도 엄청 큰 덩치를 자랑하고 있고, 보제루 옆의 단풍나무까지 큰 고목이 되어서 전등사의 역사를 말해줍니다. 절 뒤편 잡목들을 베어내서 잘 생긴 소나무들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 참 좋습니다. 스님 말씀이 소나무의 생장에도 좋아서 매년 잡목제거 면적을 넓혀나갈 예정이랍니다. 소나무와 잡목이 섞여있는 숲을 가진 절에서 참고할 만한 일입니다.

절 뒤편 서쪽 숲에 자리 잡은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는 복원된 지 5년밖에 안되었는데 목재들이 습기에 검게 변하여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합니다. 주위의 나무가 너무 잘 자란 것도 탈이 되네요. 잡목들을 제거하여 통풍이 잘 되게 하여야 해결될 것이랍니다.

바다가 보이는 전등사에서 맞는 일출도 장관이어서 정월 초하루 새벽에는 절 마당이 인산인해가 된답니다.

 

 

 

 

 

[김영택의 펜화로 본 한국(50)] 고창 선운사
꽃무릇 붉은 바다 위로 그리움이 뚝 떨어집니다

▲ 도솔암 내원궁

꽃무릇이 만발한 선운사(禪雲寺)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선운사는 봄에는 동백, 여름에는 꽃무릇,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절입니다. 새싹도 보기 힘든 초봄에 붉은 꽃을 피워 남도의 멋을 알리는 선운사 동백도 알아줍니다. 또한 선운산 골짜기를 온통 울긋불긋한 색으로 물들이는 가을 단풍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골짜기마다 붉은 꽃무릇으로 뒤덮이는 늦여름의 선운사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절경입니다.

새벽안개가 낮게 드리운 계곡에 무리지어 핀 꽃무릇이 습기를 머금어 선홍색으로 보일 때는 마음 한구석에 숨어있던 애잔한 기억들이 가슴 한복판으로 스며나옵니다. 상사화처럼 잎이 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어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하는 꽃무릇은 연분홍색의 상사화와는 다르게 짙은 주홍색으로 꽃잎과 꽃술이 가늘고 넓게 퍼져 있습니다. 세속의 여인을 사랑했던 스님이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꽃을 절 마당에 심었다는 이야기와, 스님을 짝사랑하다 죽은 여인이 절 마당에 꽃으로 피어났다고 하는 이야기 중 어느 것이 오리지널인지는 알 수가 없네요.

▲ 대웅전과 만세루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577) 검단(儉旦)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검단선사는 얼굴이 무척 검었다고 하니 남방계의 스님으로 보여집니다. 스님은 선운산에 살던 도적들에게 소금 제조방법을 가르쳐주어 선량한 사람으로 만들었답니다. 이들은 매년 선운사에 소금을 바치고 자신의 마을 이름도 검단리로 하였다 합니다.

선운사는 한때 암자가 89동, 요사가 189채에 3000명의 스님이 살던 큰 절이었다는데 정유재란에 폐허가 되었답니다. 현재는 도솔암, 참당암, 석상암, 동운암이 남아있고, 큰절에는 대웅보전, 만세루, 영산전 등 조계종 제24교구 본사로서의 사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선운사 입구의 부도밭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완연한 백파선사 부도비가 있어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백파와 추사는 선에 대한 논쟁으로 조선 후기 불교사상을 활발하게 만들었고, 그 인연으로 추사가 비문을 쓴 것이지요.

2층 건물로 종루를 겸한 천왕문을 들어서면 만세루가 앞을 가로막습니다. 만세루는 내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공법을 따르지 않은 내부의 기둥과 대들보의 결합 형태가 특이합니다. 휘어지고 뒤틀린 목재를 그대로 쓴 모습도 정이 갑니다.

