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가오 해협 해전 - 죽음의 야간 행진

   한편, 술루 해를 지나 수리가오 해협을 통과할 목적으로 작전에 임한 니시무라 제독의 제1유격함대 지대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24일 오전 이미 적의 항공기에 발각되었지만 구리다 제독의 함대만을 노린 핼지 제독의 방침에 의해 피해 없이 술루 해를 통과하여 수리가오 해협 입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도중에 미군의 공습으로 전진이 지연된다는 구리다 제독의 통신을 받았지만, 니시무라 제독은 25일 새벽까지는 수리가오 해협을 통과할 생각이었습니다.

수리가오 해협 전투의 상황도

   이 쪽을 담당하고 있었던 킹게이드 제독 휘하의 전함함대 사령관 올덴도로프 제독은, 연안감시함대와 정찰기의 보고로 일본군 출현을 일찌감치 듣고 전투배치에 들어갔습니다. 지도에서 보이듯이 파나온 섬의 남단 연안에 39척의 고속 어뢰정을 배치해 놓고, 해협의 태평양쪽 연안에 어뢰공격을 목적으로 하는 27척의 구축함함대들을 배치하였으며, 마지막으로 휘하의 전함 6척과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4척을 해협을 가로지르는 상태로 배치해 놓았습니다.

미국 해군의 고속 어뢰정(PT-Boat)
케네디 대통령이 이런 보트의 정장으로 전쟁에 참여했다고 하지요.

   올덴도로프 제독의 6척의 전함들은 1차대전때와 20년대 초에 건조된 낡은 함들로, 그 중 전함 캘리포니아(California)와 웨스트버지니아(West Virginia)는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때 침몰되었고 전함 메릴랜드(Meryland), 펜실베니아(Pennsylvania)와 테네시(Tennessee)는 대파되었던 것들인데, 후에 인양하고 수리하여 다시 전선에 참가한 함정들이었습니다. 니시무라 제독의 2척의 전함 역시 1차대전 중에 건조된 낡은 함정들로 - 일본 최초의 드레드노우트급 전함들이라고 - 30년대에 개수를 받기는 하였으나, 이번 대전 기간중에는 주로 훈련함으로 쓰이던 것들이었습니다.

수리가오 해협 전투에 참여한 양국의 전함들의 내역

이름

무장

건조

완성

비고

펜실베니아(Pennsylvania)

14inch ×12

1913.10.27

1916.6.12

진주만에서 피해

미시시피(Mississippi)

14inch ×12

1915.4.15

1917.12.18

기습당시 호송임무

테네시(Tennessee)

14inch ×12

1917.5.14

1920.6.3

진주만에서 피해

캘리포니아(California)

14inch ×12

1916.10.25

1921.8.10

진주만에서 침몰

메릴랜드(Maryland)

16inch ×8

1917.4.24

1921.7.21

진주만에서 피해

웨스트 버지니아(West Virginia)

16inch ×8

1920.4.12

1922.12.1

진주만에서 침몰

후소(扶桑)

14inch ×12

1911.5.12

1915.11.18

전쟁 중 훈련함으로

야마시로(山城)

14inch ×12

1913.11.20

1917.5.31

전쟁 중 훈련함으로

   앞에 구축함 4척, 전함 야마시로 - 니시무라 제독이 승선한 기함 - 와 후소, 중순양함 모가미의 순으로 단종진을 취한 니시무라 제독의 함대는, 23:00시경에 해협 입구에 도달하여, 숨어있던 어뢰정들에게 시달리면서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25일 03:00시 경, 해협의 북단에 숨어있던 미국 구축함들은, 니시무라 함대가 7000m에서 8000m까지 접근하자, 재빠르게 뛰어나가 어뢰를 쏘고 잽싸게 반전하였습니다. 이 공격에 어뢰 2발을 얻어맞은 후소는, 그 중 한 발이 정확히 화약고를 잡는 바람에 화약고 유폭으로 허리가 꺾이며 이번 전투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10분 후에 2차 어뢰 공격이 이루어졌고, 이 공격에 구축함 야마구모(山雲)가 폭파 굉침되었으며, 구축함 미찌시호(滿朝)도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다음에 얼마 후 다른 공격을 받고 침몰하였으며, 구축함 아사구모(朝雲)는 어뢰를 맞고 함수가 완전히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미 2발의 어뢰를 맞은 전함 야마시로는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하여 함포를 난사하면서 원래 계획된 침로를 따라 필사적으로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는...

화약고를 맞고 굉침한 일본 전함 후소

   지도에서 보다시피, 일본 함대의 숨통을 끊어버리기 위해 올덴도로프 제독의 주력인 전함 6척, 중순양함 4척과 경순양함 4척이 전방을 가로지르는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진하는 상대의 앞을 가로막고 전후의 모든 함포를 동원하여 앞부분 함포밖에 쓸 수 없는 상대를 2배의 화력으로 덮치는 이런 T자형의 배치는 항공기가 발달한 시대에는 대공 방어력이 떨어져 거의 쓰이지 않는 대형이였으나, 이번 전투 - 전함 대 전함이 맞서는 역사상 마지막 전투가 되겠다는 - 에서는 진귀하게도 공습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상황을 맞아 이런 대형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올덴도로프 제독 기함이었던 중순양함 루이스빌(Louisville)의 함장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고 합니다. "해군대학의 연습에서 구상하고 상상하고 연구하기는 하였으나 현실적으로 벌어지리라고는 도통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위치에 있었던 것이었다." 기함 갑판에 있던 올덴도로프 제독은 일본 함대가 1만5000m까지 접근해온 03:50시 경에 사격명령을 내렸고, 미국 해군의 모든 전투함은 목측 대신 레이더 사격통제장치에 의존한 사격을 일본 함대에게 퍼부었습니다. 아군 구축함이 포격에 휩쓸리게 되어 사격 중지명령을 내린 04:09시까지 모두 270발 남짓의 전함의 14inch 혹은 16inch 포탄과 4000발 이상의 순양함의 6inch 혹은 8inch포탄이 잔존 일본함대의 위에 떨어졌습니다. 니시무라 제독의 기함 아먀시로는 사격 초반에 명중탄을 맞고 순식간에 폭침하였다고 합니다. 제독 또한 그 와중에 불귀의 객이 되었을 터이지요.

수리가오 해협의 마지막 포격전. 오른쪽 빛의 궤적이 보이는 쪽이 포격을 가하는 미국 함대,
왼쪽 밝은 부분이 포격을 당하는 일본 전함 야마시로와 중순양함 모가미입니다.

   그 뒤를 따라서, 시마 제독의 제2유격함대가 또 해협으로 들어섰습니다. 서로간의 별로 안 좋은 사이 - 앞에서 말한대로 전형적인 야전군인인 니시무라 제독과 본부책상근무로 출세한 시마 제독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며, 합동작전을 벌이면 상급자인 시마 제독의 지시를 받을 것으로 생각한 니시무라 제독이 일부러 명령을 무시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고 - 와 함께 일본 대본영의 혼미한 지휘로 인하여 결국은 개별행동을 하게 되어 약간 늦게 들어오게 된 시마 제독의 함대는 이미 해협 입구에서 경순양함 아부구마(阿武 )가 03:25시에 어뢰정의 공격에 행동불능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나머지 함정들을 끌고 해협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들어선 시마 제독의 함대의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그야말로 참담 그 자체였습니다. 중순양함 나지와 아시가라는 28knot의 속력으로 어둠과 포연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해상을 전진하다가 표적이 잡히자마자 어뢰를 발사하며 뱃머리를 돌렸는데, 그 순간 포격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후퇴하고 있던 동료함 모가미를 나지가 들이받아 대파해 버렸습니다. 자신이 없던 시마 제독은 단 5분간만 해협에 머무르다가 예하 구축함들에게 어뢰를 발사하고 반전할 것을 명하고 전장에서 이탈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시마가 한 유일한 일은 니시무라 제독의 함대가 완전히 괴멸되었다는 것을 다른 함대에 전한 것 뿐이었습니다.

이 전투... 하고는 상관없는, 일본 중순양함 나지의 피격장면. 한 달 후의 일로, 여기서 어뢰 9발을 맞고 침몰합니다.

   니시무라 제독의 함대는 레이테 전투에서 가장 처참하게 괴멸되었습니다. 큰 피해를 입은 데에다가 막판에 아군 중순양함에까지 받친 중순양함 모가미는 결국 가라앉고 말았으며, 니시무라 제독의 함대 7척 중에서 살아돌아올 수 있었던 운 좋은 함정은 구축함 시구레(時雨) 단 한 척뿐이었습니다. 시마 제독의 함대에서는 입구에서 어뢰정에 당한 경순양함 아부구마가 결국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반면에 미국 해군의 피해는 구축함 알버트 W. 그랜트(Albert W. Grant)가 양 군의 포화에 끼여 일순간에 27발의 포탄을 맞고 전사24명과 부상96명의 피해를 내면서 행동불능 상태에 빠진 것이 전부였습니다. 훗날 니시무라 제독의 친구는 이 전투에 대하여 '이런 완패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이 현지에서 죽은 것이 차라리 그에게 정말 다행'이었다고 했다고 합니다.

1943년 이후의 독일 해군 - 대서양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분노가 치민 히틀러는 대양함대를 해체하려고 하나, 사임을 하면서까지 막으려는 레더 제독과, 히틀러의 의도를 알고 취임했으면서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여 히틀러에게 반대 의견을 올린 되니츠 제독의 노력으로 모든 대형 수상함이 고철화 + 해안포대화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갈라먹어야 할 잠수함부대의 총사령관인 되니츠 제독이 살리려고 했다면, 그 필요성이야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허나, 미운털이 박힌 이상 과거와 같은 적극적인 활동의 시기는 지나 버렸고, 보급(특히 연료) 문제와 히틀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대형 수상함들은 은거지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독일쪽에서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은 대양함대였지만, 상대인 영국의 평가는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만약 비스마르크와 티르피츠가 노르웨이에 주저앉아만 있었더라도, 우리 해군은 킹 조지 5세급 2척과 넬슨급 2척을 견제용으로 항상 묶어두어야만 했을 것이다." 라고 할 정도로 상당히 높은 전력지수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주저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적에게 위협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위협스런 수상함들을 제거하기 위해 영국은 각고의 노력을 벌입니다. 노르웨이는 종전까지 독일군 점령지역으로 남아있었는데, 대형 수상함들의 존재도 어느 정도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도 싶습니다.

   지금까지 흘러온 대로 대서양 쪽에 배치된 두 척의 대형 수상함 각각의 이야기를 되는대로 쳐 볼까 합니다. 이후 대서양에서의 이야기도 이 정도면 어지간할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하고요.

샤른호르스트의 마지막

   앞의 도버해협 돌파작전에서 기뢰에 의해 2차의 손상을 입은 샤른호르스트는, 손상에 대한 수리는 끝났으나 여전히 발틱해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43년 초 2회에 걸쳐 북대서양 돌파를 시도했지만, 2번 모두 영국군의 공습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밖에 없었고, 3월의 3번째 시도에서야 겨우 악기상을 틈타 북해 돌파에 성공했습니다. 1943년 3월부터는 소련으로의 연합측 전쟁물자 수송이 북극해역을 거쳐 무르만스크로 가지 않고 이미 그들이 장악한 지중해를 거쳐 페르시아만으로 수송되었고, 무르만스크로의 수송이 재개된 것은 1943년 말에 이르러서였습니다. 그래서 1943년 여름동안은 북극해역에서의 호송선단을 덮칠 기회는 그리 없었습니다.

잘나가던 어느 때... 의 샤른호르스트

   1943년 8월 초 스피츠베르겐 섬을 기습한다는 작전이 세워졌습니다. 북부그룹 사령관 쿠메츠 해군중장은 이 섬을 공격하기 위해 구축함 6척을 이용하여 육군병사들을 상륙시키고 티르피츠와 샤른호르스트가 지원에 나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9월 초 히틀러로부터 공격작전의 허가가 내려져, 9월 6일 오후 티르피츠와 샤른호르스트는 은거지를 벗어나, 8일 자정에 스피츠베르겐 섬을 도착하였고, 3시간 후에는 병력들을 태운 구축함들이 에이즈 협만으로 진입했습니다. 작전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9월 9일 오후 모든 작전이 완료되었습니다. 독일군의 상륙당시 스피츠베르겐의 영국군은 독일 함대의 출현을 보고하기는 했으나 이미 대응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어 있었고, 급거 잠수함과 경순양함 밸파스트(Belfast), 구축함 임파서블(Impossible)을 스카파 플로에서 출격시켰지만 독일 함대의 포착에는 실패했습니다.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작전 후 샤른호르스트는 알텐 협만 묘박지로 돌아와 랑그 협만에 주저앉고 다른 함정들은 알텐 협만을 경계했습니다. 그리고...

1943년 2월 아이슬란드에서 호송작전중인 경순양함 밸파스트 - 그냥 사진이 좋아보여서(--)

   1943년 12월 22일 트롬쉐 서쪽 640km 해점에서 독일 항공기가 북쪽으로 향하는 선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호송선단은 상선 17척정도와 유조선 3척으로 구성되어 3~4척의 순양함과 구축함 및 고속 호위함 9척 정도의 호위를 받고 있었는데, 24일 재차 발견되어 소련으로 가는 호송선단임이 확실해지자, 샤른호르스트와 제 4구축함전대의 구축함 5척은 12월 25일 19:00시에, 은거지에서 기어나와 23:00시까지 노르웨이 연안을 빠져나와서 25knot의 속력으로 선단을 추적하였습니다. 계획대로라면 26일 10:00시경에 선단과 접촉할 예정이었으나, 26일 09:21시에 중순양함 '노포크(Norfolk)', 경순양함 '밸파스트'와 '셰필드(Sheffield)'로 구성된 영국 순양함 초계부대를 만납니다. 이들은 레이더로 샤른호르스트를 접촉하고 접근하여 09:24시에 밸파스트가 먼저 포격전을 벌였고, 샤른호르스트는 2발을 얻어맞고, 겨울 북대서양의 악기상에 의해서 09:40시경에 두 집단은 다시 거리가 벌어집니다. 그러나 샤른호르스트의 목적이 호송선단일 것이라고 판단한 영국 초계부대 사령관 '버네트' 해군 중장은 예상되는 항로를 앞질러 12시 직후에 다시 레이더로 발견을 합니다. 버네트 제독은 예하 순양함과 4척의 구축함들로 함포와 어뢰로 과감하게 공격을 하였으나 타격을 주는 대신에 노포크가 2발을 얻어맞고 함미 포대 사용불능, 승조원 다수 사망, 그리고 함의 거의 모든 레이더장비가 박살나는 피해를 입게 됩니다.

