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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USS 프로테우스 잠수함에 의해 인얀되고 있는 센토쿠. 미국 잠수함이 뒤에 가려 잘 안보이긴 하지만, 앞에 놓인 센토쿠 잠수함의 크기가 월등히 크다.


 


이 잠수함은 '센토쿠' 급으로서 종전시에는 미국 서해안 도시에 자체보유한 함재기를 사용해 페스트균을 투하하는 임무를 띠고 항해하다가 항복하였고 이 사진은 항복 후 미국 군함에 인도되는 모습입니다.

센토쿠급 제원

건조수:3척(모두 종전시까지 살아남음)
함명:I-400, I-401, I-402
준공연도:1944~1945년까지
배수량:수상5223톤, 수중6560톤
크기:400.3*39.3*23피트
동력원:디젤엔진 4기 7700마력, 전기모터 2400마력
속도:수상 18.75노트, 수중 6.5노트
항속거리:시속 14노트 항해시 37,500 해리
무장:533mm 어뢰발사관 전방에 8문(어뢰탑재수 20발), 140밀리 포 1문, 50구경 기관총 1정
최대잠수심도:100 m .승무원:144명
.



2차 대전 당시, 일본은 확실히 겉멋 들었던 듯하다.

야마토와 무사시에 이어 일본은 다시 세계 최대 규모의 잠수함을 만드는데 이름하여 센토쿠 잠수함.

센토쿠 잠수함 시리즈는 총 3개가 건조됐는데, 모두 미국에서 개발한 주력 잠수함보다 2배 이상 규모가 컸다.

단순히 규모만 컸던 것이 아니라, 잠수함으로서는 꽤 기발하고 혁신적인 기능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잠수함마다 총 3대의 폭격기를 싣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긴 비행기가 잠수함마다 3대씩. 

말 그대로라면 바다 속에 비행기가 잠수하고 다녔다는 얘기인데... 정말 그랬는데 아시는 분 답글 좀.

어쨌든, 센토쿠 잠수함의 주력 무기는 이 비행기였고, 비행기에는 800kg짜리 어뢰와 폭탄이 탑재돼 있었다. 즉, 물위로 나왔을 떄 해상의 적들을 섬멸하겠다는 의도. 비행기 출격까지 걸리는 시간은 45분.

잠수함에도 역시 25mm짜리 대공 발칸포가 달려 미국의 막강 공군력에 대항하고자 했으며, 4발의 어뢰, 3발의 폭탄, 12발의 비행기용 미사일까지 준비해 놓았다.

당시 이 잠수함의 설계는 워낙 혁신적이라 40년 뒤 소련의 잠수함 기술자들이 이 모델의 설계를 일부 도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겉멋이라 했던 이유는, 야마토와 마찬가지로 이 어마어마한 잠수함들은 실전에 거의 활용이 되질 못했기 때문. 워낙 전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던 탓.

센토쿠가 실전에 배치된 것은 전쟁이 거의 끝난 1945년 7월이었다. 전쟁터에 나가긴 했는데 나가자마자 전투가 끝나버린 것. 뻘쭘해진 잠수함들은 일본으로 돌아왔고, 전쟁이 끝난 후 그 중 2대가 미국으로 인양됐다.

이들 잠수함은 전쟁이 끝난 뒤, 석유에 허덕이던 일본을 위해 석유 공급용 화물 잠수함으로 이용하려 했으나 이 계획마저 취소되고,

센토쿠는 그야말로 전설속의 애물단지 무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각나라 항공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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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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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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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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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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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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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유조선)
 


그리스육군 AH-64 아파치A


미국 AH-64D 아파치


영국 WAH-64D 아파치


영국 WAH-64D 아파치


영국 Westland EH-101


헝가리 Mil Mi-24


호주 유로콥터 타이거


Mi-24 하인드


Ka-52



Mi-28 하보크


네덜란드 NAH-64D 아파치


AH-1 코브라



그러고보니 전투헬기가 아닌것도...;;;

아파치가 대세-ㅁ-

미사일이 개발되고 난 이후로는 폭격기의 쓰임새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으나
2차 세계 대전때만 하더라도 폭격기의 존재는 늘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히로시마의 원폭도 폭격기가 날아가서 떨어뜨린 것이죠.
물론 지금이야 대륙간탄도미사일이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아직도 대공망에 걸리지 않고 적진 깊숙히 침투할 수만 있다면
그 위력은 여실히 발휘되고 말지요.

아래의 폭격기들은 1,2차 세계대전 당시에 쓰였던 폭격기에서부터
최근까지 사용되었던 B-52 폭격기의 사진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B-1의 이름을 물려받은 B-1 랜서라던가
스텔스 폭격기인 B-2 스피릿을 소개해보록 하죠.
(아니면 초음속폭격기 Tu 시리즈라던가)




B-24 Liberator Club



B-25


B-26


B-29 Superfortress


B-32 Dominator


B-35 Flying wing


B-36 Peacemaker


B-37


B-38


B-39 Spirit of Lincoln


B-40 Flying Fortress


B-41


B-42 Mixmaster


B-43 Jetmaster


B-44 Superfortress


B-45


B-46


B-47


B-48 (XB-48로 보아 시험기 때의 사진인듯)


B-49 Flying Wing


B-50


B-51 Hustler


B-52






B-1 Lancer
B-52의 후속기종으로 개발되어 현재 배치되어 있는 기종입니다.
최대 속도가 마하 2.0으로 초음속기 답게 가변익이죠.
핵탄두도 탑재가 가능한 전략핵폭격기인데 아직까지 실전에 투입된 적은 없다고 합니다.







B-2 Spirit
스텔스기로 제작된 폭격기로 단독작전 수행이 가능한 전략폭격기입니다.
유령이라 불릴 정도로 은밀한 작전 수행이 가능한데 스텔스기라고 해서
레이더에 전혀 포착이 안되는 것은 아니고 새 한마리 정도로 포착된다고 하는군요.





Tu-22 Backfire
초음속기라는 점에서 한때 서방세계에 많은 두려움을 주던 폭격기 입니다.
구소련에서 개발되어 배치되었던 것으로 지금은 우크라이나 등 구소련에 소속되어 있던
국가들에 아직도 있다고 하더군요.
B-1과 같이 가변익기입니다.




Tu-160 Blackjack
B-1과 비슷한 모델이지만 저고도 침투능력은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가변익 초음속 폭격기입니다.





최신예라고는 하지만 모두 10년도 더 이전에 만들어진 모델들입니다.
60년대에 만들어진 B-52도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으니
이정도는 최신예라 할만한 폭격기들이죠.