대웅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큰 법당으로 보물 제290호입니다. 법당 오른쪽 앞에 6층탑이 있습니다. 본래 9층탑이었다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9층 형태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 도솔암 마애불

관음전에 모신 지장보살상에는 거짓말처럼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일제시대인 1936년 여름 일본인이 보살상을 훔쳐서 큰돈을 받고 일본으로 보냈는데 소장자 꿈에 수시로 나타나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보내달라”고 하였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시름시름 앓게 되고 재산이 줄어들자 꺼림칙한 마음에 다른 이에게 넘겼습니다. 그러나 소장자마다 똑같은 우환이 생겨 결국에는 고창경찰서에 되돌려주겠다고 신고하게 되었답니다. 선운사 스님과 경찰이 일본에서 모셔온 날이 1938년 11월이었고, 기념사진에도 사건 개요가 기록되어 있다니 대단한 부처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무척 뵙고 싶지요? 보물 제279호랍니다.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內院宮)에 모신 고려 후기의 금동지장보살 좌상도 신기한 능력으로 소문난 부처입니다. 보물 제280호이고요. 이래서 선운사를 지장보살 도량이라고 합니다.

▲ 선운사 앞 꽃무릇

내원궁은 천인암이라는 기암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어 주변 풍광이 남한 제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마주보이는 천마봉의 입석이 장관입니다. 내원궁 터는 아마추어가 보아도 기가 대단히 세게 느껴지는 곳입니다. 특급 기도처여서 기가 약한 스님은 견디지 못하는 곳입니다. 얼마 전에도 스님 한 분이 기도를 포기하고 내려갔답니다. 기는 전생의 수행등급에 따라 급수가 달라집니다. 중학교 졸업 급수로 대학원에 들어간 셈이니 자퇴할 수밖에 도리가 없지요.

천인암 서쪽 암벽에 도솔암 마애불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마애불의 하나로 불상의 높이만 5m입니다. 머리 위의 구멍은 동불암이라는 누각을 세웠던 자리입니다. 마애불 명치끝에는 검단 스님이 비결을 넣었다는 감실이 있습니다. 비결에는 ‘이 비결이 밖으로 나오면 세상이 뒤집어진다’는 글이 있었다고 합니다. 갑오농민전쟁 때 동학도인 손화중이 꺼냈다고 하는데 동학이 승리하지는 못하였지만 조선이 망하였으니 틀린 내용은 아닌 셈입니다.

도솔암을 보고 천마봉 낙조대에서 유명한 도솔암 낙조를 보면서 선운사 답사를 마무리하는 것도 멋이 있습니다.

절 소개를 한 뒤 고기 먹고 술 마시는 이야기를 덧붙이기가 좀 뭣 합니다만, 선운사 앞의 풍천장어와 복분자술을 빼놓을 수 없지요. 예로부터 선운사 부근의 인천강에서 잡히는 장어를 풍천장어라 하는데 육질이 단단하고 맛이 일품이랍니다. 선운사 앞에는 풍천장어 파는 집이 즐비한데 산딸기 즙으로 만든 복분자술까지 곁들여야 제격이랍니다.

선운사 산사음악회가 끝나고 가수 송창식씨와 장어구이집에 들어갔습니다. 펜화가는 채식만 하기 때문에 일행이 먹는 것을 눈요기만 하고 더덕구이로 허기를 때웠습니다. 채식을 한 지 13년이 되었는데도 가끔은 고기를 먹고 싶어집니다. 오랫동안 먹던 습관은 잊기가 힘든가 봅니다.

 

 

 

 


 
출처 : 연어알 |글쓴이 : 북극해 [원문보기]
 


시호 : 
명성황후 (明成皇后, 1851~1895)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증() 영의정 치록(祿)의 딸이다. 9세 때 고아가 되어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책봉되었다. 그러나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이 태어나자 이를 기뻐하는 흥선대원군과 대립, 흥선대원군의 반대파를 규합하면서 민씨 척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착실히 다졌다.