여러 번 출연한 영국 중순양함 노포크. 연돌을 보면 아시겠지만, 당시로도 오래된 현역

   영국 초계부대의 방해에 부딪쳐 통상파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게 된 샤른호르스트의 지휘관 '베이' 제독은 여기서 갑자기 중대한 작전상의 판단착오를 일으켰습니다. 더 이상 공격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고 12:40시에 노르웨이를 향해 회항했던 것입니다. 히틀러의 압박 때문에 전함을 온전히 유지하는 것이 당시 독일 해군 작전의 최우선 순위였고 순양함들과의 포화를 나눈 것이 그런 지시를 생각나게 했다고 하지만, 샤른호르스트와 영국 순양함들의 화력을 비교해보면 그다지 겁먹을 이유가 없었는데, 너무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고 보여집니다. 거기에다가, 기왕 회항할 생각이면 추적을 확실히 뿌리쳤어야 했고, 겨울의 북대서양의 난바다의 험한 파도는 방향을 잘 이용하면(그러니까, 파도를 정면으로 받는 방향으로) 대형함 쪽이 저항 문제로 더 빠른 속력을 낼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영국 순양함들의 감시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강력한 영국 전함의 공격을 후에 받게 됩니다. 2차 접촉 이후에 바네트의 초계부대는 노르웨이로 회항하는 샤른호르스트를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계속 추격하는 한편, 연락을 받은 본국 함대 사령장관 '프레이저' 해군 제독은 전함 '듀크 오브 요크(Duke of York - 뒤적뒤적해 본 바에 의하면 번역하면 '요크 공'으로, 보통 영국 왕실에서 임금의 동생을 가르키는 호칭으로 보입니다)'를 출항시켜 샤른호르스트와 맞붙게 합니다.

샤른호르스트 샤낭에 큰 역할을 한 영국 전함 '듀크 오브 요크(Duke of York)'

   듀크 오브 요크는 일몰께인 16:10시에 샤른호르스트를 레이더로 처음 접촉하여, 버네트 제독 휘하 순양함들의 조명탄 사격으로 샤른호르스트의 위치를 파악하고 16:48시 1만1000m 정도의 거리부터 사격을 시작하여, 3발째에 샤른호르스트의 1번 포탑을 잡습니다. 샤른호르스트는 남은 2개의 포탑으로 응사하였는데, 전파탐지를 겁내어 쓰지 않던 레이더가 그나마 악기상으로 인하여 고장이 나서 레이더 조준 사격은 불가능한 상태에서, 어둠 속에서 적함 함포의 발사포연만 가지고 조준을 잡아야 했던 어려운 상태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사격으로 상대를 위협해 왔습니다. 18:20시까지 교전이 계속되었으나 샤른호르스트는 그다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우세한 속도를 이용하여 듀크 오브 요크와의 거리를 벌여 교전에서 빠져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마는, 그대로 놓아보낼 생각이 없는 프레이저 제독은 순양함들로 방해를 하면서, 구축함들을 투입하여 어뢰 공격을 가합니다. 마침 듀크 오브 요크의 14inch포를 엔진실에 얻어맞어 속력이 18knot로 떨어진 샤른호르스트는 이 뇌격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후 듀크 오브 요크와 순양함들의 포격에 녹아나간 샤른호르스트는, 19:40시 경에 5knot의 속력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경순양함 자메이카(Jamica), 밸파스트 그리고 구축함들에게 마지막으로 숱한 어뢰를 맞고 북해 한 가운데에 가라앉습니다. 화려한 전적의 마지막으로, 싸움 중에 적어도 13발의 14inch포 / 12발의 6inch포 / 11발의 어뢰를 얻어맞았으며, 1900여 명의 승조원 가운데 단지 36명만이 구조되었습니다.

샤른호르스트의 마지막 전투...의 상황도

   다음날, 프레이저 제독은 "여러분의 노고에 의하여 강적 샤른호르스트와의 해전은 우리의 승리로 끝이 났다. 훗날 이 중의 어떤 해군 사관이 장차 몇 배나 되는 적과 맞서는 열세한 상황에 빠지더라도 샤른호르스트와 같이 용감하게 함을 지휘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말로 샤른호르스트 사냥에 참가한 장병들의 노고와 상대의 감투정신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샤른호르스트의 이 마지막 전투는, 독일 대형 수상함의 대서양에서의 마지막 작전, 또 대서양에서의 마지막 전함 대 전함의 포격전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었으니 이름값은 한 것이 아니냐... 도 싶습니다마는. 뭐 하튼.

티르피츠의 마지막

   베르겐에서 버티고 있던 티르피츠는 위에서 언급한 9월의 스피츠베르겐 기습시에 샤른호르스트와 같이 지원사격에 나섭니다. 티르피츠는 이 때 유일하게 주포 사격을 해 보았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작전 후 티르피츠는 알텐 협만 묘박지로 돌아와 카아 협만에 투묘하고 대잠방어를 위해 티르피츠 호 주위에는 어떠한 적의 잠수함도 접근이 불가하도록 함정이 드나들 때만 열고 닫는 문이 열려있는 어뢰그물 상자를 둘러치고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잘나가던 어느 때... 의 티르피츠

   영국군은 이곳에 정박한 티르피츠를 없앨 궁리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인간어뢰를 참고로 만든 'X정'이라는 소형 잠항정이었지요. X정은 배수량 30t, 4인승으로 협만 부근까지는 잠수함에 예인되어 항해하여 잠수함 방어망을 돌파하여 5km를 항해하여 티르피츠의 바닥에 시한기뢰를 설치하여 격침시킨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침투시기는 춘분이나 추분 전후가 가장 적기로 고려되고 있었는데, 최초 계획으로는 모두 6척이 있으므로 독일 주력함 3척을 모두 공격한다는 계획하에 9월 10일 6척이 모두 출항했는데, 도중에 고장과 사고로 9명이 행방불명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공격에 나선 것은 모두 3척뿐이었고, 그러는 동안 포켓전함 뤼초우는 독일로 귀환하였고 샤른호르스트는 랑그 협만으로 가 버려, 이들 3척은 모두 티르피츠 공격에 전력을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알텐 협만의 입구에서 수상주행으로 항해하다가 이어 잠항하여 티르피츠의 함저에 기뢰를 설치하여 08:30분에 폭파시킨다는 계획이었습니다. 9월 22일 0905시, 티르피츠의 승무원이 대잠방어망의 안쪽에 소형 잠수함으로 보이는 물체를 목격하였고, 고사포장은 수류탄을 싣고 어뢰정으로 조사에 나섰습니다. 이를 피해 다시 잠항한 X정들 가운데 먼저 티르피츠의 1번포탑 부분에 북상한 것은 X6이었는데, 이를 발견한 독일군이 X6에 사격을 가해 승무원들은 포로가 되고 이미 설치한 폭약은 독일군에 의해 제거되어버렸습니다. 이러는 동안 다시 일을 끝낸 X7호가 부상하여 이를 발견한 티르피츠의 20mm와 30mm기관포 사격이 있었지만, 1012시에 대폭발을 일으켜 발전기와 주포 사격통제장치등이 파괴되고 함의 모든 조명이 꺼져 버렸습니다. 이 피해는 현지 수리 가능 능력을 초과한 것으로 티르피츠에게는 크나큰 타격이 되었지요. 독일군의 반격으로 X7호는 격침되고 X5호도 발견되어 결국 격침되었지만, 티르피츠는 대양작전을 할 수 없는 정도의 피해를 입었으므로 일단 영국군의 작전은 성공한 셈이라고 해야 겠지요.

석양때를 배경으로 하여... 조용히 숨어-_-있는 티르피츠

   독일군 기술자들의 필사적인 복구 노력으로 1944년 3월경 드디어 티르피츠는 다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영국군은 이를 탐지하고, 소련으로 향하는 JW-58B선단의 출항을 앞두고 만에 하나 티르피츠가 출격할 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다시 티르피츠를 공격할 계획을 세워 1944년 4월 3일 '텅스텐'작전을 발동시켰습니다. 바라큐더 함상 공격기들과 전투기 약간을 실은 항모 '빅토리어스(Victorious)'와 '퓨리어스(Furiois)'를 주력으로 호위항모 4척을 더 동원하여 티르피츠 공격에 나섰습니다. 4월 3일 이른 아침, 영국군 항모기동부대는 카 협만 220km정도 지점에 접근하여 공격기 40대와 호위기 40대를 발진하고 폭격대 제 2파도 같은 규모로 발진하였습니다. 우선 전투기들이 티르피츠의 사격통제장치를 파괴하기 위해 기총소사를 가하였고 뒤이어 바라큐더 공격기들이 800kg철갑폭탄, 250kg철갑폭탄, 대잠용 고폭탄등을 집중투하했습니다. 티르피츠는 연막을 치고 산발적인 대공포화로 폭격을 방해했지만 제1파 공격으로 9발의 폭탄을 얻어맞은 다음에 1시간 뒤 벌어진 제2파의 공격에서는 5발의 명중탄을 더 얻어맞고, 승무원 128명이 전사하고 함의 수리에 3개월 이상의 견적이 나왔습니다. 그나마 영국군이 투하한 철갑폭탄은 저공공격으로 충분한 가속도를 얻지 못하여 티르피츠는 더 큰 피해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 피해를 어느 정도 복구하자 영국군은 다시 티르피츠 사냥에 나서, 7월 19일 바라큐더 공격기 44대와 전투가 48대가 출격하여 공격했지만 이 시기는 독일군의 조기경계망이 강화되어있어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영국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8월 22~29일에 걸쳐 정규항모 '포미더블(Formidable)', 퓨리어스, '인디패티거블(Indifatigable)' 3척과 경항모 2척을 동원하여 계 4회 연 242대를 투입하여 폭격을 가했으나 이 작전 역시 전혀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11대의 공격기만 상실하고 밀았습니다.

영국 해군의 공습에 다구리... 당하고 있는 티르피츠

   이처럼 해군항공대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국군은 해군 함재기들이 탑재한 폭탄의 위력으로는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으므로,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폭격기를 동원하여 보다 강력한 타격을 가해야 하겠다는 생각 아래에 '톨 보이(Tall Boy)'라고 하는 6t(*_*)폭탄을 탑재한 영국공군 4발 중폭격기인 '랭카스터(Lancaster)'를 이용하여 공격한다는 방침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티르피츠가 웅크리고 있는 카아 협만은 영국에서 발진하는 폭격기의 행동반경 밖이었으므로 다른 출격방법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영국공군은 노르웨이에 인접한 소련의 비행장을 이용하는 방안을 생각해냈고, 9월 10일 영국으로부터 랭카스터 폭격기 36대가 발진하여 6대가 중도귀환하고 30대가 아르항게리스크에 착륙했습니다. 이들은 9월 15일에 출격하여 톨 보이 폭탄과 200kg기뢰폭탄을 퍼부었지만 명중한 것은 톨 보이 폭탄 달랑 1발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폭탄 자체가 워낙 위력이 커서 티르피츠의 앞부분 갑판이 대파되고 10m * 16m의 구멍이 뚫려 1000t 이상의 해수가 침수되었고 그 진동으로 엔진이 손상되어 행동태세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티르피츠의 전술적 가치는 없어졌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였지만 영국군은 티르피츠를 완전히 격침시키지는 못하였다고 하여 긴장을 풀지 않았습니다.

공습을 피해 은둔... 하고 있는 티르피츠

   독일군은 행동불능이 된 티르피츠를 노르웨이 북부의 해안포대로서 사용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이를 위해 함수를 응급수리하고 폭격당해도 격침될 염려가 적은 수심이 낮은 적당한 곳으로 이동시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고정포대로 이용하기 위해 이동하여 자리를 잡은 사실은 현지 저항군에게 즉각 탐지되어 위치가 영국군에게 보고되었습니다. 영국공군은 소련에서 즉각 랭카스트 폭격기들을 발진시켰고, 현지개수를 통해 기내에 보조연료탱크를 장비한 랭카스터 폭격기들은 10월 29일 19대가 출격했습니다. 이 공습에서는 별다른 전과 없이 1대가 스웨덴에 불시착했습니다. 그로부터 날씨가 좋아질 때를 기다린 영국공군은 11월 12일 다시 폭격에 나섰습니다. 랭카스터 폭격기의 공습에 맞서 티르피츠는 모든 대공포화를 동원하여 사격했지만, 이번에는 1발의 톨 보이 폭탄이 좌현 사출기 부근에 명중, 기관실까지 돌입하여 함의 밐바닥에서 폭발했습니다. 곧이어 후부 좌현 거리측정기 부분에도 명중탄이 폭발했고 함체 주변에도 4발의 폭탄이 떨어져 선체를 크게 흔들었습니다. 공습이 계속되는 동안 화재를 일으킨 티르피츠는 4번포탑에서 불길을 일으키더니 탄약고가 폭발, 선체가 35도 이상 기울어지고, 계속해서 함체가 60도 이상 기울어졌을 무렵 3번포탑에서도 대폭발이 일어나, 그 동안 끈질기게 버티었던 티르피츠도 폭격 11분만에 기이어 전복하여, 함체가 뒤집히고 맙니다. 당시 함내에는 많은 장병들이 있었지만 함께 선내에 갖혀 거의 대부분 사망하고 말아버리지요. 침몰한 티르피츠의 잔해는 대전이 끝난 뒤에 독일과 노르웨이의 회사에 의해 1948년부터 1957년에 걸쳐 해체되었습니다.

랭카스터들의 폭탄을 맞고 결국 뒤집어져버린 티르피츠

   기회 있을 때마다 이 전함의 파괴를 강조해왔던 처칠은 루즈벨트에게 "우리가 항상 보내기를 원하던 곳으로 이 괴물을 보내게 되어 이제 안심이 됩니다." 라는 전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대서양에서의 독일 해군 수상함의 활약은 이렇게 종지부를 찍습니다. 이 북대서양의 호송선단을 둘러싼 전투에 대해 당시 여러 번 선단 지휘임무를 맡았던 노련한 군인이었던 '도널드 맥킨타이어' 대령은 훗날 당시를 회상하여, "만약 피아가 뒤바뀌었더라면, 우리는 적의 호송선단을 한 척도 빠져나갈 수 없게 할 수 있었다." 하였다고 합니다. 굳이 이 언급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독일 해군은 북대서양 항로에서 전함 2척을 비롯한 충분히 호송선단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전력을 가지고, 초반에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바다를 잘 아는 강적 영국 해군과, 대형 수상함 피해에 지나친 두려움을 보이며 적극적인 전투행동을 금지한 히틀러라는 또 하나의 강력한 내부의 적에게 포위를 당하여 기대 이하의 전과를 보여주었다고 하면... 될 듯 싶습니다.

