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10일 오전에 강남가는 버스에 올랐는데
출처 : 펌 ![]() |
'엽기사진·그림·글·동영상·(웃으며살아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꺄악~~~ 또 비행기 테러인가? (0) | 2005.09.16 |
---|---|
[스크랩] 연o중학교 교직원 화장실에 이거 쓴새퀴... 10초준다 (0) | 2005.09.16 |
친일파 후손들의 땅찾기 (0) | 2005.09.15 |
엽기강아지 (0) | 2005.09.15 |
우등반or열등반 (0) | 2005.09.10 |
월10일 오전에 강남가는 버스에 올랐는데
출처 : 펌 ![]() |
[스크랩] 꺄악~~~ 또 비행기 테러인가? (0) | 2005.09.16 |
---|---|
[스크랩] 연o중학교 교직원 화장실에 이거 쓴새퀴... 10초준다 (0) | 2005.09.16 |
친일파 후손들의 땅찾기 (0) | 2005.09.15 |
엽기강아지 (0) | 2005.09.15 |
우등반or열등반 (0) | 2005.09.10 |
2003년 퓰리처상 수상작품 모음 (0) | 2005.09.16 |
---|---|
[스크랩] 비싼차는 그누구도 건들수 없다? BMW의 파워 (0) | 2005.09.16 |
들꽃탐사(들꽃) (0) | 2005.09.15 |
멎진풍경사진 (0) | 2005.09.15 |
세계의 폭포 (0) | 2005.09.15 |
가산-큰도둑놈의갈고리
|
[스크랩] 비싼차는 그누구도 건들수 없다? BMW의 파워 (0) | 2005.09.16 |
---|---|
들꽃탐사(들꽃) (0) | 2005.09.15 |
멎진풍경사진 (0) | 2005.09.15 |
세계의 폭포 (0) | 2005.09.15 |
절묘한사진 (0) | 2005.09.15 |
들꽃탐사(들꽃) (0) | 2005.09.15 |
---|---|
들꽃탐사(들꽃) (0) | 2005.09.15 |
세계의 폭포 (0) | 2005.09.15 |
절묘한사진 (0) | 2005.09.15 |
가을의문턱 토요일 오후 해질녁에... (0) | 2005.09.15 |
지난번 노무현 대통령이 월남에 가서 한국은 월남에 마음의 빚이 있다고 말했다던가요.....
빚이라...음...글쎄요, 나는 월남에 참전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 시대를 바라본 사람으로서 몇 가지 생각의 단편들을 펼쳐볼까 합니다.
군대에 입대하여 최전방에서 생활하다보니 겨울이 금새 다가오더군요. 그 힘든 고역중에 고참병의 식기를 닦아주는 일이 있었는데...한 겨울에 산골자기에서 흐르는 냇물에 열 개가 넘는 식기를 닦는 다는 일이 쉬운일이 결코 아닙니다. 엄청 손이 시렵죠.
결국 동상이 걸렸는데..손가락 마디마다 칼로 베인 것 처럼 살이 갈라지고 구부러지지를 않는 겁니다. 첫 휴가는 다가오고 손가락은 안 구부러지고...큰 일 났더군요. 어머님이 보시면 기절하실텐데....그래서 휴가 열흘 전부터 더운 물에 손을 담가 피부를 불린 후 면도칼로 굳은 살들을 깎아내었습니다.
<월남 병장> 이럴 즈음에 월남에서 돌아온 병사들...월남 병장...이 속속 부대로 전입하여 왔는데...그들이 이야기하는 월남은 낙원이더군요.
"이봐, 여기에서는 병기청소에 취침점호도 괴롭지? 월남에서는 저녁을 먹고 인원파악만 하면 점호 끝이야." "점호가 끝나면 매점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텔레비젼을 보지" "C-레이션 고기 통조림은 처음 전입온 쫄병들이나 먹는다고, 고참은 K-레이션의 김치, 고추장 찾아먹고...."