◇ North American  P-51 Mustang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0. 5. 12

2차대전의 최우수 전투기를 꼽으라고 하면 많은 고려점이 있겠지만 종합적으로 P-51 머스탱이 최고의 전투기라는데에는 대개 아무도 이견을 던지지 않는다. 물론 제트전투기인 Me 262나 영국의 스핏화이어, 독일의 Bf 109등등 여러 기종들이 거론되지만 이런 주제로 2차대전사를 공부하다보면 결론적으로 '전쟁에 이긴 전투기' P-51 머스탱이 최고라는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뭐 긴소리 필요없이 하늘의 캐딜락 P-51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한다.

* 영국을 위해 태어난 북미의 야생마 *

1939년, 독일 루프트바페가 세계최강의 공군으로 그 위세를 자랑하면서 새로운 전쟁의 기운이 점차 온 유럽을 뒤덥게 되는가 하더니 어느새 독일이 주변 국가들을 무력으로 침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독일 공군에 대항할 유일한 유럽의 세력인 영국공군 (RAF)은 전투기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열심히 생산을 한다해도 독일에게 대항할 만한 전력을 갖추는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영국은 우호적이던 미국에 무기구매 사절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미국은 전쟁의 위협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유럽의 전쟁은 남의 이야기였고, 이때만 하더라도 미국이 참전하리라는 생각을 전혀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전투기의 개발에는 소극적이어서 영국 구매사절단은 허리케인정도의 성능을 가진 미국 최고의 전투기 P-40 토마호크를 구매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P-40의 제작사였던 커티스사는 영국측이 요구하는 만큼의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에 영국 사절단이 노스 아메리칸사를 방문하여 커티스사의 P-40을 좀 같이 생산해 주면 어떻겠느냐? 는 제안을 했다. 이런 자존심이 상하는 제안을 받은 노스 아메리칸사의 사장 제임스 킨델버거는 즉시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다.

"아니 천하의 영국공군이 겨우 P-40정도의 성능으로 만족하시는 겁니까? 우리에게 4달만 주시오. 그러면 P-40보다 훨씬 좋은 전투기를 만들어 드리죠."

킨델버거는 사실 새로운 신형전투기의 개발을 구상했으나 미군이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아 계획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황당한 킨델버거의 제안이 머스탱의 탄생 발단이었다. 당시의 기술수준으로 4달만에 신형 전투기를 만든다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음에도 영국측은 뭐 손해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국공군의 장성들과 협의후에 영국측은 1940년 5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보냈다.

"좋아요! 4달후에 정말로 좋은 전투기를 만들어 낸다면 즉시 3백대를 구매하겠소. 하지만 P-40보다 성능이 떨어진다면 이 계약은 파기요."

이렇게 머스탱은 탄생의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조국 미국이 아닌 영국을 위해서....노스아메리칸사는 하늘이 주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동분서주 했다. 불철주야 전직원들이 작업에 매달린 끝에 4달이 채안되는 1940년 10월 26일, 117일만에 하늘의 야생마가 탄생했다. NA-73이라고 명명된 시제기는 영국 관계자들이 보는 앞에서 시범비행을 실시했다. 최고속도가 P-40보다 시속 40km가 빠른 최고시속 640km를 기록했다. 일단 시험비행의 결과는 만족할 만한 것이었으며 영국측이 제시한 조건에 대부분 충족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과의 전투로 전투기 부족에 시달리던 영국으로부터 즉시 발주를 받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영국측으로부터 Mustang Mk. I이라고 명명된 (노스 아메리칸사의 제식명칭은 P-51A) 이 야생마는 320기의 발주를 받아 생산되는 족족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실려갔다.

1942년 영국공군 제 26 비행중대 소속의 머스탱 I 이다. 앨리슨 엔진을 장착한 기체이며 저공에서 정찰임무와 지상공격 임무에 사용되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기수 스피너 바로 뒤 아래쪽에 12.7mm 기관총이 보인다. 머스탱 I 형은 이처럼 기수에도 무장이 있었다. 주익에는 7.7mm 기관총 4~6정이 장비되어 무장은 강력한 편이었다. (이형은 미국에서는 P-51A로 불리웠음)

 

같은 기체의 상면도이다. 초기 머스탱의 캐노피 모양과 영국식의 실전도색을 잘 볼 수 있다. 이 기체의 엔진을 교체한 형이 mustang II 형이므로 외형상의 차이는 없다.

RAF의 조종사들은 새로 도입된 미국산 전투기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전반적인 성능은 만족할 만하며 확실히 P-40보다는 뛰어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고도 4000m를 넘어서면 앨리슨 엔진이 갑자기 출력 저하를 일으켜 독일 전투기와의 공중전은 무리였던 것이다. 따라서 영국측은  이 전투기를 대지상 작전용으로 한정해서 사용할 것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미군도 이 신형기의 공중전 성능을 테스트하였으나 영국공군에서와 같은 문제점이 발견되어 주력 전투기로 채택하지는 않았다. 단지 저고도에서의 우수한 성능은 인정되어 'A-36 아파치'라는 이름으로 급강하 폭격용 기체로 148기가 생산되는데 그쳤다.

* 계속되는 개량으로 다시태어나는 머스탱 *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면 이 전설적인 전투기는 평범한 전투기가 되었거나 급강하 폭격기 A-36으로 기억되버릴 신세가 되었을 텐데, 영국측이 이 야생마에게 새로운 날개를 달아주게 되었다. 영국의 기술진은 저공에서는 우수한 성능을 보여주는 이 전투기가 중간고도만 넘어서면 맥을 못추는 점에 주목했다. 여러가지 시험을 거친결과 기체자체의 설계는 매우 우수하며 중고도를 넘어섰을 때의 형편없는 비행성능의 원인으로는 미국제 엘리슨 엔진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기체의 엘리슨 엔진을 떼어내고 스핏화이어에 장비되던 머린 엔진을 달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에 머스탱 5기를 차출하여 당시 스핏화이어 Mk. IX에 사용되던 머린 61 엔진을 장착해 보았다. 1942년 10월 드디어 시험비행이 실시되었다. 그런데 하늘에 날아오르자마자 머스탱은 갑자기 돌변했다. 이 녀석은 고도에 상관없이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아다녔고 속도가 이전보다 50마일이나 빨라져 고도 7800m에서 시속 704km라는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기록한 것이다. 게다가 이 궁합이 척맞는 엔진을 장비하면서 연료통의 용량이 컸던 머스탱은 스핏화이어보다 3배나 먼 항속거리를 과시했다. 그야말로 미친 듯이 하늘을 질주하는 야생마 그 자체였다. 영국은 즉시 이 기체에 자국의 롤스로이스 머린 엔진을 달고 생산해 줄 것을 요구했고 이 환골탈태한 새로운 머스탱을 Mustang Mk. II라는 제식 명칭을 붙였다.