과달카날 전투(Battle of Guadal Canal) 둘째 날 - 원맨쇼

과달카날 해전 2일째 - 원맨쇼

   이러한 보고를 접한 핼지 제독은 '킹게이트(Kingate)' 제독의 항모 엔터프라이즈를 중심으로 한 기동부대와 리 제독의 전함 2척이 주축을 이룬 포격부대에게 과달카날 구역을 향해 전속으로 전진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런데 뉴 칼레도니아에서 사크리스토발, 산타크루즈 및 에스투리산토를 연결하는 해역 주변에 일본 잠수함이 출현하여 미국 수상함을 노린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일본 잠수함을 목격한 함대는 지그재그 항로를 취하며 전진하여 목적지로의 접근이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특별출연(--) 미국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Enterprise)'
2차대전 최대의 활약을 보이고 살아남은 미국 항공모합입죠

   핼지 제독 예하의 부대들이 북진을 계속하는 동안, 다나까 해군소장이 이끄는 수송선단을 지원하게 될 '미까와' 해군중장은 순양함대를 인솔하여 쇼틀랜드를 떠나 초이셀과 산타이셀의 북방을 돌아 과달카날을 향해 전진했습니다. 그는 중순양함 '마야(Maya)', '스즈야', 경순양함 '덴류' 및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진 '니시무라' 해군소장의 포격부대에게 룽가 갑에 도달하여 핸더슨 비행장을 8inch 소이탄으로 폭격할 것을 명령하고 14일 02:00시가 지날 무렵 사보 북방에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공습권 바깥으로 빠져나왔습니다. 니시무라 제독의 소이탄 포격은 핸더슨 비행장에 모여있던 모든 폭격기 18대를 파괴하고 32대를 손상시켰으나, 8inch에 불과하여 지난 10월 13일 '구리다' 해군중장의 전함 '공고(Kongo)'와 '하루나(Haruna)'의 14inch포 사격보다는 성과가 좋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핸더슨 비행장의 남은 비행기들은 일출과 함께 작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일본 중순양함 '마야(Maya)', 어디서 들어보았다고 하시면설라무네..

   날이 밝자 핸더슨 기지의 육상기와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의 공중추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급보를 입수한 엔터프라이즈는 아직도 과달카날 남서 320km 밖에 있었으나, 일찍 색적기를 내보내며 출격을 서둘렀습니다. 이들은 14일 07시가 조금 지날 무렵 피퇴중이던 '미카와' 해군중장의 순양함대와 쇼틀랜드를 떠나 과들카날을 향해 곧장 전진중인 다나까 해군소장의 선단을 발견했습니다. 미카와 제독의 일본 제8함대는 08:00시 이후 5번에 걸쳐 미군 비행기의 공습을 받았는데, 10:15시 경의 마지막 공습을 치루고 보니 중순양함 '기누가사'가 격침되었고 다른 중순양함 2척과 경순양함 1척 및 구축함 1척이 각각 손상을 입었습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산타이사벨과 뉴 조지아 사이의 중간 수도를 밀고 내려오던 다나까 제독은, 과달카날 제4차 총공격을 수행할 결전병력 및 물자를 실은 11척의 수송선단과 11척의 구축함부대를 이끌고 전투기대에 의한 공중엄호를 받으며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멀리 에스피리산투에서 날아온 B-17기 15대를 비롯한 핸더슨 기지의 폭격대 18대, 그리고 엔터프라이즈의 뇌격기 12대로부터 여러 시간에 걸쳐 공습을 받았습니다. 다나까 제독은 하나하나 격침되는 선단을 때문에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그만 두고 회항할까 고려하다가 끝내 항진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하여 16:00시 경 공습이 끝나자 11척의 수송선 중 살아남은 4척과 구축함 11척을 지휘하여 미군기가 사라진 야음을 틈타 다음날 새벽에 에스페란스 해변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핸더슨 기지에서 이내 날아온 미군기의 공습으로 나머지 4척에 실려있던 보급품마저 선박과 함께 모두 날아갑니다.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루는 동안 일본군은 겨우 미군기 몇 대를 격추시켰을 뿐이었습니다.

대활약, 하는 미국 전함 '워싱턴(Washington)'

   야마모토 연함함대 사령장관을 대신하여 이 지역의 해상부대를 총지휘하고 있던 제 2함대 사령관 '곤도' 해군중장은 기함 중순양함 '아타고'에 좌승하여 11월 12일 밤 핸더슨 기지 포격에 실패하고 돌아온 아베 부대를 중도에서 수용하여 전함 기리시마, 순양함 4척 및 구축함 11척으로 다시 과달카날로 진격해 갔습니다. 아베 제독이 성공하지 못한 핸더슨 기지의 포격을 재차 수행할 계획이었습니다. 일본군의 포격을 저지하고 역습하기 위해 급파된 제64기동부대를 인솔한 리 해군중장이 전함 2척과 구축함 '왈케(Walke)', '벤함(Benham)', '프레스톤(Preston)', '그윈(Gwin)' 4척을 끌고 11월 14을 늦게 과달카날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함대는 아직까지 한 번도 합동훈련을 해 본적이 없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리 해군소장은 전술적 편성 기동을 요구하지 않고 구축함 4척과 전함 워싱턴, 사우스다코다의 순으로 단종진을 편성하여 처음의 사보 섬의 서쪽을 돌아 아이언-보톰 사운드로 들어섰습니다. 21:48시 150도 침로로 남동남진하다가 과달카날 섬을 멀리 보면서 22:52시 서쪽으로 변침하였습니다. 리 제독의 부대가 레이더로 적을 탐지한 것은 그 몇 분 후였습니다. 한편 곤도 제독은 함대를 셋으로 나누어 경계부대 1진은 하시모도 해군소장의 인솔아래 경순양함 센다이 및 구축함 3척으로 편성하여 사보 북쪽으로부터 아이언보톰 사운드로 들어가게 하였고, 기무라 해군소장이 이끄는 제2진은 경순양함 나가라와 구축함 6척으로 편성, 사보 서쪽으로부터 진입하게 하였으며 바로 그 뒤를 좇아 곤도제독의 기함인 중순양함 아타고, 다까오 및 전함 기리시마가 항진하였습니다. 리 제독이 최초로 레이더로 발견한 것은 하시모도 해군소장의 기함인 센다이었습니다.

이야기 주역 중 하나, 일본 전함 '키리시마(Kirishima)'

   워싱턴의 조준경에 센다이의 모습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23:12분, 그로부터 15분 후에 워싱턴은 1만8500yard 거리에서 센다이에게 16inch 함포의 사격을 시작하였고, 1분 후에 사우스다코다도 사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접촉과 개전의 보고를 센다이릉 통해 입수한 곤도 제독은 처음에 미국 순양함 2척과 구축함 4척 정도로 생각하고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치울 것으로 자신하여, 곤도 제독이 직접 지휘하는 대형함들은 사보 섬 저편에서 그대로 행동하면서 하시모도와 기무라 두 제독이 지휘하는 경순양함과 구축함들이 먼저 돌진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리 제독 휘하의 구축함 4척은 어둠 속에 나타난 일본 구축함들과 포화를 주고 받았는데, 23:33시에 사우스다코다가 돌연 전기계통 고장으로 레이다를 비롯, 전기를 사용하는 전투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때쯤 일본 구축함 2척이 사정에 이르러 어뢰를 발사했으나 어느 것도 명중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 미국 구축함들은 전투 와중에서 모든 구경의 포를 뒤집어 썼고, 4척 중 왈케와 프레스톤은 침몰하고, 벤함은 선수에, 그윈은 선미에 큰 피해를 입어 전열에서 이탈하여, 23:35시까지 미국 구축함 4척 모두가 전열에서 이탈했습니다. 일본은 구축함 '아야나미'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습니다. 사우스다코다는 야전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기함 워싱턴과 헤어져 기동하던 중에, 곤도 제독의 전함과 중순양함 2척과 격전을 벌이게 되었고, 결국 사우스다코다는 곤도와 기무라 두 제독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인해 적어도 42발의 포탄을 맞고 통신 레이더, 수상 레이더, 3개의 화력제어 레이더, 탑재 수상기와 함상 구조물에 피해를 입고 전장에서 이탈하였습니다.

미국 전함 '워싱턴(Washington)'의 야간사격장면

   이제 전투가 가능한 리 제독의 함정은 달랑 전함 워싱턴 혼자, 제독은 그러나 굴하지 않고 홀로 싸울 결의를 하였습니다. 야습과 혼전 속에 일본 함대가 발사한 조명탄으로 전함 기리시마의 위치를 확인한 워싱턴은 24:00시를 기하여 모든 함포 사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두 함의 거리는 겨우 8400yard였으며, 2차대전 태평양 전쟁 처음으로 벌어진 전함 대 전함의 전투(--)였습니다. 1만2650yard로 거리가 벌어지는 7분동안 레이더 조준 아래에 워싱턴이 발사한 16inch 포탄 75발중 9발, 5inch포탄 107발중 40발이 기리시마의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기리시마는 전투력을 상실하고 화재와 더불어 타력마저 잃어 버린 채 함체를 움직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워싱턴의 레이더와 함포는 중순양함 아타고와 다까오를 향하였고,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게 된 곤도 제독은 휘하 함대를 규합하여 북방으로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날 밤 일본함대는 34발의 어뢰를 발사하였으나 모두 불발을 기록하였습니다. 폭발과 화염속에 총원을 퇴함시킨 기리시마는 11월 15일 03:20시 자매함 히에이가 어제 침몰했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가라앉았습니다. 구축함 아야나미도 되돌아가지 못하고 아침 경에 침몰하였습니다. 미국 구축함 벤함은 철수 중에 포기되어 동료함 그윈의 함포사격을 받고 침몰하였으며, 전투 후 일본군의 어뢰공격을 무사히 피한 워싱턴은 아침나절에 사우스타코다와 구축함과 합류합니다.

과달카날 해전 2 Round의 상황도..

  이번 전투는 거의 워싱턴 혼자서 결판을 지은 전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가장 Best한 전함 Action중의 하나... 겠지요.

짧은 마무리

   과달카날 해전은 전쟁에 있어서 하나의 분기가 되는 전투였습니다. 4차 공격에 실패한 일본군은 결국 공세를 포기하고 다음 해 2월까지 기존에 과달카날에 있던 병력들을 철수시킵니다. 이 전투를 기준으로 하여 전쟁의 주도권은 이제 미국에게 넘어가고, 일본은 계속 밀려가면서 종국에는 본토마저 쑥밭이 되어 버리게 되지요. 또한, 과달카날 해전과 비슷한 시기에 북아프리카에서는 독일 롬멜의 부대가 엘 알라메인에서, 독일 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괴멸되고, 태평양에서도 파푸아 등지에서도 연합군의 반공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칠은 이 때를 "The Beginning of the end"라는 표현으로 말하였다고 합니다.

5.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출격

   이쪽 이야기의 절정부가 될 듯 싶습니다.
앞의 겨울 통상파괴작전에서 괜찮은 수확을 거둔 독일 해군에게, 더 무서운 신무기, '비스마르크'의 출격이 가까워왔습니다.

엘베강을 시험수상항주하는 비스마르크의 모습

비스마르크급의 제원

   어차피 현재 바다를 떠 다니지는 않으나, 무적전함이라는 수식어는 어울리지는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마는. 그래도, 주섬주섬 주워들은 비스마르크에 대한 평가들을 조금 자세히 풀어 본다면... 함은 '블룸+보스(한국의 KD-1구축함의 토대가 된 독일의 유명한 수출품-_-인 메코급 프리깃의 제작사입니다)' 사에서 건조하여 1939년 2월 14일 일단 진수되었습니다.

비스마르크의 진수 모습

   참조한 설계의 기본은 1차대전 전에 건조되었던 '바이에른'급(2만8530t, 38cm * 8문)전함이 설계의 기본이 되었다 합니다. 함의 무게에서 장갑이 차지하는 비율은 40%정도(동시대의 보통 전함들은 30%정도)이고, 장갑 재질도 일반강판 대신 전차 제조용으로 쓰이는 압연강판을 사용하였다고 하며, 당시 독일의 야금술은 일급이었기 때문에, 방어력은 장담해도 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대신에 설계상 문제로, 상부갑판이나 포탑의 상면 장갑은 빈약한 편이어서, 원거리에서 날아오는 포물선을 그리는 포탄이라든지, 폭격기의 급강하공격에는 약점을 보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지만, 실전에서는 별로 나타나지는 않더라는). 함체의 접합부는 90%가 경량화에 유리한 용접공법으로 제작되었습니다(뭐, 무슨 의미인지들 아시겠-_-죠). 피해 관리 문제는, 경험의 문제이기 때문에, (함을 많이 부수어-_- 본) 영국군의 전함들보다는 아무래도 열세가 아니었을까 보여집니다(저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게 미군과 구일본군과의 해전들이지요).

비스마르크의 건조중 모습

   방어력에 중점을 두어 그런지, 화력(47구경 38cm * 8문)은 영국의 전함들하고 비교해보면, 배수량에 비해서는 작은 크기의 포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차대전부터 이어지는 방어력 중시의 독일 전통이랄까나요(맞나--). 그 대신 장전시간은 좀 더 빠르다는 반대급부를 얻을 수는 있었습니다마는. 0.8t의 포탄을 35km까지 날려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성능을 가졌습니다. 포신 또한 경량화시켜, 무게에 따른 처짐을 줄여 정확도를 높이는 데 신경을 썼습니다. 당시 독일의 레이더 기술은 열세였기 때문에 - Battle of Britain을 보시면 알 터 - 3만여t급 전함을 25km정도의 거리 (적 전함의 사거리 안쪽-_-) 에서 식별할 수 있는, 정도의 레이더를 달고 있었습니다. 대신 지금도 고급 카메라의 렌즈에 쓰이는 칼 자이츠 사의 스테레오식 광학 거리 측정기 - 실제 주포 사격시에 쓰이는 - 는 일급의 정확도를 자랑하였지요. 출력은 당시 독일은 고압기관 쪽에서도 일급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12개의 60기압 고압 증기터빈기관으로 (계획상) 13만8천hp의 출력을 내어 3축 구동으로 30.1knot의 최대속력을 낼 수 있었습니다.

비스마르크의 추진부와 조타부, 사람과 비교해 보시라-_-구

   좀 이야기가 길었는데(--)... 일단 기본 사양에서 보면, 1:1로 이 전함과 싸워 배겨 날 영국 전함은 없는 상태였습니다. 영국해군에게는 비상사태이지요. 독일 또한 이런 평가를 내려 그런지, 출격시에 비스마르크는 처음으로 영국 수상함에 대해 선제 공격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게 됩니다. 전함은 1940년 8월 2일 정식 취역했으며, 포술학교장을 역임한 '에른스트 린데만' 대령이 비스마르크의 첫 함장으로 임명됩니다.

승조원들을 사열하고 있는 함장 에른스트 린데만

라인연습 개시

   비스마르크의 완성을 기해서, 독일 해군은 1941년 3월, '라인연습'이라는 이름의 작전을 세웁니다. '킬(Kiel)'에서 전함 비스마르크와 새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이 출항하고, '브레스트(Brest)'에서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Scharnhorst)'와 '그나이제나우(Gneisenau)'가 출항하여 영국의 호송선단을 때려잡고 다니면, 영국군은 이들 강력한 4척의 수상함에 맞서야 할 것이고, 그를 위하여 선단을 포기하는 경우에는 U-Boot들이 좀 더 쉽게 통상파괴전을 벌일 수 있다는 복선도 깔고 있는.. 나름대로 독일 해군 최고의 날을 상상할 만한 작전이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샤른호르스트가 기관부를 수리해야 하기 때문에 당분간은 출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고, 거기에다가, 그나이제나우마저, 4월 6일, 몰래 감시망을 뚫고 빠져나가려다 영국 공군에 걸려서 어뢰를 얻어맞고, 간신히 회항하여 견적을 내보니 스크류 축과 엔진실 2군데의 침수로, 6개월 전투불능이라는 수치가 나왔으니, 이 또한 작전 참가불능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소식을 들은 작전 지휘자 '귄터 뤼첸스' 제독은 작전의 연기를 건의하나, 레더 제독은 가능한 2척만으로 라인연습의 개시를 명합니다. '1941년 6월 22일의 소련침공계획' 이라는 이야기를 들으시면, 바로, 히틀러의 관심이 육군에게 주의가 돌아갈 터이니, 그 전에 한 건 올려야... 하는 의도에서라고 짐작하셨을 겁니다.