뭐시라? C-레이션의 고기 통조림 알기를 뭣같이 안다고? ....그리하여 나는 그 날로 월남에 자원하게 됩니다만... 내가 자원했을 때에는 월남전은 이미 끝물이었으며 내 앞에는 먼저 지원한 병사들이 30명이나 적체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어떤 병사가 되었을까...> 내가 참전했더라면 나는 어떤 병사가 되었을까요...물론 용감한 병사겠죠. 아마도 내 눈 앞에 비실비실한 베트콩이 있는 경우...나는 서슴없이 방아쇠를 당겼을 겁니다. 또 내 전우들이 어느 마을에서 테러를 당했다면 아마도 ....그 마을을 싹쓸이하는 행위에 일조했을 것으로 봅니다. 내가 학살행위에 까지 적극 나섰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행위를 목격해도 적극 제지할 용기나 신념은 지니지 못했을 것이구요. 여하튼 나는 "무찌르자 공산당"을 노래하며 자란 냉전의 세대로서 국가가 공인한 적에 대하여까지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줄 그런 젊은이는 아니었습니다.
<그 전쟁에 대한 이미지> 그런데...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는 "월남 참전"이라는 직접적인 경험이 없으므로 내가 "월남에 대하여" 안다고 하는 것은 거의가 다른 사람의 경험담이 내 안에서 축적되며 만들어 낸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들이 나의 안에서 그 전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내가 갖고 있는 기억이 주는 의미는 무언가...하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병사들의 고생...월남에서 온 김병장> "수색을 나갈 때면 수통을 몇개씩이나 차고 나가는데 그래도 물이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였어. 결국 자기의 소변을 받아 커피를 타서 마시곤 했지...한 번은 길가에 물소들이 지나간 발자국이 패여 있었는데...그 패인 발자국에 물이 고여있는거여...병사들이 우르르 달려가서 그 발자국에 고인 물을 핥아마시는데 중대장은 총알 맞고 싶어 환장했냐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더구먼."
<챙겨먹기...함께 사우디에서 근무한 UDT 출신의 김과장> "다낭항에서 물자를 하역하는데 어느 날, 그 곳에서 일하던 나이 많은 아주머니가 젊은 여자를 데리고 나온거여...며느리라고 하더군. 남자는 포탄에 맞아죽고. 내가 이 여자에게 일거리도 만들어주고 레이션도 생기면 주곤 했지...얼마가 지나자 이 여인이 날 보고 자기가 좋냐고 하더군...그렇다고 했더니 바로 몸을 대주는거야. 그날은 결심을 하고 나왔던 모양이더라구...돌이켜보면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잔인함의 몰인식....내가 근무하던 연대 하사관들의 이야기> "연대 수송부의 "김 중사" 말야. 그놈은 여자 베트콩의 성기를 동그랗게 오려내어 말린 것을 갖고 다닌다구. 그걸 몸에 지니고 고스톱을 치면 끝발이 기가막히다더군."
<능욕, 살인의 무감각....태권도가 4단인 직장의 선배> 수색을 나갈 땐 소총도 안주고 권총이나 수류탄만 지급하는 경우가 있었어. 어느 촌락의 길 옆에서 처녀를 하나 잡아서 집단으로 능욕을 했지...그리곤 처치했어, 여자가 신고하고 어쩌고 하면 골치가 아프기 때문에 살려둘 수가 없어..다 그랬어"(차마 "죽였다는 말이요?" 하고 물어볼 수가 없었음)
<전쟁의 비참함...안케전투에 참전한 10중대 인사계> 그 날 오후가 되니까 죽은 병사들을 헬리콥터로 계속 실어오더군. 의무병과 둘이서 떨어져나간 팔다리들을 시체에 꿰매어 붙였어. 당연히 다른 녀석의 팔다리를 붙이는 수도 많았겠지.
<한 여인의 비극....논산 25연대 교관이던 경상도 출신의 대위> 포탄이 터지면서 어린 소년이 나가떨어졌어....피범벅이 된 녀석을 찝차로 옮기는데 이미 죽은 목숨이더구만. 그런데 그 녀석의 엄마가 길바닥에 떨어져나간 아이의 살점을 주워 자신의 가슴패기에 넣으면서 울고 불고 따라오는거야...
그렇습니다. 나의 안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주워 담겨져서 그 전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러한 기억들이 지금까지 내 안에 남아서 무슨 일을 하고있죠? 언젠가 이 블로그에 쓴 남영동 굴다리에 대한 이야기에도 비추었습니다만... 이런 기억들은 온전히 위로받지못한 기억으로서 내 안에서 그 의미가 완전히 소화되기 전 까지는 끊임없이 반추될 그 무엇이라고 봅니다.