미 제 355 전투비행단 소속의 P-51B 이다. The Hun hunter from Texas 라는 이름을 기수에 새긴 것으로 격추대수 14 1/2을 기록한 헨리 브라운 대위의 기체이다. P-51B형은 사진과 같은 녹색 도색의 기체를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결과에 놀란 것은 미국측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에 빠져든 미군은 독일전투기에 대항할 쓸만한 전투기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갑자기 세계최고의 성능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자국산 전투기를 만난 것이다. 즉시 영국의 협조로 미국의 팩커드사에서 롤스로이스 엔진을 라이센스 생산하기로 하고 P-51B라는 제식명칭으로 2000기의 발주를 받아 양산에 들어갔다. 1943년 5월 드디어 첫 P-51B가 시험 비행을 했고 1943년 10월 제 354 전투비행단에 장비되어 전투에 투입되었다. 한편 미국은 영국식의 무장 (기수에 caliber 50 12.7mm 기관총 2정, 주익에 부라우닝 7.7mm 기관총 4~6정)과는 달리 주익에 caliber 50 기관총 4정을 장착하여 생산했다. 이후 주익에 연료탑재량이 늘어난 P-51C형이 생산되었고 무장도 주익에 Caliber 기관총 6정이 장착되어 강화되었다. P-51C형에 이르러서는 외부 연료탱크 채택으로 항속거리가 자그마치 최대 3347km에 달했다. 이 P-51B/C형은 총 3748기가 생산되었다.  영국측도 P-51B/C를 Mustang Mk.III라는 이름으로 계속 도입했다.

P-51B형의 정면 모습이다. 기수의 기관총이 사라지고 날개에만 4정의 12.7mm 기관총이 장착된 것이 보인다. P-51C형에 기총이 6정으로 강화되었다. 주익 파이런에 장착된 연료탱크로 인해서 더욱 먼 거리를 비행할 수 있어서 호위 전투기라는 임무에 매우 어울리는 기체가 되었다.

미군이 본격적으로 독일 지배하의 유럽에 대한 주간폭격작전을 시작하면서 B-17, B-24와 같은 중형 폭격기들이 스스로 충분히 방어를 하면서 폭격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애초의 기대와달리 독일 전투기들의 요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애초에 원거리를 비행할 수 있는 주간 호위전투기가 없었던 영국이 독일 전투기의 방어망을 폭격기만으로는 돌파할 수 없음을 통감한후 야간폭격에 전념했지만 미군은 자신들의 중폭격기들이 충분히 자체무장으로 독일 전투기들을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1943년 8월 17일의 슈바인푸르트 대공습작전에서는 B-17의 대편대가 용감하게 주간폭격 작전에 나섰으나 독일 전투기들이 대거 요격해와서 무자비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날 온통 미군 폭격기들은 독일 전투기들의 사냥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총 출격기 230기중 60기가 돌아오지 못했고 더 많은 기체들이 큰 피해를 입어 다시 출격할 수 없었다. 미군은 크게 당황하여 즉시 폭격기 부대를 보호할 호위전투기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이 먼거리를 전부 호위할 수 있었던 전투기는 없었다. P-47이나 스핏화이어는 항속거리가 짧아 프랑스 근처에서 되돌아와야 했으므로 미폭격기편대는 계속 무방비로 노출된 것이다.

호위임무도중 단독으로 독일 Bf 110 편대를 상대하여 괴멸시킨 유명한 미군의 유명 에이스 짐 하워드의 P-51B형이다. 시계 개선을 위하여 캐노피의 가운데 유리창이 볼록한 형태의 이른바 말콤 캐노피가 보인다. 그는 플라잉 타이거즈 소속으로 일본기 6기를 격추한 경력이 있어 2가지의 격추마크를 장식하고 있다. '딩 하오'라는 기체명도 중국에서 활동할 시절을 기념하여 붙인 것이다.

그러던 중 P-51이 나타났다. 이 머스탱의 최대 항속거리는 충분히 폭격기들을 호위하고도 남는 거리였던 것이다. 게다가 독일의 Bf 190이나 FW 190에 비해서 전혀 손색없은 공중전 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Caliber 50 12.7mm기관총 6정의 강력한 화력은 독일 전투기를 박살내기에 충분했으며 폭격기 요격을 위해 중무장을 하고 날아오른 독일전투기들은 중량문제로 전투기간의 공중전에서는 머스탱에게 열세였던 것이다.

머스탱은 얼마안가 은빛 날개를 휘날리며 전 유럽하늘의 지배자가 되어 버렸다. 독일 하늘은 온통 은빛의 머스탱들이 휘집고 다녔으며 전쟁이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수적으로도 독일전투기를 완전히 압도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머스탱들은 폭격기 호위라는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 독일전투기들을 찾아다니면서 격추시키는 자유추적 임무에도 투입되었다.

시미 III 라 이름 붙여진 본 기체는 제 325 전투비행단의 지휘관 체스터 슬루더 대령의 기체이다. 본 비행단은 꼬리날개에 체스판 마크를 도색하여 'Checkertail Clan'이라고 불리웠다. P-51C형은 외형으로는 P-51B형과 구분하기 힘들다.

더구나 우수한 독일 조종사들이 대부분 전사하여 미숙한 조종사들이 타고 날아오르는 독일의 Bf 109나 FW 190은 경험이 쌓여가는 미군 조종사들이 조종하는 머스탱의 밥이 되었다. 심지어 독일 비행장 상공에도 나타나 무자비하게 기총소사를 해댔다. 독일 전투기 조종사들은 은빛 날개의 머스탱을 만나게 되는 순간부터 폭격기 사냥꾼에서 쫒기는 먹이신세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물론 머스탱에게도 약점은 있었는데 냉각기에 한발이라도 피탄을 당하여 냉각수가 유출되는 경우에는 기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1944년 8월 미 제 487 전투비행단 의 지휘관이었던 존 메이어의 P-51D 이다. 그는 공중에서 24기를 격추했고 지상에서 13기를 격추했다. 그는 나중에 한국전쟁에도 참전하여 미그-15 2기를 격추하기도 했다. 후에 베트남전에서는 4성 장군으로 진급하여 전략 공군 사령부를 지휘했다.

 

* 유럽 하늘의 왕자가 되어...*

한편 P-51B를 실전에서 조종하던 조종사들은 차츰 시야에 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P-51B형의 레이저백(Razorback)형 캐노피는 조종사들의 후방 시야에 제한을 주었던 것이다. 영국에서 개발한 가운데가 볼록한 말컴 캐노피가 일부 도입되었으나 여전히 시야 개선에 관한 요구가 높아졌다. (일부 조종사들은 이 말콤 캐노피를 장착한 P-51B형이 P-51D형보다 더 우수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특히 영국의 신형 스핏화이어나 타이푼에 물방울 (bubble)형 캐노피가 도입되어 호평을 받게되자 노스 아메리칸사도 1943년 11월에 이르러 즉시 개선된 P-51D 형을 내놓았다.