고텐하펜에서의 출격직전, 프린츠 오이겐쪽에서 본 비스마르크의 모습

   일단 두 척만으로 작전을 수행하기로 결정하고 1941년 4월 25일 출격명령이 내려지나, 프린츠 오이겐이 기뢰를 건드려 수리를 위해 얼마간 지체가 된 후에, 5월 18일 02시에 두 척의 수상함은 덴마크의 고텐하펜을 나섭니다. 노르웨이의 베르겐으로 들어간 두 함정은 5월 21일 밤에 영국군이 안 보는 틈을 타서 북대서양으로 진출합니다. 5월 22일, 나르빅에 있던 두 수상함정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영국해군은 '홀랜드' 제독 아래의 순양전함 '후드(Hood)',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Prince of Wales, 왕위계승 1순위 영국 황태자의 별칭이라든가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조지 5세의 큰아들이었던, 미국 이혼녀와 눈이 맞아 바람난 그 에드워드 6세인가나)'와 6척의 구축함을 일단 내 보냈으며, 전함 '로드니(Rodney)'와 4척의 구축함에게 덴마크-영국 사이를 경계하도록 지시하였으며 영국 해군 함대 사령관 '토베이' 제독 스스로 또 기함 '킹 조지 5세(King Geroge V)'와 항공모함 '빅토리어스(Victories)'와 순양함 4척, 구축함 7척을 끌고 본거지 '스카파 플로(Scafa Flow)'를 나섰고, 그 다음날 순양전함 '리펄스(Repulse)'를 전열에 합류시켰지요.

당시 영국의 자랑이었던 순양전함 '아드미랄' 후드. 비스마르크와 비슷한 제원

   영국 해군은 본토-아이슬랜드-그린랜드에 걸쳐 초계망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아이슬랜드-그린랜드 사이를 초계하던 '웨이크 워커' 제독의 두 척의 중순양함 '노포크(Norfolk)'와 '서포크(Suffolk)'는, 안개가 짙은 악천후 속에서 순찰을 하다가 13km거리에서 갑자기 덜컥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만나게 됩니다. 38cm 포탄을 뒤집어 쓰면서 연막을 치고 사정에서 벗어난 두 중순양함은 신형 레이더를 사용하여 뒤를 졸졸 추적하면서 본부에 '비스마르크를 발견했어' 라고(였는지는--) 무전을 때립니다. 비스마르크는 대서양 진출이 목적이기 때문에 두 영국 중순양함들을 굳이 쫓아가서 아작내지 않고 전진했습니다. 연락을 받은 영국 함대중에서 홀랜드 제독 쪽이 가장 빨리 차단이 가능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1번타자로 비스마르크를 상대하기 위해 나서게 되었습니다. 홀랜드 제독의 두 대형 수상함 중 순양전함 후드는 크기(4만1200t)와 무장제원(15inch * 8문)으로는 비스마르크에 필적할 거함이었으나, 1920년에 건조된, 1936년에 개장공사를 받기는 했지만, 비스마르크에 비하면 구식 수상함이었고.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3만6727t, 14inch * 10문)는 너무 신형이었던 나머지, 조선소의 기사를 태워 아직 작동이 미비한 부분을 손봐야 하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주포 사격을 하고 있는 비스마르크의 모습. 막대한 포연-_-이 인상적이라고 하면.

거인들의 충돌(Clash of Titans - 영문서적들에 이런 표현이 많이 나오고, 어감이 좋게 들리더라-_-는)

   1941년 5월 23일 0430시, 독일과 영국의 전함들이 접촉을 하게 되었습니다. 0552시에 2만3천m정도의 거리를 두고 영국 함대가 독일 함대에 다가가는 침로에서 먼저 함의 앞 부분의 포문을 열고, 독일 함대는 그냥 진행 방향에서 조금 늦게 응사를 시작했습니다. 초반 영국 함대의 포격은 실루엣을 착각하여 비스마르크 대신 프린츠 오이겐에게 떨어지고, 얼마 후에 목표를 잘못 고른 것을 알게 된 영국 함대는 다시 목표를 수정합니다. 정면을 독일함대에게 향하고 있던 후드는 뒤의 15inch 주포 4문도 쓸 생각으로 20도정도 방향을 꺾는데, 이 때 프린츠 오이겐의 20cm포의 일제사격에 중앙부 탄약고 엘리베이터를 얻어맞아 화재가 난 얼마 후에, 비스마르크의 5번째 일제사격에 탄약고를 명중당하게 되고, 바로 탄약고 유폭을 일으킨 후드는 폭발로 선체가 두 동강이 나며 전투 개시 8분만에 순식간에 바다에 가라앉습니다. 승무원 1419명 중에서 억세게 운 좋은 3명을 빼고는 나머지 인원 모두 함과 운명을 같이 하...였겠죠. 1차 대전 유틀란트 해전때 겪었던 피셔식 순양전함의 허약한 방호력의 망령의 재현이랄까요... 30년대 개장공사를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어쩌면 비스마르크의 위력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 살아남은 3명이랍니다... oops... 무서운 인터넷-_-

   하튼간에, 전투의 주도권은 이제 독일 해군으로 넘어왔습니다. 후드의 잔해를 피해 회전하던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운 나쁘게도 거리를 잡은 독일측의 화망에 들어가 1만6천m정도까지 좁혀지는 동안 여러 발의 명중탄을 맞고 함교의 인원이(함장과 다른 1명만 살아남고) 몰살당하고 크레인과 발전기등이 파괴되고 수선 아래에 구멍이 뚫려버리며 10문의 주포중 3문만 가능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고 연막을 피우며 사력을 다해 도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피해는 비스마르크가 2발을 얻어맞은 - 연료탱크에 한 발을 얻어맞아 연료가 누설되는 - 정도의 피해가 있었고, 프린츠 오이겐은 1발도 당하지 않았습니다.

같이 활동한 신형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
웬지 여기서의 활동으로 전함스런-_- 취급을 받는다 싶기도.

   1라운드는 이렇게 끝나고, 독일 함대는 남쪽으로 나아갔으며, 프린츠 오이겐은 도중에 비스마르크와 떨어 단독행동에 들어갑니다. 타격을 입은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결전을 지켜 본 영국 중순양함 2척은 비스마르크의 뒤를 다시 졸졸 쫓아가기 시작하였고, 비보를 들은 토베이 제독은 호송선단을 호위하고 있던 전함 '리벤지(Revenge)'와 핼리펙스의 전함 '레밀라이즈(Ramillies)'에게 즉각 추격전에 합류할 것을 명하고, 지브롤터 근처의 H부대의 순양전함 '리나운(Renown)', 항공모함 '아크 로열(Ark Royal)', 중순양함 '쉐필드(Sheffield)' 등에게도 북상명령을 내립니다. 5월 24일 2200시경에 비스마르크는 항모 빅토리어스에서 출격한 '새치(Sword Fish)' 뇌격대의 공격을 받게 되나, 투사된 어뢰는 비스마르크의 선체 가장 중앙에 명중하여 타격을 주지는 못하였더랍니다.

항공모함 빅토리어스에서 출동 준비중인 '소드피쉬' 뇌격기.
보기에는 시대에 뒤진 구식 복엽기이나,
이전의 타란토 항 공습과,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기종입니다.

특히 DC판 대전략에서, 항모발착가능, 활주로 있기만 하면 발착가능(쌍발기라서),
뇌장폭장가능, 야간공격-_-가능 등의 막강한 능력을 보유한-_-기종이라서 - 그런데 상대편 - 더더욱

   5월 25일 0400시경에 추적하던 서머빌 제독의 영국 함대는 U-Boot 작전지역으로 들어간 비스마르크를 지그재그 항적을 그리며 따라가다 놓쳐버립니다. 이를 모르는 뤼첸스 제독은 그 직후에 후드를 수장시킨 비스마르크의 전과를 30분에 걸쳐 무선통신으로 보고하는 엄한 짓을 저지르지만... 그 상대인 영국 또한 다시 파악한 비스마르크의 위치를 해도에 잘못 기입하여... 하튼 영국 해군은 25일에 비스마르크의 행로를 놓쳐버립니다.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상황

다시 발견된 비스마르크, 그리고...

   추격 5일째인 5월 26일, 며칠간의 추적 끝에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스는 연료 부족으로 회항하고, 나머지 수상함들의 연료가 달랑달랑한 데에다 기상상태도 좋지 않은 상태라서, 영국 해군성은 이제는 추격을 포기해야 하나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1030시 영국 해안 경비대의 '카탈리나 비행정에게서 '북위 49도 33분, 서경 21도 50분에 방향 150도, 시속 20knot로 항진하는 전함 1척 발견'이라는 메시지가 날아왔습니다. 작전 상황에 의하면 그 지점에서 활동하는 영국 전함은 없었습니다. 비스마르크를 다시 포착한 것이었지요. 발견 장소는 프랑스 해안에서 1270km정도 떨어진, 24시간 내에 독일 공군의 제공권 내에 도달할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비행정은 15분 후에 연락이 두절되어 버리지만, 항모 아크 로열에서 출격한 2대의 함재기가 곧 다시 비스마르크를 발견합니다.

비스마르크를 다시 발견한 카탈리나 비행정
'시계대신 달력을 보고 작전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느릿느릿한 기종이지만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대전중 해상정찰, 인명구조와 야간기습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주력전투기보다는 웬지 이런 보조역할의 기종들이 웬지 더-_-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전함이라면 H부대의 순양전함 리나운(3만1천t, 15inch * 6문)이겠지만, 이 정도의 전투력으로 1:1로 덤볐다가는 후드 꼴 나기 따악 알맞기 때문에, 토베이 제독의 주력전함들이 추격하는 동안에, 항모 아크 로열의 뇌격대가 발을 묶어놓을 임무를 띄고 출격했습니다. 1차 공격대는 정면에 수상함을 발견하고 멋지게 뇌격을 때렸는데... 그 함정은 먼저 앞서나간 아군 중순양함 쉐필드였습니다. 쉐필드의 민첩한 회피기동으로 동료를 수장시키는 오명은 피할 수 있었고, 2차 뇌격대는 아예 쉐필드의 상공으로 날아간 다음, 여기서 방향을 고쳐잡아 비스마르크가 있는 곳으로 가도록 하였습니다. 2차 뇌격대는 제대로 비스마르크를 찾아 뇌격을 하여 2발의 어뢰를 명중시키는데, 그 중 1발이 회피기동중인 비스마르크의 후미를 때려 추진부를 날려버리는... 비스마르크로서는 최악의 결정타를 맞아버립니다. 속도도 떨어지고 함은 10여도 정도 기울어졌으며, 결정적으로 조타기는 회피행동중에 서북방향 - 영국 주력부대가 비스마르크를 잡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오는 방향으로 고정되어버립니다.

비스마르크 사냥에 큰 역할을 한 서머빌 제독의 H함대.
앞이 순양전함 리나운, 항모 아크로열입니다.

   마지막에 몰렸다는 것을 안 뤼첸스 중장은 "함은 조종 불능이나 최후의 한발까지 싸울 것임. 총통만세!"라는 전문을 본국에 송신하고, 보고를 받은 독일 해군 수뇌부 또한 비스마르크를 구하기 위하여 근처의 모든 U-Boot를 집결시키는 등의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하필 근처의 U-Boot들은 이미 어뢰들을 다 써 버려서 집결하는 영국 수상함들을 저지할 수 없었습니다. 한 U-Boot는 항모 아크 로열이 360m 앞을 지나가는데도 어뢰가 없어 쳐다만 보고 있어야 할 상황도 벌어졌다고 합니다. 비스마르크의 도주를 일단 저지시킨 영국 해군은 '바이언' 제독 예하의 제4구축함대 5척을 비스마르크를 저지하는 데에 투입하고, 이들은 밤새동안 어뢰 투사를 위해 접근하다 후퇴하다 하면서 비스마르크의 승무원들의 기력을 빼놓았습니다.

위의 소드피쉬 뇌격기와 함께 비스마르크 추격전에 큰 역할을-_- 한 항모 아크로열의... 선회하는 모습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5월 27일 0847시, 노포크와 합류하여 밤새도록 쫓아온 토베이 제독의 함대의 전함 로드니는 2만2천m에서 속력이 크게 떨어진 비스마르크를 향해 포문을 열기 시작하였고 1분 후에 전함 킹 조지 5세 역시 포문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비스마르크 또한 초반에는 정확한 응사로 3번째 일제사격은 로드니의 양 현에 떨어지는 (뱀다리 : 탄착을 좁히면 맞는 겁니다) 정확성을 보여 상대를 위협하기도 하였으나,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그 동안의 전투로 지친 승무원의 집중도가 떨어지고, 영국 전함들의 사격에 09:07시 1번 포탑부터 차례로 침묵해가면서, 09:30시경 모든 주포탑이 침묵하게 됩니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로드니의 6inch부포도 포격에 참여하였고, 북쪽으로 돌아간 노포크도 8inch 주포로 포격에 참여하였습니다. 영국 전함들은 침묵한 비스마르크에게 차례로 명중탄을 작렬시키며 거의 3천6백m의 거리까지 접근하였고, 또한 로드니와 노포크가 1방씩의 어뢰를 비스마르크에 안겼습니다. 비스마르크의 상부 구조물은 쑥밭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은 아직도 의연히-_- 떠 있었습니다.

비스마르크와 마지막 격전을 벌인 영국 전함 로드니입니당.
16inch포 9문을 모두 함수에 배치한 - 이미지에서는 3번 포탑이 안 보이는-_-군요 - 튀는 구조인데,
기왕 저렇게 설계했다면, 3번포탑이 2번포탑보다 높았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지만...
하튼, 영국군함사에서 가장 대구경의 화포를 장착한 함정... 은 아니고-_- 주력전함(battleship)이었습니다.

   10:15시 경 비스마르크의 모든 함포는 침묵하고, 지휘권을 인수받은 비스마르크의 기관장 '게르하르트 유나크' 소령은 전원 퇴함을 지시하였습니다. 10:23시 경 영국 함대는 연료 부족과 이대로 진행하다가는 독일 공군의 활동 영역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문제 등으로 인하여 포격을 멈춥니다. 며칠에 걸친 추격전에도 불구하고 끝내 마무리를 짓지 못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도 될 법하였는데, 마침 마지막으로 전투현장에 도착한 중순양함 '도세트셔(Dorsetshire)'가 가지고 있던 우현에 2발, 돌아서 좌현에 1발의 어뢰를 먹인 얼마 후인 10:40시, 드디어 거함은 브레스트를 800km 남겨둔 지점에서 좌현으로 기울어지면서 배의 밑바닥을 드러내고 선수를 하늘로 세우면서 선미 쪽부터 서서히 바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침몰에 대해서는, 어뢰는 별 영향이 없었으며, 함의 나포를 막기 위해 모든 배수갑문을 열고 혹은 폭탄을 설치하여 자침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진실일런지-_-는.