 

1873년 일본에서 정한론()이 대두되면서 내외정세가 긴박해지고, 경복궁() 중건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이 계속되자, 그를 탄핵하기 위해 유림()의 거두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발탁하였다. 이어 흥선대원군파의 반대 상소와 주장을 배척하고, 고종에게 친정()을 선포하게 함으로써 정권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뒤, 대원군파를 숙청하고 쇄국정책을 폐하여 일본과 수교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궁궐을 탈출, 화개동() 윤태준(駿)의 집을 거쳐 충주()·장호원()으로 옮겨 다니며 피신 생활을 하였다. 이 와중에 흥선대원군이 중전의 국상()을 선포하자,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된 뒤 다시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다시 잡았다.

 

1884년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켜 실각하자, 심상훈() 등으로 하여금 청나라가 개입하도록 함으로써 3일 만에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후 일본 세력의 침투가 강화되면서 김홍집() 등 친일() 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7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흥선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使) 미우라 고로[]가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을 궁중에 잠입시켜 건청궁()에서 그녀를 난자시해()하고, 시신은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이다.

 

그 뒤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복호()되었고, 1897년(광무 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해 11월 국장()으로 청량리() 밖 홍릉()에 묻혔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명성황후에 대해 재평가작업이 일어나면서, 을미사변이 미우라 고로의 단독범행, 또는 그의 후원을 받은 민간인들이나 일본 낭인들의 범행,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투쟁의 산물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는데, 차츰 이러한 통설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1909년 마산우체국 소인 '명성황후(?)엽서' 발견
'명성황후 사진' 논란, 아닌 것으로 사실상 결판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고종의 정비인 명성황후(1851-95)의 생전 모습을 담은 유일한 사진인지 아닌지를 둘러싸고 줄곧 논란을 빚어왔던 '궁중복식을 한 조선여인'의 사진을 담은 엽서 실물이 최초로 발견됐다.

이 여인 사진은 그동안 여러 인쇄매체에 수록된 형태로 전해지고 있으나, 엽서에 수록된 모습으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한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매물로 나온 이 엽서는 상단 오른쪽에 '(메이지)42년(=1909) 7월31일'자 '마산'(馬山)이라는 소인이 찍혀 있는데다, 그 하단에 걸쳐서는 '韓國宮中の老女'(한국궁중의 늙은 여자)라는 일본어 표현과 함께 이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인 'An Old Waman in the Corean Court'라는 말이 나란히 붙어 있다.

따라서 이 엽서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방되기 1년 전인 1909년 7월31일 경남 마산우체국에서 누군가에게 보낸 것임이 드러난다.

아울러 이 사진의 주인공이 '한국궁중의 노녀'임이 일본어와 영어로 나란히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엽서는 1909년 무렵 조선의 이국적인 풍물을 외부에 소개할 목적으로 제작된 것임을 추정하게 하고 있다.

엽서에 수록된 이 조선 궁중여인이 명성황후인가 아닌가를 두고 그동안 관련 학계에서는 격렬한 논쟁을 벌여왔다.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 등이 '명성황후설'을 주장하는데 대해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신복룡 교수 등은 명성황후가 아닌 '궁중여인설'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이번 엽서가 발견됨으로써 '궁중복식 여인'의 모델은 명성황후가 아닌 것으로 사실상 결론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엽서 발행 시기가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된 지 14년이나 지난 뒤인데다, 전임 황제(왕)의 정비(황후)이자, 비록 허울뿐이었지만 당시 황제(순종)의 어머니의 사진을 엽서에 수록하고, 더구나 그 위에 우체국 소인을 찍게 하는 등의 '불경스런'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사진의 주인공 논란에서 중립적 위치를 지켜온 국사편찬위원회 이민원 박사(대한제국시대사 전공)는 "엽서만 보면 분명 이 사진은 명성황후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다"면서도 "하지만 나로서는 엽서 그 자체에 대한 진품 여부를 가릴만한 위치에 있지 않아 최종적인 판단은 유보한다"고 말했다.