P-51D형의 상면도이다. 기존형에 비해서 매우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주익에 6정의 12.7mm 기관총구가 보인다. 전쟁 말기에는 이런 은빛 무도장의 머스탱들이 전선을 누비고 다녔다.

기체의 디자인이 P-51B형에 비해서 매우 세련되게 바뀌었으며 새로 도입된 버블 캐노피는 시야에 관한 불평을 일소해 버렸다. 특히 P-51B형에서 일부 문제가 되었던 기관총의 잼현상은 모터를 사용한 급탄장치가 장착되어 해결되었다. P-51D형은 이후 대량 생산되어 계속 전쟁에 투입되었으며 영국군도 Mustang IV라는 이름으로 도입하여 사실상 전체 머스탱을 대표하는 기체가 되었다. 대부분의 군사전문가들은 P-51D형을 진정한 머스탱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숫자상으로도 머스탱의 총 생산기수 15586기의 절반을 넘는 7956기가 생산되었다. 이후 최대속도가 시속 784km에 이르는 궁극의 머스탱인 P-51H형이 제작되었으나 소수만이 제작되어 실질적인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제 301 전투비행단 소속 찰스 화이트 중위의 크리머스 드림이라는 이름의 P-51D이다. 이 기체는 전선에 최초로 배치된 P-51D형중 하나로서 캐노피 아래에 나체의 여성을 그려 놓아 유명해졌다.

 

제 2 전투비행단 소속의 프레디 오 대령의 기체이다. 그는 붉은 색 글자를 좋아하여 기체 큼직한 붉은 식별 마크를 도색했다고 한다.

 

North American P-51D Mustang

분 류

단좌 전투기

동 력

팩커드 롤스로이스 머린 V-1650-7 엔진 (1490마력)

최고속도

시속 704km

상승속도

분당 703m

항속거리

3347km

무 장

주익 - cal 50. 12.7mm 기관총 6정

(탄수 : 내측 2정 - 각 400발, 외측 4정 각 250발)

마치면서... 

2차대전의 전투기중 가장 우수한 전투기로 평가받는 머스탱은 대전 중반기부터는 하늘의 왕자였으며, 수많은 에이스들이 P-51을 타고 독일 하늘을 날아다녔다. 대전 전기간을 통털어 9100대에 가까운 적기들을 하늘에서 격파했는데, 이 수치는 적기 총 손실의 49%에 이르는 것이었다. 특히 연합군 전투기 중 가장 빠른 속도를 가졌던 머스탱은 독일의 제트전투기 Me 262가 큰 위협으로 떠오른 후에도 계속 임무를 수행하여 많은 수의 Me 262를 격추하기도 했다. 2차대전이 끝난후에도 많은 기체들이 세계각국에 공여되어 활동을 계속했으며 특히 한국전쟁에서도 우수한 기동성과 무장 탑재능력을 인정받아 지상공격의 임무에서 큰 활약을 했다.


  This dicument was updated at 2004. 1. 19

자료제공: 김완 (BaB)

○ 독일 공군의 실태 (1941년 2월 - 1942년 10월)

독일 공군이 RAF를 파멸시키거나 영국 국민의 사기를 꺾는데 실패한 것이 분명해지고 있던 1941년 초에는, 많은 전투기와 폭격기 비행단 (Geschwader)들이 영불해협으로부터 이동되었다.

[ 독일의 야간 전투기 (Bf 110, Ju 88) ]

독일 공군 사령관 헤르만 괴링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1941년 6월 22일로 확정된 소련 침공을 위해서 영국은 포기하고 있었다. 독일군이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게 되는 1차 대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히틀러의 약속은 있었지만, 1942년의 독일은 실제로 여러 전선에서 전쟁을 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프랑스와 노르웨이에서 영국과 싸우면서 소련, 북아프리카, 지중해에서도 싸우고 있었다.

대부분의 비행기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중동에까지 분산되어, 독일 공군은 한계점까지 갈라져서 있었다. 따라서 서부 유럽에서 RAF와 싸울 수 있는 비행기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독일 공군의 반격이 약화되자, RAF는 더 공세를 취해서 프랑스와 독일에 대한 야간 공습과 함께 프랑스 상공에 대한 전투기 주간 출격을 시작하였다. 이 폭격에 대항하여, 요제프 캄후버 소장이 지휘하는 특수 야간 전투기 비행대가 괴링에 의해 조직되었다. 침입해 오는 적 폭격기들을 탐지하고 야간 전투기들이 요격할 수 있도록 유도해 주는 "캄후버 라인"이라는 레이더 방어체계가 건설되었다.

메서슈미트 BF 110이나 융커스 JU 88과 같은 대형 쌍발기들이 야간 전투기로서 큰 성과를 올렸다. 괴링은 미국의 초기 주간 공습을 우습게보았지만, 영국본토 항공전의 에이스로서 독일 공군의 전투기 지휘관이 된 아돌프 갈란트는 다가오는 위험을 내다보았다.

자원이 풍부하고 독일 폭격기들의 행동 범위 훨씬 밖에 위치한 미국은 수 천 대의 폭격기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비행기들이 전부 영국에서 발진한다면, 독일 전투기들이 다른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에 독일은 괴멸되어 버릴 것이다.

[ 독일의 Flak 88 대공포(상당수가 열차 위에 설치되어 운용 되었다고 한다.) ]

갈란드는 또한 영국본토 항공전 이후에 폭격기 생산을 늘리는 대신에 독일 공군의 전투기 생산은 사실상 무시되고 있음을 알았다. 이것은 방어보다 공격을 중시하는 히틀러의 군사 전략에 의한 것이었다.

'미국의 초기 공습 기간 동안에 대공포 사수들의 형편없는 사격 솜씨는 독일에서 농담거리가 되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병사가, 집행방법을 선택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대공포 사격에 의한 죽음을 선택했고, 탑 꼭대기에 묶여졌다. 3명의 독일 대공포 사수가 3주일간 그에게 쏘아대었다. 사격수들이 그 병사를 끌어내리기 위해 가보니, 그는 한발도 맞지 않았으나 그 대신 굶어서 죽어 있었다.'

증가하는 미국의 위협에 대처하고 전투기 부대를 증강시키기 위해서, 갈란드는 새로운 조종사들이 실제 전투기 부대에서 작전 경험을 가지도록 하는 훈련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는 또한 독일 공군의 제 2인자이며 조달책임자인 에르하르트 밀히 원수를 설득하여, 전투기 생산을 1943년 중반에는 월 250대에서 1,000대로 증가시켰다.