5월 27일 영국의 전함들에게 포격을 당하고 있는, 비스마르크의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는) 모습

   도세트셔는 구축함들과 함께 생존하여 허우적대고 있는 독일 승무원들을 구하기 시작하다, U-Boot가 출몰했다는 경고를 듣고 그냥 스윽-_- 사라져 버렸습니다. 후에 인정머리없는 처사라고 이야기도 듣고는 하는데, 그 진상은 어떠한지는. 하튼 뒤에 나타난 U-Boot는 몇 명의 생존자를 구할 수 있었고, 뤼첸스 제독을 포함한 고급장교단의 대다수와 2400여명의 승무원 가운데 115명을 제외한 모든 승조원들이 한 때 이름을 떨쳤던 신형 전함과 더불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위 승조원 중에 어찌 보면 애석하다고 할 수 있는 희생자로서, 독일 해군사관학교의 해군 생도 400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훈련을 위해 전함에 처음 탑승한 20대 전후의 젊은이들이 그만 허망하게 불귀의 객이 되었다고 하면... 말이 될까-_-나요.

전투를 최종적으로 마무리지은 영국 중순양함 도세트셔

   자세한 전후사정은 모르겠지마는, 겨울 작전의 승기를 이어가려던 독일 해군의 의도는, 신형 전함의 첫 출격에서 이렇게 꺾어지고 맙니다. 전투 행동을 위해서는 호위함이 따라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야 할까나요. 그래도, 이 비스마르크를 잡기 위해, 영국군은 대서양에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전함 -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모두 8척 - 을 동원하였고, 처어칠 또한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결과를 초조히 기다렸으며, 침몰을 보고받은 후에는 "조선술의 masterpiece였으며, 다행히도 우리에게 잡혔다"는 내용의 말로 높은 평가를 내렸습니다. 2차대전 최고의 함은 못 되더라도, 이 인상깊은 추격전으로 그 명성하나는 전함 중에서 가장 높지 않던가 싶습니다. 여담으로, 이 때 가라앉은 비스마르크의 잔해가 1989년 수중 탐사 중에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유틀란트 해전(Battle of Jutland)

1. 함대 출격

   '유틀란드 해전'은 제1차 세계 대전을 통하여 영국의 '대함대(Grand Fleet)'와 '독일의 대양함대(Horchsee Flotte)'가 총력을 투입하여 맞대결한 유일한 해상 격돌이었습니다. 그 규모와 화력 밀도는 지금까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고, 양 측의 순양전함들이 많은 활약과 더불어 희생을 한 전투였습니다. 또한, 용두사미스러운 격전의 결과에 대해서 이래저래 논쟁이 많은 전투이기도 합니다. 전투는 1916년 5월 31일 오후에 시작하여 그 다음날 새벽에 끝났는데, 영국과 독일의 막강한 주력 함대가 치열한 전투를 나눈 곳이 덴마크의 유틀란드 반도 서쪽 해상이었으므로 유틀란드 해전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지요.

   1916년 1월에 온건한 성품의 폴(H. von Pohl)제독 후임으로 '라인하르트 쉐르(R.Sheer)' 해군 중장이 대양함대를 지휘하게 됩니다. 이후 독일 함대의 분위기는 적극적이며 공격적인 방향으로 바뀌었고, 그리하여 지금까지 수세에 놓여있던 해상 작전 또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쉐르는 대양함대를 이끌고 6월 초순을 기하여 영국의 선덜랜드 일대에 대해 기습 공격을 강행할 작전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이용 가능한 독일 해군의 잠수함 부대를  동원해서 5월 23일부터  6월 1일 사이에 영국  해안에 배치시키도록 했습니다. 영국의 대함대와 정면 대결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나누어지는 영국 함대는 공격할 복안을 세우고 있었더랍니다.

보다시피, 유틀란트 해전의 전역... 입니다.

   그 한편, 영국 함대의 사령관인 '존 젤리코(J.Jelico)' 제독은 러시아와의 교역을 고려하여 발트해에 이르는 해역 일대에 대한 해상 소탕작전을 6월 2일부터 실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영국의 통신 정보는 때마침 독일 대양 함대가 5월 말경 해 상작전 수행 차 출동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젤리코는 그의 소탕작전 계획을 일단 보류하고 5월 30일 21:30시, 영국 대함대의 주력 부대를 지휘하여 영국 북단의 해군 기지 스카파-플로를 급거 출동해 동쪽으로 나아갔고, 가까운 모레이만의 크로아티아에 있는 '저람(T.H.M. Jerram)' 해군 소장 예하의 노급 전함 8척도 즉시 출항하여 그 이튿날에 주력 전함 부대와 합류토록 지시되었다. 그리고 포드 만의 로시드 기지에 대기하고 있던 '데이비드 비티(D.Beatty)' 해군 중장에게 타전하여 거느리는 고속 노급 전함 4 척과 순양전함 6척을 같은 날 22:15시에 그곳을 떠나 그 이튿날 14:00시 북해의 북위 56도 40분,동경 5도 00분 해역까지 진출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비티 예하의 함대는 젤리코가 거느리는 주력 부대의 전방에서 정찰부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영국 대함대가 동쪽 침로를 잡으며 출격한 지 3시간여가 지난 뒤, 건너편 독일 대양함대는 쉐르 지휘하에 빌헬름스하펜 해군 기지를 뒤로 하며 제이드 만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해군의 비티 정찰부대와 마찬가지로 독일측은 '프란츠 히페르(F.Hipper)' 해군 중장이 이끄는 정찰부대가 순양전함 5척을 주축으로 하여 쉐르의 본대를 앞질러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뒤덮는 연기를 폴폴내며 전진하는 영국 대함대의 위용... 입니다.

   5월 31일의 해가 떴습니다. 오전까지만 해도 젤리코와 쉐르 두 지휘관은 상대방 부대의 출동에 관한 정보를 전혀 입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해안으로 배치된 독일의 U-boot중 2척이 영국 함대의 출동을 순간적으로 목격했지만 그들의 보고는 정확하지가 못했습니다. 젤리코 또한 출동시에 무선 전신의 침묵을 지키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새로이 아 는 바가 없었습니다. 영국의 주력부대 노급 전함 24척은 6개 분대로 나뉘어 각 분대별로 4척씩 종렬진을 짓고 나아갔는데,그 주변에는 구축함들이 경계진을 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력 본대 전방으로는 5mile 거리를 두고 제 4경순양함전대가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그곳으로부터 다시 15mile 더 앞선 위치에는 제 1,2순양함전대가 30mile에 이르는 넓은 폭으로 전개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로부터 4mile을 더 앞선 해상에는 제3순양함전대가 구축함의 호위를 받으며 선봉진을 이루어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전체 99척의 편성이었습니다. 젤리코의 주력 전함부대는 처음에 독일 잠수함을 경계하면서 14knot의 속력으 로 지그재그 항법을 써서 나아갔다. 영국 주력 전함부대의 남쪽 70-80mile 되는 해상에서는 비티의 정찰부대가 14:00시로 정해진 합류 지정 해역을 향하여 항진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대는 비티가 직접 인솔하는 제 1순양전함분대를 중심으로 하여 그 왼편에 '이반 토마스(Ivan  Thomas)' 해군 소장 예하의 '퀸 엘리자베스(Queen Elizabeth)'급 고속 노급 전함 4척으로 구성된 제 5전함분대가 위치했으며, 제 2순양전함전대는 왼편 전방으로 배치되었고. 독일 함대의 출현에 대비하여 제 1,2순양함전대는 북동 방향으로 25마일의 폭을 펴면서 나가고 있었습니다. 전초부대도 51척의 대 편진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영국 주력함대의 진형

   한편 독일의 대양함대는 쉐르의 기함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sse)'을 선두로 한 제 1전함분대가 중앙에 위치하고 그 전방에는 제 3전함분대, 후방에는 제 2전함분대가 각각 편진했는데, 그들 22척은 단종진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며. 3개 전함분대는 제각기 구축함들의 호위를 받고 있었습니다. 주력부대 외곽 6mile 되는 위치에는 경순양함과 구축함 각 6척이 배치되었지요. 쉐르의 주력 전함부대는 16knot의 속력으로 유틀란드 해안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의 세력 은 노급 전함 이하 59척이었습니다. 히페르가 지휘하는 독일 대양함대의 정찰부대는 구축함의 근접 호위를 받는 순양전함 5척이 중앙에 단종진으로 위치했으며,그 전방 외곽 8mile 되는 거리에 반원형으로 경순양함 5척과 구축함들이 5개 감시점을 이루며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히페르 부대는 쉐르의 본대로부터 50mile 거리를 두고 앞서 있었습니다. 역시 순양전함 '뤼쪼브(Lutzow)' 이하 40척의 대편진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독일 주력함대의 진형

   영국과 독일 양 함대의 세력 구성은, 전력면에서 간단하게 비교하자면, 노급전함과 순양전함을 합해 37:21로 영국 측이 주력함의 쪽수도 많았고, 당근 화력에 있어서도 구경 12~15inch 주포 344문을 비치한 영국이 독일의 구경 280~305mm 주포 244문에 대해 월등하게 강력한 상태였습니다마는...

도거 뱅크(Dogger Bank) 해전

   대전의 와중에, 상대 국민들의 사기저하 방편 중 하나로 영국 본토 동해안에 대한 기습포격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섬나라인 영국 쪽이 독일 쪽보다야 해안을 덮치기 쉬운 편이겠지요. 그리하여 소규모 부대에 의한 2번의 해안도시 기습포격전이 독일 측에 의해 벌어졌었고, 군사적으로는 아니지만 사회불안조장용으로 인한 상대국가국민 사기 저하 목적으로는 괜찮은 작전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1915년 1월 23일 16:45분, 3번째로 포격의 임무를 띄고 독일 히페르 해군소장은 순양전함 3척, 장갑순양함 1척, 경순양함 4척을 이끌고 제이드 만을 빠져나가 북해의 도거뱅크 지역의 상대 세력도 기습하고 등등... 을 위해 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영국도 마냥 당하고는 없는 일, 영국 해군성의 제40첩보국은 이번에는 독일의 이번 작전을 알아내었고, 해군성은 로시드 항의 비티 해군중장 휘하의 순양전함들과 경순양함들, 그리고 트위트 해군준장 휘하의 경순양함과 구축함들에게 1월 24일 07:00분 경에 상대와 접촉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영국 함대들은 독일 함대가 출동한 몇 분 후에 근거지에서 달려나갔습니다.

상대와 처음 접전을 벌인 독일 경순양함 콜버그

   1월 24일 07:14분 경, 독일군의 우현을 담당하던 경순양함 콜버그(Kolberg)는 영국의 경순양함 오로라(Aurora)를 발견하고 교전에 들어갔습니다. 양 함은 각기 2발의 명중탄을 기록하고 2발의 피탄을 당했는데, 이 보고를 받은 히페르 제독은 해역을 순찰하는 함정 정도로 생각을 하고 순양전함의 화력으로 간단히 밟아버릴 생각으로 영국 순양함을 향하여 변침 전진을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경순양함 스트랄순드(Stralsund)가 북북동 방향에서 연기의 행렬을 발견했습니다. 기습의 이점을 상실했다고 느꼈을 히페르 제독은 그 연기들을 보고 '미련없이' 남동 회항 침로를 취하였습니다.

도거 뱅크(Dogger Bank) 해전의 상황.
보다시피, 영국측이 독일측의 꼬리를 따라가는 직선평행침로진행 교전입니다.

   새로 나타난 함대를 전함으로 판단한 히페르 제독은 상대를 쉽게 따돌릴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둘 간의 사이는 어느 새 2만5000yard로 줄어든 것이었습니다. 상대는 '순양전함!'이었던 겁니다. 독일 함대의 가장 뒤에 위치한 장갑순양함 블뤼헤르는 23Knot를 낼 수 있었는데 반해 영국 함대의 선두 3척의 순양전함은 27Knot를 낼 수 있는 년들이었습니다. 조만간의 상황이었습죠. 비티 제독은 휘하의 순양전함들에게 29Knot의 속력으로 급속 전진할 것을 명하고 퇴각하는 독일 함대를 맹렬하게 추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후위의 두 순양전함 뉴질랜드(New Zeeland)와 인도미터블(Indomitable)에게 이 속도는 시험항해에서도 발휘해 본 적이 없었던 속도였고, 그 결과 둘은 점점 쳐져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쨌든간에, 두 함대의 거리는 점점 좁혀져 들어갔으나 워낙 함정들이 고속으로 움직이는 데에다가 함정들이 뿜어내는 연기가 시야를 방해하여 쉽게 포격을 개시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독일 최후로 건조된 장갑순양함 블뤼헤르(Blucher). 비록 구식 함형이지만,
영국의 초기형 순양전함들과 견주어 사거리에서 동등하고, 장갑은 더 충실한 함정이었습니다. 그렇지-_-만...