이 엽서는 최근 한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매물로 나왔다가 스페인으로 팔려나갔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 구체적인 경매가나 원소장자 및 현소장자 등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taeshik@yna.co.kr

 

 

 

 

 

 

 

 

 

 

 

 

 

 

 

 

 

 

 

 

 

 

 

 

 

 

 

 

 

 

 

 

 

 

 

 

 

 

 

 

 

 

 

 

 

 

 

 

 

 

 

 

 

위치

 

세인트 마틴이라는 지역인데요
거기는 두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마리곳이고 하나는 필립스버그라는 곳입니다.
거기는 마리곳은 프랑스령이고 필립스버그는 네덜란드령입니다.
프린세스 쥴리아나 공항은 프랑스령인 마리곳에 있습니다.


도시개요

제주도의 1/60도 안되는 이 조그마한 섬 은 두 개의 정부에 의해 지배받는 곳으로 세계에서 제일 작은 섬이다. 이렇게 환상적인 섬을 나누고 있는 두 나라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이다. 이곳 마리곳은 프랑스령이다. 푸에르토리코에서 동쪽으로 24km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밀가루처럼 하얗고 고운 백사장은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처가 되어 주고 있다.
St.Martin 에서 어느때건 물에서 할수 있는스포츠 스노클링,윈드써핑,워터스키드등을 금방 찾아 즐길수 있다. 골프와 테니스에 열광한 사람이 이용할만한 훌륭한 필드와 코트가 있고,멋진식사를 할수 있도록 밤에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을 구경할만한 시설을 갖춘 레스토랑도 있다. 카리브 어느곳에서든 관세가 붙지않아 쇼핑하기 좋다. 디스코와 카지노등으로 멋진 밤을 만들수 있다.


교통안내
St. Martin의 Simpson Bay근처에 Princess Juliana 국제 공항이 있다. 제트 비행기도 운행한다.




































위 사진들은 아름답지만 엽기적인 프린세스 쥴리아나 공항의 모습들입니다.

사진을 한두장쯤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올릴때마다 합성 의혹을 받는지라 한꺼번에 여러장을 올려봅니다.

마지막 사진 보시면 아시겠지만 공항 활주로 진입로 바로 앞에 해변이 있어..

무지막지한 크기의 점보 비행기가 손에 잡힐듯 스쳐가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연출합니다.
 
 
위 사진들은 아름답지만 엽기적인 프린세스 쥴리아나 공항의 모습들입니다.

사진을 한두장쯤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올릴때마다 합성 의혹을 받는지라 한꺼번에 여러장을 올려봅니다.

마지막 사진 보시면 아시겠지만 공항 활주로 진입로 바로 앞에 해변이 있어..

무지막지한 크기의 점보 비행기가 손에 잡힐듯 스쳐가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연출합니다
 

우선 프린세스쥴리아나공항을 보면

 

근처의 해일이 일어날만한 요소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물론 바닷가 한가운데 있고

 

어디서 큰 파도가 일어서 해일이 닥칠가능성은 어디서나 존재하지만

 

푸켓과는 다른 지형입니다.

 

주변에서 지진이 발생하더라도 그렇게 큰 해일을 일으킬만한 곳은 아닙니다.^^;

 

 

더불어 해일이 발생한다 치더라도

 

그 섬에서 그곳 아니면 공항을 어디다 만들겠습니까? -.-;

 

해일이 발생하면 이미 비행기는 다른 곳으로 회항을 하던지 하면 되거든요.

 

 

 

그리고 비행기가 기타 많은 곳의 사진에서 보셨던 것처럼

 

그렇게 가까이 접근하면 소음이 엄청 심합니다.

 

김포만 해도

 

그냥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도 소음때문에 걱정할정도인데

 

가까이서 있으면 정말 대단하죠.

 

그 와중에 돌던진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비행기는 그런 돌 하나에 큰 위험은 당하지 않습니다.