이 땅에 남아있던 나도 그 전쟁은 피할 수 없어서 그 전쟁의 고통스러운 파편들이 내 가슴에 박혀 핏값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죠. 내가 그러하다면 나와 같은 세대를 공유한 다른 분들에게도 이 고통의 파편들은 반드시 박혀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밑천삼아 그 전쟁이 어떠한 전쟁이었다고 정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섣부른 정의가 내 안에 박혀있는 고통들의 아우성을 허망한 말로서 번역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그냥 들은대로 원본을 간직하고 싶습니다. 세월이 가고 나 스스로 그 고통을 더욱 더 깊이 이해한다면 제 값을 받은 기억들이 스스로 떠나겠지요.
아! 위에서 말한 태권도 4단의 선배말입니다.그 분이 이런말을 했어요.
" 월남에서 귀국하여 세월이 흐르니까 온 몸이 가렵기 시작하는거야...고엽제 말이네. 어떤 때에는 너무 가려워서 잠을 잘 수도 없어...그럴 때는 헤어 드라이어로 가려운 곳을 말려주며 밤을 새우기도해...."
" 나만 당한다면 그래도 감수하겠어...아들 녀석이 장성하면서 이 녀석마져 긁기시작 하는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겠습니까...그냥 바라보고 나의 몫을 감수할 뿐입니다.
|
이스라엘 탱크병
나는 이 나라에서 전쟁이 날까봐 두려워 하지만 남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대하여는....특히 그 전쟁에 동원되는 무기에 대하여.....관심이 많습니다.
이런 나의 모순된 심리상태에 대한 반성문은 나중에 올리기로 하고요....
유태인이 아우슈비츠에 갇혀 있을 때 그들 앞으로 독일군이 지나가면 모자를 벗고 눈을 아래로 깔은 채로 예우를 갖추어야 했지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사람들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고 대할 수 없는 것은 비극입니다.
그래도 가끔은 얼굴을 마주하누만.....
최근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분쟁을 보면서 다시 한번 그러한 비극을 실감하는데....이런 비극을 하필이면 내가 좋아하는 이스라엘의 메르카바 탱크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발견하게 되다니....
이스라엘군의 메르카바 탱크
나는 메르카바 탱크를 좋아하죠.
이 탱크에는 그들이 겪은 전쟁의 경험들이 고스란히 반영되어있는데다가 신속하고 부단하게 업그레이드를 하고있습니다.
외신이 전하는 소식에는 이스라엘 탱크를 향하여 돌멩이를 던지는 팔레스타인 소년들의 모습이 자주 전해집니다만...나의 관점은 언제나.....돌멩이로 얻어맞는 텡크가 메르카바-모델2냐? 모델3이냐에 관심이 가는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탱크는 메르카바 모델은 아닙니다만 고개를 내어민 병사가 보이죠?
긴박한 상황에서 얼굴을 빠꼼히 내어미는 것은 이스라엘군 특유의 버릇입니다.
미군의 경우는 아예 상반신을 화끈하게 내어밀거나 아니면 해치를 단단히 잠그고 잠수합니다만....이스라엘의 전투교범은 적탄이 날아오는 상황에서도 전차장은 해치를 약간 열고 바깥을 빠곰히 내다보며 육안으로 상황을 파악하라고 권고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라파트의 관저를 포위하기 위하여 달려가는 마가크....역시 빠꼼 전차장이 보이죠?
멀리 보이는 건물이 아라파트의 집무실 건물입니다.
잘 보시면 마가크 전차장의 빠꼼한 용모를 발견하실 수 있죠!
저 탱크에서 해치를 살짝 열고 밖을 내다보는 전차장을 발견하실 수 있으십니까?
아니면 확대사진을 보시죠?
아하! 해치앞에 놓은 망원경 때문에 당사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군요.
더 확대를 해 보지요.
앗! 들켰다!! 빠꼼한 전차장의 모습....하하
뭘 보는거요? 뭘 생각하면서?