   그래도 08:52분, 순양전함 라이온(Lion)은 독일 함대의 최후위인 장갑순양함 블뤼헤르를 향해 포격을 개시하였습니다. 09:00분 경에는 사거리 내인 2만yard까지 접근할 수 있었고, 09:09분 경 첫 명중탄을 블뤼헤르에게 안길 수 있었습니다. 독일 함대는 상대의 선도함인 라이온을 목표로 09:11분 경부터 4척이 집중포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순양전함 뉴질랜드까지 포격을 개시할 만한 위치에 도달하자, 비티 제독은 각 함마다 한 척씩의 상대를 맡아 포격을 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2번째함인 순양전함 타이거(Tiger)가, 후위에 처진 인도미터블이 쫓아오고 있는 것으로 오판하여, 선두인 라이온과 같이 적의 선도함인 순양전함 자이들리츠(Seydlitz)로 목표를 맞추었습니다. 그 덕에 2번함인 순양전함 몰트케(Moltke)는 적의 포탄을 받지 않고 교전을 벌일 수 있었으며, 자이들리츠를 목표로 한 영국군의 포격은 두 척의 탄착이 뒤섞이는 바람에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져 서로를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독일과 영국측의 공격상황.
검은 선은 영국함의 공격방향, 빨간선은 독일선의 공격방향... 인데 어째 추리(쿨럭)

   09:40분, 자이들리츠는 라이온에서부터의 포격으로 후부 포탑을 관통당하는데, 이에 포탑의 화약이 유폭되고, 이 때 발생한 화재가 폐쇄되었어야 할 격문을 통과하여 다음 포탑으로까지 번집니다. 결과적으로 2개 포탑의 포탄이 유폭할 상황에서 간신히 탄약고를 침수시켜 함의 폭침은 면하게 되지만, 159명의 목숨이 날아갑니다. 독일 함대의 집중목표가 된 라이온 또한 여러 발의 명중탄을 맞았습니다. 그 중에 순양전함 데르플링게르(Derfflinger)에게 수면 근처 좌현에 맞은 것이 가장 컸는데, 침수와 함께 피탄 30분안에 좌현 엔진이 완전히 정지하여 속도가 떨어지게 됩니다. 대열의 마지막에 위치해 있던, 블뤼헤르는 여러 발의 명중탄으로 속도가 17Knot까지 떨어지게 되어 결국 대열에서 탈락하고, 비티 제독은 뒤에 처진 인도미터블에게 블뤼헤르를 맡깁니다. 라이온의 속도가 계속 떨어져 후위 함정들에게 뒤쳐지려고하는 09:58분, 영국 함대는 전방에서 잠망경 비슷한 구조물을 발견하고 이를 어뢰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잠수함으로 판단하여 좌현 90도로 변침을 하였습니다. 독일 측에서는 추격의 저지와 기습을 위해 준비하였던 어뢰정을 철수시키고, 일단의 직선 추격전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독일 기함인 순양전함 자이들리츠. 충실한 방어력 덕분이랄까...
이번도 그렇고 다음 유틀란트 해전에서도 크게 박살(포탄 21발과 어뢰 1발)남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함정입니다.
절명 직전까지 두들겨맞고 살아남는게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비티 제독은 상대를 놓아주지 않을 의도 하에, 뉴질랜드와 인도미터블을 이끄는 2함대의 무어 소장에게, 넬슨이 남긴 유명한 말이라는 "적과의 거리를 좁혀라"를 발신하려 하였으나 목록에 없는 이유로 "적의 뒤를 쫓아라"는 지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라이온은 이전에 이래저래 얻어맞은 까닭에 무선장치가 고장나고 동력이 끊겨 발광램프도 쓸 수 없었으며, 거기에 더해 마지막으로 명령을 하달받은 장교의 전달 실수로, 명령에 "북동쪽의"라는 단어가 붙어버렸다고 합니다. 마침 그 쪽에는 전열에서 쳐저버린 장갑순양함 블뤼헤르가 비실대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명령을 이해한 무어 소장은 순양전함 뉴질랜드와 인도미터블을 끌고 블뤼헤르를 손 보아주고, 경순양함 아레추사(Aretusha)와 구축함들의 어뢰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그 와중에 경순양함 미티어(Meteor)가 블뤼헤르의 저항으로 크지 않은 손상을 입었습니다. 나머지 독일 함정들은 그 와중에 몸을 빼낼 수 있었고, 구축함 어택(Attack)에 옮겨탔다가 순양전함 프린세스 로열(Princess Royal)로 비티제독이 옮겨탔을 때에는 전투가 끝난 상태였습니다.

'블뤼헤르(Blucher)의 마지막'이라고 하는, 유명하다고 하는 우현으로 전복침몰되는 사진.
몰락하는 모습이지마는, 웬지 멋있습-_-니다. 그래서 유명한가나.
발이 느리다는 약점으로 인하-_-여, 결국은 덜미를 잡혀 이런 꼴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큰 피격을 입은 라이온은 인도미터블에 끌려서 귀환할 수 있었으나, 1915년 4월까지 전열에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 과실을 따져보면, 영국은 적의 신형 장갑순양함을 격침시키고 순양전함 한 척을 당분간 잠재워둔 전적에 비해 라이온 한 척만이 큰 피해를 입은, 이번 전투에서는 승자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영국 해군의 승리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가 따랐-_-으나, 독일 함대를 도망가게 놔두었다고 생각한 무어 소장에 대해서 비티 제독과 해군참모총장 피셔는 강한 질책을 하고, 무어 소장은 결국 카나리아 제도로 좌천되어버립-_-니다. 독일 측에서는 격노한 황제의 명령으로 해군참모총장 본 인젠홀(von Ingenhol) 제독이 물러나고 본 폴(von Pohl) 제독이 새로 취임하게 됩니다.

   이 전투의 특기할 만한 사항 하나로, 자이들리츠의 피격에서 교훈을 얻은 독일은 불안전한 탄약 보관문제에 대하여 연구보완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이 조치의 결과는 다음 유틀란트 전투에서 에누리없이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보시라-_-고.

한국

육군 특전사
'7개 여단, 병력 1만5000여명'. 검은 베레모로 상징되는 육군 특수전사령부의 현주소다.
육군 국방 개혁안의 하나로 금년부터 추진될 이 개편안의 핵심은 현재 7개인 여단을 6개로 줄이는 대신 기존 여단보다 훨씬 많은 병력과 최신 장비로 무장한 1개 공정(공정)여단을 창설하는 것. 앞으로 특전사 공격력의 중추가 될 이 공정여단은 4000여명의 병력을 보유, 기존 여단의 약 2배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할 것으로 알려졌다.

해군 UDT/SEAL팀
해군도 기존의 수중폭파대(UDT)를 확대 개편, 특수여단을 창설키로 하고 이를 상급기관인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에 건의해둔 상태다. 해군의 이같은 조치는 특수부대의 중요 침투 수단인 잠수함을 8척이나 보유하게 됐기 때문. '제인연감' 등에 따르면 우리 해군은 90년대 초만 해도 180t급인 '돌고래'급 잠수정 3척과 소형 침투용 잠수정 수척을 보유, '로미오급' 및 '상어급' 잠수함, '유고급' 잠수정 등 각종 잠수함 및 잠수정 80여척을 보유한 북한에 비해 침투작전 능력이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북한 잠수함 및 잠수정에 비해 훨씬 성능이 우수한 독일제 1200t급 209형 잠수함을 8척이나 보유하게 된 것이다.

해병대 특수수색대
해병대를 특수부대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해병대는 특수부대와는 거리가 멀다. 특수부대는 대부분 팀으로 소수병력을 근간으로 작전이 이루어지는 반면 해병대는 육군의 보병처럼 부대 단위로 작전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해병대는 차라리 전략기동부대 성격이 강한 특수목적부대로 분류된다.
그러나 해병대 조직 내에서도 특전사나 UDT/SEAL 대원들처럼 팀 단위로 임무를 수행하는 가장 대표적인 소부대가 바로 특수수색대다. '해병 중의 해병'으로 일컬어지는 특수수색대원들과 다른 특수부대와의 차이는 부대 구성원들이다. 특전사나 UDT/SEAL이 부사관 중심으로 운용되는 반면 해병대 특수수색대는 사병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훈련강도나 작전수행 능력은 결코 다른 부대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해병대 특수수색대의 연혁도 UDT나 특전사 못지 않게 길다. 특수수색대는 57년 2월 13일 경기도 파주에서 수색소대(특공소대)로 발족됐다. 당시 서부전선을 담당하던 해병대는 상륙작전에 필요한 눈과 귀 역할을 수행할 부대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따라 수색소대를 창설했다. 1년뒤 해병대가 포항지구로 이동하면서 수색소대를 중대급으로 재편성됐다.
재편성과 함께 대원들은 미 해병대가 실시하는 수색교육을 전원 수료했다. 3개월 간의 수색교육을 마친 대원들을 중심으로 해병대 사령부는 59년 1월 15일자로 수색중대를 정식 창설했다.

707 특임대
육군의 707부대의 대테러리스트 특공대는 1982년에 120여 명의 인원으로 창설하였고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는 독일의 GSG-9과 미국의 델타포스의 대원들이 707부대내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그 명성을 인정받고 있다.
707 대원들은 특전사 내에서 자질이 우수하고 사격, 공수, 레펠, 무술에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는 대원들을 선발하여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해상 테러리스트 지역대
한국이 지정학적으로 반도 국가이며 해상 교통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관계로 언제든지 한국 선박에 대한 테러리즘의 발생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하에 창설되었다.
1993년 해군의 특수부대인 UDT(Underwater Demolition Team-UDT)내에 대해상 테러리스트 지역대로 명명되고 있는 특공대가 창설되어 운영되고 있다.
대해상 테러리스트 지역대는 미국의 NAVY SEAL팀과 정기적으로 합동 훈련을 실시하고 있으며, 막강한 대테러리스트 진압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찰 특공대 (868부대)
한국 경찰의 대테러리스트 특공대는 86년 아시안 게임과 서울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면서 북한 특수부대에 의한 테러리즘과 국제 테러리즘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경찰청에 의해 1983년에 창설되었다.
이후 2002년 월드컵에 대비하여 지방 경찰청에도 대테러리스트 특공대를 창설하여 운영중에 있다.

미국

과거 소련의 붕괴로 인하여 냉전시대가 막을 내린 현대의 국제사회에서 미국은 전세계를 강제지배 통제하는 과정에서 전세계 각국 상대하고 있는 상태인데 이는 모든 것이 미국의 국익 때문이리라. 이러한 국익을 위한 투자비용 대비 이익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현대전에서는 소규모적이고 국지적인 전쟁을 위하여 특수부대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적은비용으로 큰 효과를 얻기 위해서 인간을 첨단병기화한 미국의 특수부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미국 특수부대와 제18 공수군단의 면모를 살펴본다.

◇ 특수부대
대 테러 작전 수행을 위해 아프간 남부 지역에 침투한 것으로 알려진 미 육군 그린베레, 레인저를 비롯한 특수 부대는 고도의 훈련을 통해 대 테러전,요인 암살 등 특수 임무를 수행한다.
플로리다주 탬파 맥딜 기지에 사령부를 두고있는 미 통합특전사(SOC)는 4만5천의 각 군별 특수부대 병력을 관할한다.

다음은 각 군별 특수부대의 주요 임무다.
△ 육군
육군 특수부대는 2만5천명으로 전설적인 '그린베레'와 '레인저',`델타 포스' 등이 있다. 야간 전투를 전문으로 하는 병력인 제160 특수작전 항공연대 '나이트스토커스'도 있다.
그린베레는 12명을 단위로 작전을 수행하며 평화시에는 외국 특수전 요원을 교육, 훈련하는 활동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시에는 적진 후방에서 장기간 정찰 활동을 수행하면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공격임무를 맡는다. 그린베레 요원들은 또 최소한 1개 이상의 외국어를 구사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미군 관계자들은 육군 소속의 대테러 특별부대로 휴대용 위성통신 장비를 포함한 다양한 무기와 장비를 갖춘 그린베레의 분견대인 델타 포스에 대해서는 거의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델타포스는 대테러전 및 인질 구출을 주임무로 한다.
`레인저'는 약 7천500명으로 극지, 정글, 사막, 산악지형에서 전투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은 보병부대다. 제160 특수전 항공연대의 '나이트스토커스'는 블랙호크 군용 헬리콥터와 특수 설계한 무장 헬기로 작전을 수행한다.
또 육군 심리전 부대는 각종 선전 전단의 제작ㆍ살포와 방송을 위해 훈련을 받고 있다. 이같은 심리 전술은 직접 교전없이 수천명에 달하는 이라크 병사의 항복을 유도하는 등 걸프전에서도 효과를 발휘했다.

△해군
해군 특수부대는 해저 폭발물 등의 해체 작업과 최악의 상황 하에서도 적에게 발견되지 않고 첩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유명한 '네이비 실(Navy SEAL)을 포함하고 있다. 해군 특수전 사령부는 캘리포니아주 코로나도에 본부를 두고 있다.

△공군
공군 특수부대는 약 1만2천500명이며 어려운 상황에서 공중투하돼 신속하고 비밀리에 (지상의) 특공대원들을 구출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플로리다주 헐버트기지 공군 특수전 사령부의 지휘를 받는 공군 항공기는 야간에도 적진 깊숙이 침투해 특수 요원들을 잠입시킬 수 있도록 설계된 AC-130 스펙터 공격기와 헬기 등이 있다.

공군 특수전 병력은 또 (전투 중) 비상탈출한 조종사들을 발견해 적에게 생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훈련된 낙하산 구조요원들을 보유하고 있다.

◇ 제18 공수군단
전세계 어디든지 단시간에 급파, 혹독한 조건 아래서도 전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정예 보병부대다. 노스캐롤라이나 포트 브랙에 사령부를 둔 이 군단은 8만8천명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 군단은 그레나다, 파나마, 걸프지역, 소말리아, 보스니아 등 지난 20년간 미국이 벌인 지상전과 평화유지군 활동에서 선봉부대로 활약, 위용을 떨쳤다.

△제10 산악사단
제10 산악사단 병력 2천여명은 지상전을 앞두고 우즈베키스탄의 남부 아프간 접경지대 테르메스와 사마르칸트에 배치됐다.
뉴욕주 포트 드럼에 사령부가 있는 제10 산악사단은 평소 영하 20도 아래 떨어지는 혹한과 해발 2000m가 넘는 산악지대에서 전투를 할 수 있는 훈련을 받아온 만큼 아프간 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최적의 군대다.
이 부대는 ▲아프가니스탄 지상전중 특수부대 지원 ▲군사작전상 차질이 빚어질 경우 즉각 신속대응군으로 투입 ▲북부동맹과 민간인에 대한 구호품 보급 및 보급로 확보 등을 수행할 것으로 군사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제101공수사단
이미 극비리에 출동명령을 받은 제101 공수사단은 미국 중남부 켄터키주 캠벌에 본부를 두고있으며 중무장헬기에 의한 공중 강습이 주임무다.
1942년 공수사단으로 발족한 이 부대는 `절규하는 독수리'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선봉부대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바스토뉴, 네덜란드 등유럽 전선에서 아군에게 유리한 작전의 물꼬를 터주었다.
이 부대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기동성이다. 3개여단과 지원부대 등 1만여명 규모인 이 부대는 AH-1S 코브라 중무장헬기 , UH-60형 블랙호크 헬기, C-47형 치누크헬기 등 다양한 헬기를 운용하면서 주 공략목표에 정예병력과 장비를 투입해 적을 무력화시킬 수있는 막강한 공중화력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제18 공수군단 산하에는
▲전세계 어느 곳이든 몇 시간내에 출동, 낙하공격을 수행할 수 있는 신속배치군인 제82 공수사단
▲탱크, 장갑차 등을 갖춘 제3 기계화 보병사단이 포진해 있다.

영국

SAS(special air service)

영국의 육군공수특전단으로 "무모한 자가 승리한다"를 모토로 삼은 영국의 대표선수이자 세계 모든 특수부대의 큰형님인 SAS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41년 데이비드 스털링(david stirling)에 의해 창설됐다.

낙하, 잠수, 생존술, 격투기 등 각종 훈련을 받고 칼부터 소형 핵무기 까지 모든 종류의 무기에 달통한 정예요원들로 구성돼 아무리 어려운 작전이라도 완수해낸다.


80년 런던 주재 이란대사관 인질사건 때 10분만에 인명피해없이 상황을 해결할 만큼 대 테러작전에서도 막강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SAS는 북아일랜드, 발칸반도, 걸프전쟁 등에 참전했었고, 특히 10년전 걸프전 당시에는 이라크 후방에서 파괴작전을 수행해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SBS(special boat squardon)

SBS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영국 왕립 해병대 산하의 부대로 창설되었다. SBS는 대원 전원이 여러 특공대 중에서 엘리트만 뽑아 구성한 정예 특수부대로 제복은 해병대의 제복과 같으나 SC 뱃지를 착용하게 되는데 SC는 Swimmer & Canoeist의 약자이다.