"하늘의 새를 전부 없앤다고 해서 그 새를 멸종시킬 수는 없다. 알들과 둥지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 이태리의 줄리오 듀헤 장군, 비행기 공장과 다른 산업목표들에 대한 폭격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

 

[ 독일의 주력 전투기 Bf 109와 Fw 190 ]

그 당시, 갈란트는 메서슈미트 Bf 109와 포케불프 Fw 190이라는 두개의 우수한 전투기를 휘하에 보유하고 있었다. Bf 109는 이미 유럽점령의 전쟁 초기에 이미 성능을 입증하였으며, 최신형 109G는 더 강력한 엔진을 장비하고 거의 시속 400마일 가까운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새 엔진의 증가된 무게는 기동성을 저하시키고, 짧은 항속거리와 잘 손상되는 좁은 바퀴를 포함해서 Bf 109의 다른 문제점들에 추가 요인이 되었다.

1941년에 등장한 Fw 190은 세계 최첨단의 전투기로서 빠르게 인정을 받았다. Bf 109보다 더 빠르고 튼튼하며 기동성이 우수한 Fw 190은, 초기의 엔진 문제가 해결된 이후부터 독일 공군 비행대들에서 빠르게 사랑받는 기종이 되었다.

게다가 더 강력한 전투기 두 가지가 개발단계에 있었으며, 이들은 이제까지의 공중전에서는 전혀 등장한 적이 없는 종류들이었다.

○ "비밀 무기"들의 탄생

1930년대에는, 나치 통치하에서 전국을 휩쓴 반 지성주의, 인종 차별, 종교적 탄압에 의해서 독일의 우수한 과학자들 중 많은 수가 희생되었다. 독일 지도부들에는 이론 과학자들 보다는 기술자들이 훨씬 더 많아졌고, 연구개발 분야가 이 기술자들에 의해 주도되게 되었다.

[ He 178 (상), He 280 (하) ]

독일인의 "지적인 우월성", 군사적인 면의 강조, 기술을 중시하는 독일의 전통을 존중하는 나치의 정책에 의해서, 이 독일 기술자들은 새로운 전쟁용 기술의 개발에 크게 박차를 가하였다.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들이 정부의 후원으로 운영하는 연구소들이 전 독일에 설립되었고, 그중 비밀시설의 대부분은 독일 공군의 것이었다. 이 시설들에서는, 신형 비행기와 고체 연료 및 액체 연료 로케트, 제트 엔진 계획들이 1930년대 중반에 이미 설계 단계에 있었다.

1936년에, 에른스트 하인켈의 항공사는 제트 추진의 가능성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많은 실험 후에, 독일 최초의 제트 엔진인 HES 3이 개발되었다. 이 엔진을 사용한 시험기 He 178은 1938년 8월 24일에 세계 최초의 제트 비행을 실시하였다. 이것은 2차 대전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 후 이 비행기는 독일 공군의 기술 책임자인 밀히 원수와 에른스트 우데트 장군에게 시범을 보였으나, 놀랍게도 아무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독일 공군의 자원이 다른 분야에 쓰여야 하며 이런 비행기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He 178시험기에서 발전시킨 제트 전투기 He 280은 사장되고 말았다.

 

[ Me 262와 유모 004엔진 ]

다른 회사들도 자체 제트엔진 개발을 시작하여, 융커스도 독일 공군의 지정을 받아 1,300마력의 유모 004엔진을 1938년부터 개발하였다. 여기에 맞추어 메서슈미트 회사는 새로운 엔진에 맞는 비행기 개발을 의뢰받아, 영국의 전투 시기인 1940년에 시험을 시작하였다. 기체는 1년 후에 완성되었고, 신형기의 초기형인  Me 262 슈발베(Schwalbe), 즉 "제비"가 1942년에 첫 비행을 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발전이 아니라 큰 도약이다!"

- 독일 공군 아돌프 갈란드 장군, 1943년 5월 22일 ME 262 제트기의 시범비행 후 -

그러나 독일 항공 산업이 그전에 저지른 실패들에서 생긴 두려움과 불신 때문에, 이 제트 전투기의 초기 개발이 지연되었다. 또 다른 계획인 He 177 중폭격기는 계속되는 엔진 화재로 지연되고 있었으며, 그 실험형은 자주 공중 폭발을 일으켰다. (후에 He 177은 "독일 공군의 라이터"라는 뜻의 별명이 붙었다)

[ "독일공군의 라이터" He 177 ]

밀히 원수는 Me 262의 제트 엔진이 대량 생산에 들어간 후에 이런 문제를 일으킬까 염려하고 있었다. 게다가 많은 문제를 일으키다가 결국 취소되어 버린 Me 210 2인승 전투기로 인해서, 그는 사장인 빌리 메서슈미트를 불신하고 있었다. 원래는 Bf 110의 대체용으로 설계되었던 Me 210은, 기체가 불안정하여 스핀 (Spin : 기체의 회전현상)을 자주 일으켰음에도 생산에 들어갔다. 그러나 계속 추락사고가 발생하여, Me 210 계획은 결국 취소되고 말았다.

밀히는 이에 대한 대가로 메서슈미트의 Me 262개발을 중지토록 명령했다. 메서슈미트는 이 명령을 무시하고 비밀리에 Me 262계획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독일 공군의 제트기 개발 지연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 동안 메서슈미트의 회사는 더 혁신적인 비행기인 Me 163로케트 전투기도 개발하고 있었다. 독일의 로케트 실험은 1920년대부터 실제로 시작되어, 독일 로케트 협회라는 단체가 액체 연료 로케트들을 실험하였다. 같은 시기에, 자동차로 유명한 프리츠 폰 오펠은 고체 연료 로케트를 연구하고 있었으며, 1929년에 글라이더에 장착해 사용해 보았다.

[ Me 163과 발터로켓 ]

독일군 무장 개발 부서는 극비리에 액체 연료 로케트 개발 계획을 1929년에 수립하고, 베를린 남쪽에 시설을 갖추었다. 1939년에 나치가 권력을 잡은 후, 이 시설들은 발트해 연안의 페네뮌데로 옮겨졌다. 베르너 폰 브라운의 지취로 액체 연료 로케트가 개발되고 1936년 4월에는 피스톤 엔진 비행기인 He 112에 장착하여 시험 비행을 했다. 다른 시설에서는, 헬무트 발터가 과산화수소를 추진 연료로 하는 로케트 추진기를 설계하고 있었다. 1936년에 그는 알렉산더 리피쉬의 제안에 의해 삼각 날개 또는 꼬리 없는 비행기로 설계되고 있던 고속 실험기 "X계획"에 사용될 엔진을 개발하고 있었다. 발터의 새 엔진은 1937년 He 87복엽기에서 시험 비행에 처음 성공하였다.