 

쓰레기도 마찬가지구요.^^;

 

 

테러를 저지르겠다고 한다면

 

이미 눈에 뜨일정도로 준비를 해야 될텐데 그게 쉽지가 않죠.^^;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가격은 그렇게 세지는 않습니다.
(30시간 이상 소요 예정)

현제 에어프랑스
더치 캐레비안 항공
아메리칸 항공
아메리칸 이글
웨스트 인디아 항공
콘티넨탈 항공
콜스국제항공
KLM네델란드
리아트
성 바쓰 출근회사
US항공
윈드워드 익스프레스 항공
윈드워드 아일랜드항공
케리비언 스타

등이 취항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가게 되면 한국에서 미국으로 간다음에
포에르 토리코에 있는 산환city 등을 거쳐 가는게 쉽습니다.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추천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한항공을 이용 뉴욕으로 이동(JFK), 거기서 델타를 타고 산환으로 간다음, 아메리칸 항공을 타고 SXM으로 가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하면 델타는 대한항공의 마일리지를 적립이 되므로 이익이지요.

또한 캐세이 퍼시픽을 자주 쓰신다면, 일본으로 가서 아얘 아메리카 항공을 타고, 시카고,산환을 거쳐 SXM으로 가는 방법도 있죠. 아메리카 항공타면 캐세이에 적립 가능..

아니면 아시아나를타고 샌프란시스코이나 LA로 가서 US항공을 타고 필라델피아로 가고.. 거기서 다시 SXM 가거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아시아나에 어마어마하게 마일이 쌓이지요(유나이티드가 아닌 유에스 항공임... 참고로 유에스 항공은 5월 4일부터 아시아나에 마일리지를 줌... 어제부터..)
샌프란 시스코로 갈때 싱가폴 항공을 이용할수도 있고요.


이렇게 여러가지가 있는데
이중에 가장 추천되는 것은 역시 마지막 겁니다.
샌프란까지 약 70만원선이죠. 거기서 US항공을 타고 필라델피아를 거쳐 SXM까지는 약 70~80만원 선, 총 150~180정도 어림잡을수 있습니다. 물론 미국 비자가 필요하죠. 한편 KLM을 타고 유럽을 거쳐 갈경우 좀 가격이 쎄집니다. 잘 알아두시길.


참고로 대한항공을 써서 저 델타.. 기타등등을 써도 비슷한 가격 나오긴 나옵니다.
아메리카 항공을 쓰는 두번째꺼는 아마 많이 더 쌀듯... 잘만 하면 140정도면 구할듯 싶습니다(물론 미리미리 예약을 해둬야지, 여행가기 전날 사면 이 가격 안나옵니다)


그럼 즐거운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그 곳 주민들이 소음때문에 뭐라 할 수도 있겠지만

 

비행기가 안 오면 그 사람들은 당장 관광수입원이 없게됩니다.--;

 

그렇게 함 부로 이야기할 처지가 못되죠.^^;


 

'전쟁의 두 모습.' 미국 컬럼비아대학은 5일 올해 퓰리처상 수상작을 발표했다.

위 수상작은 <달라스 모닝>지의 사진기자인 데이브 리슨이 찍은 사진. 이라크에 파병된 두 미국 병사가 더위를 식히기 위해 수로에 뛰어드는 평화로운 장면을 담았다.

아래 수상작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캐롤라인 콜의 작품. 라이베리아 정부군이 비아 타운 브리지를 사수하기 위해 절규하며 총을 쏘고 있는 장면이다. [로이터/뉴시스]

처음엔 CG인줄 알았어요..-_-

사진은 UAE(아람에미레이트), Dubai(두바이)에 있는 Burj al arab 호텔입니다.