글쎄...언제나 당신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정다운 얼굴로 마주보며 살아갈 수 있을가를 생각해보며...또 내가 좋아하는 메르카바 탱크에서 빠꼼이 전차장의 모습을 안볼 날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데...글쎄....분쟁이 없다면 탱크를 구경할 기회도 줄어들 것 같아서 고민이 되는구만.
인천 자유공원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본다는 것은 이 나라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인천의 자유공원에서 맥아더 장군의 동상에 경례를 올리는 한 노신사를 목격하였습니다.
해병용사이며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했다는 이 분은 속초에 사시는데 인천에 사는 딸의 집을 잠시 찾아왔으며, 인천에 오면 반드시 이 공원에 올라 장군의 동상에 경례를 올린다고 하더군요.
코주부 : 상륙작전때에는 어느 대대에 소속되었습니까?
역전의 용사 : 글쎄 그건 잘 기억이 나지 않소이다...그게 중요하오?..여하튼 엄청 죽었소.
코주부 : 당시에 3 대대는 저어기 대한 제분앞으로 상륙을 했고...1대대는 인천항 남쪽으로 상륙을 했지요...혹시 상륙하신 곳이 어디인지 기억이 나시는지요?
역전의 용사 : 그것도 잘 모르겠소...여하튼...압록강까지 올라간 내 전우 30명 중에서 나만이 살아남았다오.
북정동 골목길을 내려가시는 그 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내가 그 '살아남은 용사"에게 실례를 저질렀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 분에게 역사의 기억을 강요했는데 이제 그 분에게 남은 기억은 전쟁의 가장 아픈 기억...그리고 가장 마지막 까지 남을 기억....."전우의 죽음"뿐이었던 것입니다.
<잊혀진 역사의 포성>
여기에서 나는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기억의 한자락을 붙들어 되살려 보고자 합니다.
윗쪽의 긴 방파제로 육지와 연결되어있고, 오른 쪽 아래의 방파제는 소월미도로 연결되는 길입니다.
1950년 9월 14일 밤 2시
칠흑같은 어두움을 뚫고 19척의 선발함대가 종대로 줄을지어 팔미도의 등불을 신호삼아 인천 앞바다로 진입해 들어왔습니다. 드디어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의 서막이 올려지는 순간이지요.
1950년 9월 15일, 새벽 5시 정각.
공격개시명령을 받은함포의 포문이 열리고 코르세어 함재기들이 월미도를 향하여 날아가 격렬한 포격을 개시합니다.
그리고 해병대 병사들은 상륙용 주정으로 옮겨타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벽 6시 27분,
미 해병 제 1사단 5연대 3대대 병력이 17척의 상륙용주정에 분승하고 9대의 탱크를 실은 3대의 대형 상륙주정도 함께 월미도 해안(그린 비치)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아래의 "코주부"장군이 작성한 작전도를 보아 주십시요.
"월미도"는 인천항을 외곽에서 둘러싸고 호위하는 형상을 하고있는 섬으로서 육지와는 방파제로 연결되어있고, "소월미도"와도 작은 방파제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인천상륙의 제 1파는 바로 월미도...지금의 문화의 거리가 형성되어있는 해변에 상륙하였는데 이 위치의 작전명은 "그린비치" 였습니다.
북한군이 쏘아대는 기관총 사격을 받으며 해안에 상륙한 미 해병대는 1개 소대를 기관총이 날아오는 "소월미도"로 진격케하고 일부는 산 정상을 향하여 공격해 올라가며, 다른 일부가 섬을 좌로 돌아서 인천시내와 연결된 방파제 입구까지 전진하여 인천 방향에서 몰려올지 모르는 북한군에 대한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이 방파제가 바로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도로이며 멀리 건너편에 보이는 곳이 지금의 '대한제분'이 있는 위치로서 작전명"래드비치"...금일 저녁의 상륙목표인 것입니다.
3대대의 주력은 바로 월미산 정상을 향하여 공격해 올라가서 섬에서 동굴을 파고 저항하던 북한군 병력을 섬멸합니다.
이 섬에는 약 400명의 북한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108명은 사살되고, 136명이 포로, 나머지 병력중 100여명은 동굴에서 저항하다가 매몰되어 사라졌습니다
.
미 해병이 월미도에 대한 소탕을 완료한 시간이 대략 오전 8시,
이제 그 유명한 인전의 간조로 인하여 저녁 때까지 바다로부터의 지원은 없으므로 인천으로부터 북한군이 몰려오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진지를 구축하고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오후 4시 45분 만조가 시작됨.