1939년에 "X계획"은 메서슈미트사로 넘겨졌다. 1940년에는 리피쉬의 새로운 로케트 추진 실험기로서, DFS 194라는 꼬리 없는 1인승기가 시험 비행을 했다. 그 성능은 예상을 뛰어 넘었다. 장착된 발터 액체 연료 로케트 엔진은 최고속도 342마일, 상승속도 분당 5,300피트를 낼 수 있었다. 이 비행기는 생산이 결정되어, Me 163이라는 새 모델명과 코메트(Komet)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최초의 Me 163A는 1941년 8월에 비행하였으며, 두 달 후에는 시속 623마일의 속도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였다.

아직도 복엽기가 군용으로 사용되던 시기에, Me 262와 Me 163은 항공기술의 큰 도약을 이루었다. 전쟁이 임박하면서 더 추진이 가속되어, 독일 설계가들과 기술자들의 상상력은 최대한으로 발휘되었다. 그러나 독일 최고 지도자들과 독일 공군은 연합군과 제 8공군에 대해서 이를 어떻게 활용하였는가?

'폭격임무를 비행할 때, 사격수들은 적 전투기들의 공격 방향을 표시하기 위해서 "시계 자판" 체계를 사용했다. "12시"는 정면, "6시"는 바로 뒤쪽을 의미했다. 만약 사격수가 "2시 방향에 적기"라고 외치면, 전투기들이 정면에서 오른쪽으로 60도 방향에서 공격해 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동족상잔의 비극 - 한국전쟁이 끝난지도 어언 50년이 넘어 버렸습니다. 물론 당시 한국의 하늘에도 엄청난 규모의 항공전이 있었고 최초의 제트전투기간의 공중전이 벌어진 진기록도 항공전사에 기억되고 있습니다. 당시 미공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소련공군의 비밀무기 미그-15의 등장은 그야말로 한국전쟁 항공전의 최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이번 이야기는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으로 정전된이후 미그-15를 몰고 자유의 품으로 귀순한 한 한국인 조종사와 그가 몰고온 미그-15의 이야기입니다. 이번글은 불타는 하늘의 열혈 후원자이신 ihere님 (vincent@ti.com)께서 제공해 주셨습니다. 이런 좋은 내용을 찾아서 정리해주신 ihere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 미그를 몰고온 사나이

공식적으로, 한국전쟁은 끝났다. 양진영이 평화협상 테이블에서 조건을 협의 중이었다. 그렇지만, 38선 양진영은 언제라도 전투에 임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 귀순직후 촬영된 노금석 소위의 사진, 당시 북한공군의 복장을 잘 볼 수 있는 자료이다. ]

1953년 9월 21일 아침. 북한공군의 엘리트 미그기 조종사인 21세의 노금석 소위에게 있어서 오늘은 또 다른 삶을 위한 날이었다. 그에게 작전명령과 자료가 쏟아졌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질주중에 있었다. 오늘은 그가 소련의 최첨단이며 최고의 비밀병기인 미그-15기를 몰고 남으로 향하여 귀순하는 날이 될것이다.

그의 비행계획이 마침내 끝났을때, 노 소위는 그의 미그기를 남한의 김포 공군기지를 목표로 몰고 가기로 정하였다. 김포는 좋은 선택이었다. 38선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김포는 제4 전투비행대의 F-86 비행중대 그리고 제 67전술정찰대의 RF-86, RF-80, WB-26C 그리고 RB-26C 인베이더와 오스트레일리아 파견대인 제 77 RAAF 항공단의 기지이다. 이것은 거의 운명을 건 모험이다. 만약 미국이나 호주의 조종사들이 그의 미그기를 먼저 본다면 그는 확실하게 격추 당할 것이다.

노 소위는 기체번호 2057번인 미그기 조종석에 올라 재빨리 비행전 점검사항을 마쳤다. 그는 엔진의 시동을 느꼈다. 활주로로 나가기전에 그는 조준경의 아래을 보았다. 거기엔 빨간 글씨로 다음과 같이 써있었다.

“양키의 엉덩이에 분노의 총알을 남김없이 쏟아버리자!”

그는 쓰로틀을 잡아 당겼고, 오늘은 미국과의 전투가 없을 것이다.

* 남쪽으로

비행중, 노금석 소위는 남쪽을 향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과 유엔이 미그기와 함께 망명을 하는 어느 조종사에게도 10만불을 제공하겠다는 사실 따위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대신에 그가 떠난 이유는 간단했다 : 공산군의 기만에 지치고 싫증이 났기 때문이다.

갑자기, 그가 대형에서 이탈하고 자유를 향한 비둘기가 되었다. 서울은 DMZ에서 50마일 밖에 되지는 않았고, 그는 유엔의 영토로 최고 속도로 돌입을 했다. 그 때의 속도는 거의 550마일 이었고, 미그기는 1마일 6초에 달려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즉, 분계선을 넘어 긴장의 4분인 것이다. 그는 김포 비행장을 발견하고 하늘의 질서를 무시한 채 곧바로 향했다. 그는 정상적인 방법과는 다르게 바람이 부는 쪽으로 내렸다. 만약 이륙중인 F-86이 있었다면 부딪쳤을 것이다. 착륙하기에 너무나 빠른 속도였으나, 그는 해냈고, 마침내 땅위에 내려 앉았다.

그는 비행기를 활주로에서 빼냈고, 미그기를 세이버로 착각해 트랩 부근에서 손을 흔드는 지상 근무자를 보고 놀랬다. 모든 신호를 무시하고 그는 엔진을 끄고 칵핏에서 서서 항복의 의미로 두 팔을 들었다.