아라비아 걸프만의 인공섬위에 만들어졌으며 호텔로서는 세계 최고 높이인 321미터로 파리의 에펠탑보다 크고 미국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보다 60미터 밖에 작지 않습니다. 아라비아의 돛단배를 형상화한 디자인의 이 호텔은 전세계에 두개밖에 없는 별 7개짜리 초특급 호텔로 디자인과 기술면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이며, 롤스로이스 8대와 헬리콥터가 호텔로 들어가는 이동수단으로 쓰입니다.

방의 갯수는 202개 밖에 되지 않지만 모든방은 이층으로 되어 있는 스위트룸이며, 2개밖에 없는 최고급 로얄스위트룸은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합니다. 가장 작은 스위트룸에도 전화기가 14대가 구비되어 있고 방마다 노트북, 프린터, 팩스, 스캐너 등이 모두 갖춰져 있습니다. 1인용 룸에도 모든방에 당구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침대옆에 '화장실 가는 길'이라는 버튼을 누르면 화장실까지 가는 길에 복도에 조명이 은은하게 들어온다고 합니다. 로얄스위트룸의 경우 침대에서 조절할 수 있는 조명시스템이 160개나 되고 개인영화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스위트룸 1,2층은 개인엘리베이터를 이용합니다.

200미터 상공에 스카이 레스토랑이 위치해 있고, 미니 잠수함을 타고 가야 하는 해저레스토랑도 있으며 레스토랑에서 제공되는 음식의 맛 또한 세계 최고의 수준이랍니다. 중앙 로비는 60층짜리 수족관으로 둘러싸여 있고, 수족관속엔 500여종의 희귀 동,식물들이 노닌다고 합니다. 벽과 기둥들의 장식들은 모두 순금이고, 벽을 장식하는 모든 것들은 헨드메이크 조각이며 곳곳에 비치된 예술품 또한 모두 진품이라고 합니다.

호텔에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모든 스텝들 또한 영국에 있는 집사 전문학교에서 트래이닝을 받은 일류 호텔리어들이라고 하는군요.

( Royal Suite의 하룻밤 숙박료는 우리돈으로 9백만원정도 )








호텔 지상 211m의 테니스장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 오픈에 참가중인 남자 테니스 세계랭킹 1위인 로저 페더러(앞쪽)와 백전 노장 앤드리 애거시가 23일 두바이 주메이라 해변의 인공섬에 있는 해발 211㎙의 초호화 호텔 버즈 알 아랍의 헬기 이착륙장에서 이벤트 경기를 펼치고 있다. 두바이 EPA=연합

미국의 앤드리 애거시와 세계 1위인 스위스의 로저 페더러가 22일 두바이 소재 '부르즈 알 아랍' 호텔의 지상 211m에 있는 헬기 이착륙장에 임시 마련된 테니스장에서 친선경기에 앞서 밑을 내려다 보거나 몸을 풀고 있다(AFP=연합뉴스)

[두바이=EPA]22일(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오픈에 출전하는 미국의 안드레 아가시가 별 7개의 세계 최고급 호텔 중 하나인 버즈 알 아랍 호텔의 테니스 코트에서 두바이 오픈을 대비해 연습을 하고 있다. 아가시는 이날 세계 랭킹1위인 스위스의 로저 페더러와 함께 20분 정도 연습했다. 한편 이 코트는 높이 211미터의 지상에 설립돼 마치 '테니스의 섬'처럼 공중에 떠 있다. 넓이는 415평방미터이며 일반 테니스코트처럼 모든 시설이 완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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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치다 떨어지면 어떻하죠? ^^;



출처: http://www.tye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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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부근 --전갈자리

어느 바다-- 사망한 무사

남미 페루 --프랭클린

극광-- 자세히 보면 얼굴이 있습니다!

캐나다 미국 알래스카부근 -- 거북 형상 

유고슬라비아 경내-- 잠자는 고양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골짜기-- 사람얼굴

* 합.성.임 (신 - 이걸 만든 자.. 포샵 실력이 신-내가 만든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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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남미 훠디다오에-- 해골이 있는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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