만조가 시작되자 미 해병대의 제 2파가 상륙을 개시하여
미 해병 제 5연대는 17시 33분에 북쪽해안(래드비치)..지금의 대한제분공장자리...에 상륙을 개시하고,
미 해병 제 1연대는 17시 32분에 인천항 남쪽 송도해안(불루비치)에 상륙을 감행합니다.
다시 "코주부" 장군의 작전도를 참고하여 주십시요.
작전도와 같이 미 해병 5연대의 1,2 대대와 자랑스러운 우리 해병 제 1해병연대 제 3대대의 병력은 북쪽의 "래드비치"로 상륙했으며, 미 해병 1연대는 인천의 남측 송도 방향의 "불루비치"로 상륙을 감행하였던 것입니다.
이 상황을 한 눈으로 보여주는 항공 사진으로 보시지요.
9월 15일 저녁 5시 30분에 "래드비치"와 "불루비치"로 달려가는 상륙용 주정의 모습이 한눈에 보입니다.
월미도의 상황은 이미 끝나서 "래드비치"로 이어지는 방파제를 따라서 탱크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보이며 '자유공원"을 폭격하는 미 해군의 코르세어 공격기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인천의 외항과 내항의 모습이 한 눈에 보이는데 인천항은 교두보가 확보되면 대량으로 물량이 하역될 "옐로우 비치" 였습니다.
"래드 비치"로 달려가는 미 해병대...."래드 비치"는 방파제로 둘러쌓여 있으므로 이 사다리는 방파제의 높이에 맞추어 제주도에서 준비해 온 것입니다.
과연! 사다리를 이용하여 방파제를 올라가고 있는 미 해병과 한국 해병대 병사들의 모습입니다. 이 때 인천 역 방향에서 기관총 사격이 날아오며 저항이 있었으나 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서울 방향에서 달려오던 북한군 병력은 미군기의 워낙 거센 폭격에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상륙성공후 월미도에 접안하여 물자를
하역중인 LST 함들.
다음 날 아침 .."래드 비치"로 상륙한 한국 해병대 3대대 와 "블루 비치" 방향으로 상륙한 해병대 1대대의 병사들은 미 해병대의 병사들과 인천 시가지 소탕작전에 나서게 됩니다.
9월 16일, 인천이 완전히 아군의 수중에 들어오자 인천항(옐로우 비치)을 통하여 미 육군 제 7사단의 병력과 한국군 제 17연대의 병력이 상륙하여 서울로 공격할 준비를 갖춤으로서 역사에 남는 인천상륙작전은 막을 내리는 것입니다.
상륙작전의 성공 후 인천항(옐로우 비치)에 상륙한 맥아더 장군과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장군일행
<우리 해병대의 전진행로>
나는 우리의 자랑스런 해병용사들이 우방의 군대와 어깨를 마주하고 이 역사의 현장에 참여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여기는 우리의 땅이며 우리의 피를 바쳐서 찾아야 할 실지였으니까요.
상륙 당시에 북쪽 해안(래드비치)으로 상륙한 우리 해병 "3대대" 와 남측 해안(불루 비치)로 상륙한 "1대대" 는 인천 시내 소탕을 마친 후 집결한 후 "제 3대대" 는 수원 방면으로 내려가고 "제 1대대" 는 서울 방면으로 미군과 함께 진격합니다.
제 "2대대"는 옐로우 비치" 로 상륙하여 제 2 대대와 함께 서울 방향으로 전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므로 서울에 입성하여 중앙청 지붕에 태극기를 날린 해병용사는 제 1대대 또는 제 2대대의 용사일 겁니다.
이 부족하기 그지없는 글을 "살아남은 노병" 에게 바칩니다.
********작성을 마치고 떠드는 몇몇 이야기 들**************
1. 인천상륙 작전에 대한 글과 그림은 많으나 너무 산만하게 흩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후대들에게 이 역사적 사건을 제대로 알려주려면 우선 글과 그림을 사건의 시간대별로 정리한 바른 텍스트가 준비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며 제 나름의 작은 시도를 해 본 것입니다.