SBS 요원들은 보르네오, 오만, 포클랜드 전쟁등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기도 했으며 걸프전에서는 다국적군의 주 공격을 이라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쿠웨이트 해안에서 양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낙하산 부대 파라스(Paras)

'파라스'로 알려진 낙하산 부대. 1940년 당시 윈스턴 처칠 수상의 명에 의해 창설되었다. 현재는 4개 대대를 갖춘 1개 연대로 편성돼 1개 대대는 항시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정찰 및 공중강습 임무를 수행하는 특공대가 구성돼 있다.

영국의 낙하산 부대는 세계 2차대전 등 영국이 참전한 모든 전쟁에 빠짐없이 참가해왔다. 92년 포크랜드 전쟁때는 막대한 손실을 입기도 했다.

왕실 해병대(Royal Marines)

영국 해군의 보병여단인 왕실 해병대는 주로 수륙양병장전이나 공습작전에 참여한다. 왕실 해병대는 긴급상황에 전세계 어디에라도 파병할 수 있도록 상비태세를 갖춘 특공대를 운영하고 있다.

왕실 해병대원들은 30주의 훈련과정을 거친 후에 정식 대원이 될 수 있다. 왕실해병대는 1940년 윈스턴 처칠 수상의 명령으로 창설되었다. 왕실 해병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으며 1956년 이집트에서는 세계최초의 헬리콥터 특공작전을 선보이기도 했다.



프랑스

프랑스의 특수부대는 외인부대(레종 에트랑제), 지젠느(GIGN) 등이 있다.

외인부대
'외인부대'는 1831년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립 1세가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5개 대대 규모의 용병(傭兵)을 창설한 것이 효시.

이후 외인부대는 프랑스군의 일원으로 전세계 분쟁지역에 동원됐으며, 최근의 걸프전을 비롯, 전 세계에서 3만5천회 이상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러오면서 '용기를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목숨을 버리겠다'는 부대 정신을 구축했다. 때문에 모험심에 불타는 전세계 젊은이들이 동경하는 '최강의 특수부대' 중 하나로 꼽힌다.

현재 전세계 138개국 출신 8500여명으로 구성돼 있는 외인부대에는 한국인도 수십여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IMF경제난 때에는 외인부대에 지원하려는 한국인들이 급증하기도 했다.

외인부대는 국적에 상관없이 만 17∼40세의 남자를 대상으로 신체검사 등 일련의 테스트를 거쳐 선발한다. 어학능력 개인신상 등은 문제가 되지않는다. 하지만 선발 및 훈련과정이 혹독해 지원자의 90%가 탈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대하면 프랑스국적과 함께 프랑스내 각종 공공요금의 70% 할인혜택이 주어진다.

DINOPS(Detachement d'Intervention Operationnelle Subaquatique)

DINOPS는 공수훈련을 마친 잠수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중침투 및 폭파를 전문으로 한다. 프랑스 외인부대의 제 6 공병연대 정찰지원중대 소속인 DINOPS는 수중폭파, 해안정찰, 와해공작, 도하지원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걸프전당시에는 美 육군 82공수사단을 지원하여 폭발물 설치를 도왔으며 종전후에는 호주 해군의 기뢰제거팀과 공동으로 걸프만에 설치된 기뢰를 제거하기도 했다.

지젠느(GIGN)

지젠느(GIGN)는 groupement d'intervention de la gendarmerie nationale의 약자.

1973년 11월 프랑스 정부는 대테러리리스트 특공대 지젠느(GIGN)를 창설했다. 창설 초기에는 제 1 GIGN과 제 4 GIGN의 2개의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976년에 통합되었고, GIGN의 임무가 점차적으로 늘어나자 1979년에는 핵심 요원을 15명에서 42명으로 보강했고, 1984년에는 58명(장교 6명)으로 증원했다.

GIGN은 12명으로 구성된 4개의 타격대(Strike Unit)로 되어 있으며, 4개의 타격대 중 1개 타격대는 비상 대기조로 언제 어디로든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24시간 대기하고 있다.

GIGN은 인질 구출작전이 주된 임무이지만, VIP에 대한 경호, 주요 시설물에 대한 방어, 극악범 호송 임무도 아울러 수행하고 있다.

다른나라의 특공대와는 달리 GIGN은 전투 수영훈련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해상에서 선박납치 사건이 발생하거나, 해안에 있는 호텔과 같은 위락 시설의 점거와 인질 억류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창설이후 지금까지 GIGN은 작전에서 실패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6년 지부티에서의 발생한 스쿨버스 인질구출작전, 1979년 사우디 아라비아의 회교 원리주의자들이 일주일간 장악하고 있던 회교성지 메카사원 진압작전, 1983년 파리의 오를리 공항 납치범 제압작전 등이 대표적인 작전이다.

그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구출 작전은 1994년에 발생한 에어 프랑스 항공기 납치사건의 구출작전이다. 알제리의 우아리 부메디엔 공항에서 알제리 회교 원리주의 테러리스트 4명이 자국의 항공기를 납치하여 프랑스의 마르세이유 마리난 공항에 강제 착륙시키고 프랑스 정부와 대치하자, GIGN이 투입되어 납치범 4명을 사살하고 인질 1백 70명을 성공적으로 구출했으며 17분간의 작전중 사용한 총탄은 모두 1,500여발 이었다.

GIGN은 사우디 아라비아를 비롯한 제 3세계 국가의 대테러리즘 특공대원들의 훈련을 지원하고 있으며, 한국의 특수부대 역시 GIGN부대를 방문하여 대테러리트 특공대 훈련에 필요한 기술과 정보를 얻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독일

독일의 특수부대는 GSG-9(Grenzchutzgruppe), KSK(Kommando SpeziaKraft) 등이 있다

GSG-9(Grenzchutzgruppe)
1972년 뮌헨 올림픽 기간중에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에 의해 이스라엘 선수 11명이 살해되자, 서독 정부는 특공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브란트(willy brandt) 수상은 특공대 창설을 지시하여 연방국경경찰 (federal border police) 예하에 특공대를 창설하기로 결정되었다.

GSG-9는 88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었다. 본(born)의 외곽에 자리한 세인트 오거스틴(ST. Augustin)에 기지를 두고 있는 GSG-9는 테러리즘 관련 임무를 수행하며, 위기상황하에서의 VIP 경호, 테러리스트의 공격이 예상되는 독일 주재 외국 대사관 방어, 국가의 주요 시설물에 대한 수비 등을 담당하고 있다.

KSK(Kommando SpeziaKraft)
1994년 적 후방 지역또는 자국안에 군 임무의 범위를 해외로 실행하기 위하여 KSK를 창설하였다.

냉전시대가 끝나기 전에는 동독 항만의 정찰, 나토의 수륙양면 공격 및 적 항만의 주 함선을 폭파하는 등의 임무를 띠고 있었다.
냉전이 종료된 후에는 UN의 깃발아래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걸프전에도 참전하여 독일 선박을 보호하였다.
걸프전이후 KSK 잠수요원들은 바다밑에 가라앉은 중요 물자를 치우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일본

일본에서 특수부대는 SAT(Special Assault Team)가 있다.

일본국내에서 1972년부터 일본 적군파 행동대원에 의한 8건의 테러가 있었으며, 1995년에는 동경 지하철에 오옴진리교원들에 의해 사린가스가 살포되어 12명이 사망하고 5,500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서 1996년 4월 SAT(Special Assault Team : 특수급습부대(特殊急襲部隊))이 창설되었다.

창설당시 제 1기의 대원들은 독일 GSG-9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 결과로 처음에는 GSG-9와 똑같은 장비를 도입하게 되었다. 현재는 미국의 FBI 와 SWAT 으로부터 시가지 인질구출작전의 지도를 받고 있으며 , 전술훈련도 병행하여 진행하고 있다.

일찌기 두개의 현이 대테러 특공대를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었으나 이 SAT의 창설 이후 각 현마다 SAT 1개 팀이 운영되고 있다. 한팀은 2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0개팀, 총 200명의 요원이 활동하고 있다.

근무는 3교대제로 훈련중일지라도 반드시 1개소대는 긴급출동에 대비하여 24시간 대기체제를 갖추고 있다. 보통의 일정이 훈련, 대기, 비번의 구성으로 되어있어 일반 경찰과 비교하면 상당히 힘든 근무환경이다.

본부의 위치나 기타 다른 사항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특히 버스, 기차 또는 비행기에서 발생하는 테러에 대한 훈련이 이루어져 있으며 헬리콥터 라펠링등 다양한 침투 방법을 익히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SAT의 대원이 되면 그들은 경찰관의 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어, 지금 그 대원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같은 SAT 대원 이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북한

*경보병 여단 : 9개 여단중 6개 여단은 전방 각 군단에 배치되어 있고 후방 군단에는 3개 여단이 배치되어 있으며 총 병력은 대략 3,30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행정병 80명, 나머지 병력은 전원 장교로 구성되어있는데 아마도 위장계급으로 추측이 된다.

경보병여단의 지휘부는 소장(한국군의 준장급)이나 고참 대좌가 여단장을 맡으며 예하에 7개(450명) 경보병 대대가 속해있다.

*저격 여단(청년돌격여단) : 유사시 전선돌파와 후방교란목적으로 30세 미만의 청년군관으로 편성하여 40%의 군관과 60%의 하전사로 구성되어있고, 예하에 9개 저격대대 - 저격중대 - 저격 소대 와 모란꽃 소대로 편제되어있다.  여기서 모란꽃 소대는 적후방에 침투하여 유흥업소의 접대부로 일하면서 요인암살과 포섭, 정보수집등의 임무를 띠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정찰 여단 : 유사시 주 전투지역 후방으로 침투하여 한,미군 부대의 방어작전을 교란하고 전술표적을 선별적으로 타격하는데 그들의 전략 목표물을 파괴전에 장악해서 후방지역의 혼란을 야기시키며 남한의 교량, 터널, 댐, 발전소등을 신속히 점거하여 북한군의 진격을 지원한다. 평시에는 對남침투와 첩보수집 임무를 맡고 있으며 유사시 국외작전은 일본의 미군기지와 필리핀, 멀리는 진주만의 미국의 해군기지까지의 습격을 담당하고 있다.

이 외에도 해외의 군사 고문관으로 활동하여 게릴라 훈련을 시키거나 각종 테러집단을 지원하기도 한다.

정찰여단의 총 병력은 약 20,000명정도이며 각 여단별 병력은 4,200명으로 여단본부, 후방 지원부다, 통신중대, 정찰대대로 편제되어있다.

*상륙 여단 : 한국의 해병대와 비슷한 임무를 띤 상륙여단의 임무는 항만타격 및 봉쇄, 남한연안에서의 상륙작전, 주요목표 습격 및 파괴등의 임무를 가지고 있다.  상륙여단의 퐁 병력은 약10,000명으로 3개 여단에 15개 대대가 있다.  

1개여단의 병력은 3,500명이며, 각 대대의 병력은 약400명 정도이며, 여단은 지휘부와 통신소대, 5개 상륙대대, 지원중대, 공병소대로 편제되어있다.

*공정 경보병 여단(항공 육전대) : 한국의 공수부대와 유사한 여단으로 총병력 3만명 가량으로 8개 여단이 있으며 군단외에 각 공정 경보병대대는 여단사령부에서 분리, 독립되어 항공기지나 고속도로, 활주로 인근지역에 배치되어있다. 이들 공정 경보병 여단의 임무는 남한내의 모든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공군기지 및 군제공항을 습격, 파괴 또는 확보하는 것이며 상륙작전을 지원하고 남한내에서 산악을 거점으로 유격전을 전개하는 것이다.

*제병연합 여단(혼성 여단) : 1952년 기계화 포병여단 또는 기동포 여단으로 불리다가 60년대부터는 독립 보병여단, 70년대 초에는 충격여단, 80년대 말부터는 제병과와통합된 제병연합 여단으로 발전한 여단이다.  병력은 대략 18,000~20,000명으로 추산되며 5개 여단이 있으며, 1개 여단의 병력은 3,500명 가량이다.  이 부대의 임무는 북한의 길고 취약한 해안선을 방어하고 강력한 화력과 기동력, 충격행동으로 휴전선지역을 강습돌파하며, 아군 후방 깊숙히 밀고 내려와 북한의 집단군단에게 공격축선을 형성하여 제공하고 아군 후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북한군의 여러 특수부대와 연결작전을 실시하기 위한 특수기동부대이다.


러시아

대통령 경호 특수잠수부대
정예의 전투 잠수부대는 1960년대에 창설되었으며 주요 임무는 강과 Moskva의 하수구등 지하 네트워크화하여 수중 공격에서 Kremlin을 감시 보호한다.
그들은 검은 하수구경비와 Kremlin 주위의 하수구와 강, Moskva을 검열하고, 인근 바다에서 대통령 거주를 보호하는 부대이다.

특별한 무기는 수중 사용을 위해 디자인된 특별한 수중 권총은 사냥꾼 소총것과 같이 반자동이며 탄알은 기이한 잠수부용으로 긴 바늘또는 " 못 " 이다. 못은 여섯개 에 17 미터의 거리에 깊이 밖히게 하여 죽일 수 있으며 수중에서는 칼도 무장하고 있다. 수중 전투의 기본 원리는 선제공격으로 승리하는 것이고, 물 압력이 잠수부를 혈액의 다량 손실하게 만들기때문에 가장 경미한 부상은 수중에서 치명적일 수 있다. 또한 이들 잠수부들은 예비 산소공급을 위하여 그들의 가슴에 작은 예비 풍선 붙여 가진다.

 

Vympel 특수부대
*창설 : Vympel (Pennant)의 창설의 결정은 소연방의 중앙 위원회에서 하였으며 최초 부대의 지휘관은     Eval    d Kozlov의 제독이었다.

*임무 : 정찰 - 파괴 활동, 투쟁, 시민 보호 소련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해외 진출한 상대국의 (수력발전, 원유사업. 원자력, 화학제품 등 및 기업활동) 정보수집 및 그밖의 국내 테러리스트와 게릴라들의 중요한 목표, 상 대의 파괴 활동가능성이 있는 중요한 목표의 보호의 감시등의 임무를 가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전쟁 동안에 부대원들은 조사, 자료 수집, 사보타주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1991년에 對 테러리스트 임무가 추가되었다.

*무장 : 맨투맨 전투를 위하여 호신술, 단검, 도끼등을 사용하며, 수송장비로는 각종 자동차 및 기갑 차량, 헬기, 비행기로 출동한다.   폭발물 제거 및 설치와 외국어는 어느 나라든 외국 언어와 학문, 전통및 관례등을 사전에 완벽하게 배우며 언어는 완전 독해력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Spetsnaz 특수부대
*창설 : 1950년대 초에 창설되었으며, 소속은 舊 소련 참모본부 첩보부(GRU)으로 베일에 쌓인 특별임무부대인 Spetsnaz가 서방측에 알려진 것은 1990년대 초에 알려졌다.  정식명칭은  Spetsialnoye nazranie 로 "특별 임무부대" 라고 하며 "양동부대"라고 불려지고 있다.