기지 저쪽편에 있던 십여명의 조종사와 항공기 승무원들이 미그기를 보았다. 그들은 정확하게 그것이 어떤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좀 더 자세하게 보기위해 짚차와 트럭에 타고 달려 왔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기를 가지고 왔다. 사진으로 역사의 한 순간을 잡고자해서 였다. 그 흥분된 순간이란 것은 확실했다. 김포 관제소는 이미 대응에 들어가 있었다. 미그기를 맞이 하기 위해 두 대의 주기중인 F-86에 오르던 조종사들은 다시 내렸다. 관제소는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비상 수단을 사용 하였다. 잠시 후 전체 제4비행단과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제 77 비행중대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각각의 중대가 차례로 날아 올라 기지 상공을 방어하기 위해 광범위한 전투 초계 비행에 들어갔다. 그후 바로 즉시 다른 중대와 다른 기지의 비행대에도 똑같이 비상체제에 들어갔다. 소련이나 북한 공군에게 김포 공항위에 놓인 미그기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 귀순직후 미군의 집중 경비를 받고 있는 미그-15, 도색은 벌써 미국식으로 바뀌었다. 자료의 설명이 부실해서 이곳이 김포비행장인지 일본의 가데나 기지인지 확실하지 않다. ]

기지의 전투 중대의 비상상태에도 불구하고, 김포는 벌집을 쑤셔 놓은 것 같은 상태 였다. 기지내 정찰중대원중 4명이 헌병대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미그기 옆에 서 있었다. 지금 이순간, 가까이 접근한 AP 기자의 플래쉬 라이트를 본 것을 느낀 순간 그들은 최대한 사진을 찍은 후에 그들의 짚차로 돌아가 가버렸고, 놀라 칵핏에 서 있는 조종사는 누군가에게 항복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지상 요원들은 가능한 빨리 비행기로 향했다. 제 11전술 정찰대 조종사중에 하나인 진 존슨 중위는 미그기를 봤을 때 활주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페달을 힘껏 밟은 덕에 그는 그곳에 도착한 몇 안 돼는 사람들 중 하나였고, 미그 조종사가 아직 미그기에서 나오기 전이였다. 사람들이 몰려 들기 전이었다.

헌병대는 제빠르게 지역을 소개했고, 조종사를 데리고 갔으며, 비행기를 숨기기 위해 가까운 격납고로 이동 시켰다. 수 많은 사진들이 그 광경을 잡았으며, 헌병대는 능숙하게 필름등을 회수 했다. 40년이 지나고, 라이트-페터슨 공군 전시관에 착륙한 후 나타난 그 비행기의 단 한 장의 사진을 전시하였다. 이 사진은 마침 그곳을 멀리서 지나는 트럭이 사진을 찍었지만 사진은 희미하게 나왔다.

최대의 효과는 미그기를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믿지 못하겠지만, 여전히 연료를 싣고 있었고 기관포엔 탄약이 고스라니 장전 되어 있었다. 사실 미그기는 최전방에서 전투 준비가 되어있었던 전투기로 크나큰 횡재였다. 수일내에 미그기는 사라졌다. 수송기에 실려 오키나와로 보내졌다. 테스트를 위해서.

* 오키나와에서의 시험비행

오키나와에서의 안전을 위해 미그기는 미공군의 마킹과 기체번호를 달았다. 비행중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미군은 이 비행기의 성능, 비행 특성, 그리고 능력을 알기 위해서 최고의 조종사 두 명을 착출했다. 미그-15는 미국의 F-86과 비교해 광범위하게 연구되어졌다.

그 최고의 시험 비행 조종사로는 H.E. 톰 콜린스 대위와 6년전 음속의 벽을 최초로 돌파한 C.E. 척 예거 소령이 선정 되었다. 콜린스가 첫번째 그리고 예거가 그 다음 비행을 하였다. 최초의 보고서는 성능과 수집된 자료로 작성 되었으나 더욱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 하였다.

성능 테스트는 몇 달간 계속 되었고 F-86과 비교하기 위해 다양한 고도에서 이루어 졌다. 연료 소비량, 하중, 거친 성능 시험과 그 외의 시험 자료들이 수집 되었다. 기관포는 총구 속도 및 사거리를 확인하기 위해 시험을 하였다. 가능한 빨리 수집된 자료가 운영중인 전투단들에게 전달 되었다.

이러한 성과와 함께 더욱 자세한 자료가 요구 되어졌다. 12월에 라이트 패터슨 공군기지로 극비리에 옮겨졌다. 그곳에서 미그기는 믿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연구 되어졌다. 볼트 케이블등 모든 요소요소가 분석되고 기록 되어졌으며, 연구 되어졌다. 그 결과는 지구상의 모든 미군 조종사들과 센츄리 씨리즈(F-100, F-102, -104)를 제작하는 항공업계들과 공유 되었다.

* 성능 및 특성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모든 면에 있어서 미그-15는 미국내 최고의 전투기인 F-86과 동등한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예리한 기동성과 가속성으로 도그파이터로선 더욱 나은 전투기였다. 그러나 최고 속도에 있어서는 F-86에 조금 못미치는 속력이었다. 미군 조종사들은 두 개의 전투기의 다른 성능이 서로 다른 잇점으로 이용 되었는지 결정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연구 결과중 미그기의 조종석이 히터 및 환경상의 시스템이 매우 열악하다는 것을 발견 했다. 만약 조종사가 높은 고도에서 비행장으로 급강하 한다면 캐노피가 흐려지면서 시야에 제약을 받데 된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높은 고도에서의 북한과 소련 조종사들의 만족도가 그들의 전투 능력을 방해 하였다.

미그기를 일직선상으로 강하 하였을 때 거의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 했다. 예거는 가파르게 강하 시험을 할 때 조종능력을 상실해서 거의 죽을 뻔 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입에서 입으로 미군 조종사들에게 퍼져 나갔다. 높은 고도와 추운지역에서 적과 조우 했을시에 만약 당신이 이탈을 해야 한다면 급강하하여 이탈해라.

이 시험에서 유일한 문제라면 미국의 기술자들과 시험요원들이 전체 비행대중 한 대의 비행기의 성능과 시스템을 추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험요인으로 알려 졌지만 기술자들은 다양한 모델들에서 근접한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느꼈다.  

소련 연방이 붕괴된 후에 수년이 지나서야 위험성을 알았다. 그외 미그기나 미그기 조종사들은 이제 분석을 하기 위해 공공연하게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미그-15는 이제 현격하게 구식의 전투기가 되었고 궁금증은 줄어들었으나, 한 가지 사실이 밝혀 졌다. 김포에 도착한 미그기는 완전한 상태의 것이 아니었다. 조종석의 히터와 환경 시스템이 고장난 상태인 것이었다. 게다가 다른 미그기 조종사들은 한결같이 미그-15가 높은 고도에서 편안하고, 잘 디자인되었고 히터 시스템이 훌륭한 비행기로서 기억을 하고 있다.

급강하시의 문제점에 대해선 정확한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 척 예거는 오키나와 실험뒤 수년 뒤에 소련의 미그 기술자와 만나 그 문제점에 대해 토의를 했었다. 그 기술자는 척 예거가 어쨋던 간에 급강하시 비행기의 콘트롤을 회복하고 살아났다는 사실에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설계상의 기본적인 결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항은 후에 17과 19에서는 개선이 되었다.