2. "자유공원"에는 지금도 "인천 문화원"이라는 작은 건물이 있는데 19세기 말 외세가 이곳을 점유하고 있을 때 "외국인 전용 클럽" 이던 건물로서 100년이 넘었죠.
이 건물이 어떻게 인천상륙당시의 엄청난 폭격에 살아남았는지 참으로 신기하고 한 편으로 감사한 심정입니다.
자유공원에 있는 인천 문화원
3. 북정동에 중국인 거리가 만들어지고 있죠? 자유공원아래는 전쟁 전부터 중국인들이 촌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아래에 있는 집은 제가 삼십 년 전에 울면 한 그릇을 사 먹고 삽십 년 후에 다시 볶음밥을 사 먹으며 찍은 모습입니다. 거의 그대로 있더군요. 아주 오랜 전통을 가진 중국집이지요.
4. 작전도와 그림에 붙어있는 설명은 제가 만든 것입니다.
그림에 포함된 설명문도 제가 만들었는데 너무 커서 문장의 글과 조화가 잘 안되는군요 ...
알면서도 고치기가 힘들어 그냥 올렸습니다.
5. 언제가 월미도의 '문화의 거리" 에 가시거든 '그린 비치" 기념비를 찾아보아 주십시요.
이 한 장의 사진이 제게는 아주 소중합니다.
이 방파제가 인천시내와 월미도를 이어주는 방파제인데 그림에서 오른 쪽은 인천항이며, 왼쪽은 바다입니다.
제 나이 다섯 살 때 아빠의 손을 잡고 이 방파제를 걸어 월미도를 구경했는데....바로 이 군인들이 앉아있는 자리에 소풍객들에게 식혜를 파는 조그마한 정자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날이 내 인생 최초의 구경 나들이 였는데... 그 화창했던 초여름의 어느 날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군요.
(당시에는 월미도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안 쪽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백년 전 사진을 보면 월미도의 왼쪽에 소월미도가 보입니다.
이 소월미도는 작은 방파제로 대월미도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항구를 대폭 늘리면서 연결이 끊어져 소월미도는 사라졌습니다.
혹시 자유공원에 오르시거든 소월미도가 있던 곳을 짐작으로 바라보세요. 거기에 건물들 사이에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작은 언덕이 있습니다. 소월미도의 흔적이지요.
이 소월미도를 바라보노라면 웬지 무언가를 상실한 느낌으로 가슴이 아련해 집니다.
나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그 자리를 지켜주기를 바랍니다.
노병이 장군에게 올리는 경례는 맥아더 장군에 대한 존경이라기 보다는 살아남은 자신에 대한 경의일 수 있으며 어려운 시절 자신의 행위에 대한 긍지인 것입니다.
동상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동상을 자신의 삶의 기억을 여는 키(key)로 간직하는 세대에게 실례되는 일이지요. 그 동상에는 우리가 축적한 가치가 너무도 많이 들어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소중한 가치의 징표를 무너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이념의 금자탑을 세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1![]() ![]() ![]() ![]() ![]() ![]() ![]() ![]() ![]() ![]() ![]() ![]() ![]() ![]() ![]() ![]() ![]() ![]() ![]() ![]() ![]() ![]() ![]() ![]() ![]() |
들꽃탐사(들꽃) (0) | 2005.09.15 |
---|---|
멎진풍경사진 (0) | 2005.09.15 |
절묘한사진 (0) | 2005.09.15 |
가을의문턱 토요일 오후 해질녁에... (0) | 2005.09.15 |
번개사진 (0) | 2005.09.10 |
멎진풍경사진 (0) | 2005.09.15 |
---|---|
세계의 폭포 (0) | 2005.09.15 |
가을의문턱 토요일 오후 해질녁에... (0) | 2005.09.15 |
번개사진 (0) | 2005.09.10 |
[스크랩] 넘 귀한자료라 퍼왔어요..(같이봐요) (0) | 2005.09.07 |
세계의 폭포 (0) | 2005.09.15 |
---|---|
절묘한사진 (0) | 2005.09.15 |
번개사진 (0) | 2005.09.10 |
[스크랩] 넘 귀한자료라 퍼왔어요..(같이봐요) (0) | 2005.09.07 |
[스크랩]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르는 네순 도르마 (0) | 2005.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