*임무 : 하늘과 바다, 육상으로부터 적에 잠입하여 사보타지, 테러, 적의 정부,군부요인 암살, 폭파, 정보수집, 적후방의 핵 기지와 지휘센터 등 주요목표물의 공격과 적을 혼란하게 만들어 전투력을 약화시킨다.

*무기 : Spetsnaz 군인의 대다수는 5.45mm AKS-74 자동소총 및 5.45mm PRI 소음기가 부착된 자동 권총, 컴배트 나이프, 수류탄 6발, 7.62mm 구경 유탄발사기등으로 무장을 하며 임무에 따라 SA-7휴대용 지대공 미사일 발사기, 지향성 지뢰, 폭약등으로 무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Spetsnaz 부대는 외국의 모든 형식의 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된다.
*선발 : 과거 舊 소련당시 징병제에서 현재는 지원제로 하고 있으며, 내무부 소속과 軍소속의 지원 방법에 있어서 다소 차이는 있다.

*훈련 : Spetsnaz의 훈련은 목숨을 거는 화학병기와 실탄을 사용하여 죽음에 이를정도의 훈련을 실시한다.

훈련과목은 잠입술, 정찰, 가상목표 포착술, 목표국의 언어와 습관, 가혹한 환경인 적후방에서의 생존, 위장술, 추적술, 다양한 수단의 사보타지, 격투기, 낙하산 강하등의 특수훈련과 스키, 등산, 심한 기본 체력훈련을 실시한다.  낙하산 강하훈련은 고정익 및 회전익기 등에서 스카이 다이빙에 고도낙하, 저고도낙하를 5~300번의 반복하며 필요시 100회 추가 훈련을 행해지며 이기술을 마스터하면 적 후방 약 50km 까지 발견되지 않고 잠입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사격훈련은 정지한 표적에 있어서는 소총은 480m, 기관총은 400m, 권총은 25~30m까지 정확하게 맞출정도이며, 이동표적은 소총의 경우 550m의 거리 표적을 명중시킬정도로 훈련을 감행한다.  또한 은밀한 작전을 위하여 단도 훈련을 실시하는데 8m 이상의 거리의 적을 단도를 던져서 무력화 시킬정도라고 한다.

이스라엘

Sayeret Mat'Kal

1967년 6일 전쟁이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게 되자 정규전으로 이스라엘에 대항할 수 없음을 자각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대 이스라엘 테러리즘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이에 이스라엘 정부는 정보국 산하에 사렛트 매트칼이라는 대테러리스트 특공대를 창설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당국은 자국 내에서 발생한 사건인 경우 자국민의 희생에 관계없이 무력으로 진압하고 국외에서 발생했을 경우에도 협상이 원활치 못하면 직접적 타격을 가한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다.
1968년 12월 PFLP에 의한 엘 알 항공기 납치에 대한 보복으로 40명의 사렛트 매트칼 정예 요원들이 베이루트 공항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여 13대의 비행기를 폭파하기도 했다.

사렛트 매트칼은 1972년 5월에 발생한 사베나(Sabena) 여객기 납치사건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여 최초로 대테러리즘 능력을 검증 받았다.
검은 구월단(Black September Organization) 소속의 테러리스트 4명이 사베나 여객기를 이스라엘의 로드 공항으로 공중납치하여, 탑승객 100명을 인질로 억류하고 이스라엘 정부당국과 대치했다.
납치범들은 이스라엘 감옥에 투옥된 371명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의 석방을 요구했고, 이에 이스라엘 정부는 국제적십자의 대표자를 협상 중개인으로 활용하여 시간을 벌었고, 그 동안에 구출작전을 준비했다.
항공기 정비 기술자로 위장한 사렛트 매트칼 요원들이 납치된 항공기에 은밀히 접근하여 테러리스트 2명을 사살하고 2명은 생포하는데 성공했다.
사렛트 매트칼의 구출작전은 최초의 성공적인 항공기 납치 구출작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인질구출작전의 대명사로 알려진 1976년의 엔테베 작전도 인질 구조팀이 제35공수여단과 골라니 코만도 대원들의 합동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사렛트 매트칼이다 



출처 :
http://nowworld.net/
http://www.i-gun.net
http://home.paran.com/jingyu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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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의 특수부대(or 대테러부대)에 대한 자료를 모아보았습니다.

사실 순위를 뽑아보고 싶었으나 아직 각 특수부대끼리 제대로 붙었던 자료도 없고(있어도 일반인은 알기가 힘들죠) 그냥 쎄다 싶은걸 뽑아보면.

영국 SAS - 위에도 나와 있지만 현대 특수부대의 효시입니다. 대테러부대의 성격이 짙은걸로 알고 있는데 오래된만큼 다양한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실전 참여 횟수도 많은걸로... '마스터 키튼' 만화의 키튼이 SAS 교관 출신인 것으로 나오죠.

미국 - 미국은 델타포스라던가 네이비 씰(우니나라 씰팀이 미국 씰팀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린베레 등등 일반인도 많이 들어본 팀이 많은 곳. 실력도 실력이지만 장비면에서 엄청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군요.

러시아 스페츠나츠 - 여긴 뭐 만화, 영화 할 것 없이 너무나 많이 알려진 곳이라 설명이 따로 필요없겠군요. 러시아같이 생긴 애들이 나이프 들었다 하면 다들 칼날이 튀어나올 것을 예상할 정도로 말이죠(아, 영화에서는 잘 안보이고 만화에서 자주 나오던가). 편제를 보니 거의 정규군에 필적할 만큼 숫자가 많은거 같기도...

프랑스 GIGN - 얘네도 상당히 유명합니다. 지금까지 한번도 작전을 실패한 적이 없다는 걸로도 유명하고... 아! 카운터 스트라이크 게임 해보시면 대테러리스트 팀 중에 GIGN도 있죠? 그 정도로 유명한 곳입니다. 딱, 대테러리스트 부대하면 떠오르는 부대가 SAS랑 GIGN이라고도 할 수 있죠.

우리나라 707특임대 - 여긴 저도 예전에 언듯 들었던 곳인데 읽어보니까 상당한 곳이더군요. 물론 UDT라던가 SEAL팀도 알아주지만 707특임대 자체가 워낙 스페셜리스트들이 모인 곳이라...

북한 - 북한은 무슨 특수부대가 거의 정규군에 필적할 정도로 많은 듯 합니다. 전에 본 기사에서 가상전쟁 시나리오에 따르면 그 많은 특수부대원들이 우리나라 후방지역으로 침투해서 엄청난 교란 작전을 펼칠 것이라고 하더군요. 우리나라도 물론 그러겠지만 엄청난 숫자에서 밀린다고 한걸 본것 같기도 합니다. 지난번 김정일 경호부대 훈련 동영상이 떠돈 적이 있는데 그들도 일종의 특수부대라고 본다면 정말 가히 살인적인 훈련을 받고 있는 듯 하더군요.

이스라엘 - 워낙 분쟁 지역에 있고 또한 테러리스트들의 다년간 표적이 된 곳이다보니 이곳 특수부대도 상당한듯 합니다. 그러고보니 영국도 IRA에 표적이 되기 때문에 특수부대가 오래전부터 있어온게 아닌가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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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해병대 특수수색대에 대한 글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좀 더 찾아보고 올리려고 했었는데 해병대 나오신 분이 기분이 상하셨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한게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해병대의 약화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몇마디 적겠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해병대는 일종의 선봉대입니다. 적이 주둔하고 있는 해안가에 가장 먼저 상륙하여 아군 상륙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일이죠. 그러니까 방어적 성격보다는 공격적 성향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 국군의 입장을 방어적으로 천명한 이상에는 해병대의 역할이 애매합니다. 해안 상륙을 통한 후방 교란 작전을 펼진다라고 보면 이미 수많은 툭수부대가 그 역할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수복할만한 큰 영토가 있어 침공을 하려고 한다라고 보면 해병대의 역할이 커지긴 하겠습니다만 주변 상황으로 봐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물론 해병대의 소속이 애매하여 더더욱 이리저리 치이는 경향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해병대의 약화를 설명하기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소련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Dora라는 열차포입니다.

엄청난 무게 때문에 열차 레일을 통해서 밖에 옮길 수가 없었다는군요. 

800mm 구경인데 그 위력이 40km를 날아가 떨어지면 작은 크레이터가 만들어졌다는군요.

20분에 한발을 장전할 수 있었다는데 사실 만들어지고도 별 쓸모가 없어서 먼지만 쌓였다고 하네요.







이정도면 포탄이라 부르기도 힘들다-ㅁ-

마지노선을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제작기간이 늦어지면서 별 쓸모가 없었고

그 크기와 무게 때문에 이동에도 많은 시간을 잡아먹어야 했답니다.

대충 이동시에 1400여명이 필요하고 조종수들만 500명 규모였다네요.

5t짜리 고폭탄을 사용하는데 발사음 때 주변에 특수 귀마개를 하고도 고막이 나가는 일이 잦았고

레일이 휘어서 공병대가 뛰어가서 열심히 펴야했다는...

규모의 미학이라고 할까요-ㅁ-

(그러고보니 맘모스 탱크던가? 무식한 탱크도 있었는데...)

세계 2차대전 당시, 1941년 건조된 전함 야마토는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무게 6만 5천톤 (완전 무장했을 경우 7만 2800톤)으로 사이즈만으로도 전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전함이었으며, (당시 가장 거대한 전함은 미국의 아이와호로 5만 8000톤이었다.)

장갑의 강도와 두께도 세계 최고, 거기에

14톤짜리 포탄을 발사하는 460mm 구경 주포는 (총 9문) 인간이 만든 모든 전함 주포 중 단연 최대, 그리고 최강이었다.



야마토의 도면




상공에서 찍은 모습. 전단에 6문, 후단에 3문짜리 주포가 위치해 있다.




출항 준비 중인 야마토. 주포가 웬만한 집보다 크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시점에 완성된 이 괴물은 

똑같은 급의 "자매 전함" 무사시(역시 야마토와 같은 사이즈에 같은 주포 화력을 갖고 있었다)와 함께 괴력의 선단을 구성, 태평양 바다를 누비고 다녔다.



태평양을 순항 중인 야마토 전함



야마토의 주 조종실 부분. 수많은 대공 포탑이 달려 있다.



1942년 중앙 태평양에서 미국 함대와 수 차례의 교전을 가졌고,

1943년 미군 스케이트 잠수함의 어뢰를 맞고도 침몰하지 않는 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더니, 그 뒤 성능이 더 개조돼 다시 전투에 나섰다.

그리고,

1944년 필리핀 레테 만 해전 사마 섬 해전에서 미군의 항공모함과 순양함, 그리고 수많은 폭격기와 전투기들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다.


수 차례 교전과 격전을 벌였다고 하지만, 야마토는 사실상 태평양 해전의 "얼굴마담"에 불과했다. 그 무시무시한 460mm 구경 주포를 쏴 본 것은 사마 섬 해전에서 뿐이었다.

이 주포의 위력이 소문만큼 대단했는지, 이때의 해전에서 미군 항공모함 한대와 순양함 세대가 침몰했다고 한다. (이 부분에 의견이 분분한데 영문 사이트에는 대부분 이렇게 기술돼 있습니다.)

이때의 필리핀 해전은 현대 해전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교전이었으며, 사실상 일본제국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은 "결정타"였다.

거센 미군의 공격에 야마토의 자매 전함 무사시가 침몰했고, 야마토도 주변의 호위함의 대부분을 잃은 채 수많은 포격을 맞고 패퇴해야 했다.

전함 무사시의 최후, 사진 기록에 의하면 시부야 앞 바다에서 침몰한 듯.



포탄과 어뢰를 맞고 휘청거리는 야마토



당시 야마토는 레테 만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최후의 (아마도 전세계 해전 역사상 가장 장관이 될 뻔했던) 일전을 치를 수도 있었으나, 당시 지휘를 맡았던 쿠리타 제독은 목숨이 아까웠는지 패퇴하고 말았고,

연합군은 이로서 2차 대전 승리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다.



1945년 4월 연합군은 드디어 일본 오키나와에 상륙해 일본 점령에 나선다.

이때 일본의 정상적인 행동은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고 평화적으로 항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이들은 "텐고"라는 작전명 아래, 오키나와에 상륙하는 연합군 선단을 공격하기 위한 자살 작전을 감행한다.

이때의 선봉에 선 것 역시 야마토.

야마토와 6대의 순양함은 1945년 4월 6일 오후, 목적지에 도착할 분량의 연료만 싣고(이들은 출항 당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자살 공격에 나간다.

이들의 움직임을 간파한 미 항공모함은 400대의 전투기를 출격시키고, 6대의 전함을 발진시켜 야마토 선단을 초전 박살내기 시작했다.

교전 후 2시간 만에, 6대의 순양함은 모두 침몰, 야마토는 10대의 어뢰와 수십발의 포탄을 맞고 폭발, 가라앉기 시작했다. (야마토는 침몰하면서 그 우스꽝스럽게 거대한 주포의 무게로 순식간에 뒤집혀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혼자서 집중포화를 받고 있는 야마토, 이 장면 뒤 수 분 안에 야마토는 바다 밑으로 침몰한다



야마토 호에 탑승했던 3000여명의 선원 중 구조된 사람은 300명에 불과했고, 나머진 모두 사망.

(이때의 교전으로 사망한 연합군 병사는 12명.)

문제는 야마토 호가 순전히 죽기 위해 출항했다는 사실을 안 사람은 야마토 호의 제독과 주종실 사람들 뿐이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최근 디스커버리 채널의 조사에 의해 재조명 됐다.)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는데,

일제는 수천명의 무고한 젊은이들의 목숨을 이렇게 바다에 내다 버린 것이다. 순전히 그 잘난 제국의 자존심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야마토의 이름은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하다.

일본 만화 영화에 나오는 우주전함 야마토가 바로 그 야마토인 것이다.










작가는 그 잘난 야마토 덕에 무고한 젊은이 수천명이 개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야마토는 스타크래프트 테란의 배틀크루저의 주포로도 등장한다.





야마토(大和)의 어원: 대화(大和)라고 표기되는 야마토란 말은 서기 4세기 전후, 일본의 야마토시대(다이케 시대)에서 기원한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 남단의 가야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가야는 적대 관계에 있던 신라를 치기 위해, 일본 본토에서 병사를 징병해, 신라에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다급해진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고, 5만에 이르는 대병을 이끌고 남하한 광개토대제의 도움으로 가야세력을 일소해 버린다.
 
하루 아침에 터전을 잃은 가야인들은 자신들의 세력권 아래에 있던 일본으로 건너갔고, 지금의 일본 나라 지방을 근거로 세력을 넓혀 야마토국(大和國)을 세운다. 당시 나라현의 지명이 대화(大化 다이케)였고, 나중에 국호를 대화(大和 야마토)로 하면서 야마토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일본 천황의 원류도 역시 야마토국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니, 한반도 가야의 지배층이 이후 일본의 지배층을 형성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인의 정신적인 지주 야마토라는 것은 바로 한반도에서 기원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출처: http://user.chollian.net/~hartmannshim/yamato.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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