이상은 제가 자유세계에 최초로 안착한 미그기에 대한 이야기를 인터넷상에 있는것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걸 찾은 이유는 우선 척 예거 아찌를 하는데 노 소위 스토리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쇼킹한 사건이었으면 외국 게임에도 나올까? 하고서요.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인데다가 비행기와 전쟁얘기라면 눈이 벌개지도록 밤이 새는 지도 모를정도로 파고들었던 저가 모르는 얘기란 사실에 그만 충격을 받아서리...


foxmouse : 정말로 좋은 내용을 보내주신 ihere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이 노금석 소위의 이야기는 홈지기도 언젠가는 꼭 불타는 하늘에 올려야할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홈지기 역시 ihere님처럼 '척예거 아찌의 공중전'에서 처음으로 이 노금석 소위의 이야기를 접했지요. 이당시 미군은 미그를 몰고 귀순하는 조종사에게 당시돈으로 10만달러라는 거금을 현상금으로 내건 일명 '무라 프로젝트'를 추진중이었 다고 합니다.

그러나 뒷이야기를 알길도 없고 그때의 자세한 전말에 대해서 궁금했었습니다.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신 ihere님께 다시한번 감사를~~~~!!!

한가지 재미있는 것이 척예거를 보면 미션 설명중에서 이 북한 조종사의 이름이 '노금석'이 아니라 '김석호'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것이 맞는 것인가 했는데 이게 노금석을 미국식으로 표기하니깐 '금석-노'가 되었구요. '금'자를 한자로 쓰니까 나중에 '김'이라고 읽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노(Ro)를 누가 호(HO)로 잘못 옮겨 적은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김석호'라는 전혀 엉뚱한 이름이 척예거의 공중전 매뉴얼에 올라있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나 잘못 알고 계셨던 분들은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아두면 좋겠습니다.

      ◇ Republic F-84 Thunderjet ◇

 

한국전쟁에서 F-86 세이버만큼의 유명세는 얻지 못했지만 치열한 전투에 휘말린 지상군을 지원하는데 있어서는 최고의 항공기로 꼽혔던 것이 F-84 썬더제트이다. F-84는 지상공격에 있어서도 빠른 속도의 고속 제트전투기가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실증한 기체였다. 불타는 하늘의 Great War Planes.... 이번회에는 전장에서의 높은 신뢰성과 빠른 속도 그리고 강력한 타격력으로 조종사들의 사랑을 받았던 전장의 날쌘돌이 썬더제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 제트엔진을 가진 썬더볼트의 후예 

2차대전의 명전투기 썬더볼트를 제작했던 리퍼블릭사는 전쟁이 끝나가자 전후의 창공의 주역은 제트엔진을 장착한 기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으며 1944년 말부터 제트기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최초의 방안은 P-47의 동체를 변형하여 제트엔진을 장착하는 것이었지만 커다란 성형엔진을 위해 설계된 P-47의 통통한 동체는 도무지 제트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리퍼블릭사는 결국 전혀 새로운 기체로 설계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 YP-84 원형 2번기, 혁신 적인 날씬한 동체가 기존의 리퍼블릭사의 프로펠러기들의 육중한 이미지와 상반된다. ]

그리하여 이 신형기는 P-47의 후예로 설계되었지만 P-47과는 전혀 개념이 다른 가느다란 동체에 얇은 직선익을 채택한 새로운 기체로서 태어나게 된다. 후에 한국전장에서 선보인 F-84의 날씬한 동체의 비결은 제네럴일레트릭사의 TG-180 (J35) 엔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이 엔진은 이미 비행을 시작한 F-80이 채택한 엔진보다도 작은 직경을 가지면서도 더욱 강력한 파워를 낼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엔진을 장착한 신형기의 동체는 가늘어졌으며 항력을 감소시키는데 더욱 유리한 조건을 얻게 된다. 설계팀은 이 동체의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기흡입구를 기수의 정면에 배치하도록 하였다. 조종석에는 시야 확보를 위해서 물방울형의 캐노피를 설치하고 여압시스템과 사출장치를 설치했다. 이 신형기는 XP-84로 명명되어 미공군의 시험비행에 참가할 자격을 얻게된다.

[ 역시 리퍼블릭사가 제작한 원형기중의 하나로서 YP-84a-45-58482라고 명명된 기체이다. 빠른 속도를 얻기위해 공기 흡입구가 측면에 설치되었으나 별 소득이 없어 채택되지 못했다고 한다. ]

1946년에 실시된 시험비행에서 XP-84는 해면고도에서 시속 960km의 최고속도를 선보였고 12분만에 3만5천 피트까지 상승하는 놀라운 성능을 보여주었다. 미공군은 이 전투기를 정식으로 채용하기로 결정했으며 리퍼블릭사는 자사의 전투기에 '천둥 (thunder)'이라는 단어를 적용하는 전통을 적용하여 P-47 썬더볼트의 후예를 의미하는 썬더제트 (thunderjet)라는 별칭을 붙이고 즉시 양산체재로 들어갔다. 

최초의 양산형은 1947년부터 생산된 P-84B형으로 앨리슨사의 J35-A-15C엔진을 장착하고 있었으며 고정 무장으로 6정의 12.7mm 기관총을 장착하고 있었다. (기수에 4정, 주익연결부에 2정) 이후 엔진을 신형 전기장치를 갖춘 J35-A-13C로 교체한 F-84C형이 생산되었으나 곧 또다시 J35-A-17D의 신형 엔진으로 교체한 P-84D형으로 이어진다. 이때까지의 변화는 엔진의 교체말고는 없었다.

[ 정식으로 공군에 채택된후 양산된 F-84E형, 당시의 주력기이던 F-80을 능가하는 성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어 큰 기대를 받았다. ]

1948년 미공군은 전투기의 제식기호를 P에서 F로 변경하였으며 마침 때맞추어 F-84E형이 제작되게 된다. 이 E형에는 몇 가지 새로운 기술이 적용되었는데 정확한 사격이 가능하도록 APG-30 레이더 조준기를 장착하게 되었으며 주익의 끝단에 230갤론의 연료탱크를 고정 장비하게 되었고 동체를 12인치 늘려서 조종석의 공간을 넉넉하게 확보했다. 특징적으로 동체아래에는 인입식의 JATO (jet assisted take off) 연결장치를 설치했는데 이 JATO를 사용하면 최대 이륙중량을 22460파운드까지 늘릴 수 있었다. (사실 이 보조 추진장치는 일종의 로켓이었기 때문에 RATO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국하늘의 천둥

이 F-84E는 한국전쟁이 발발할 무렵 미공군의 6개 항공단에서 사용 중이었으나 한국전쟁 초기에는 미공군 사령부에서는 제5 공군이 가지고 있는 F-80만으로도 충분할 것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에 고성능의 F-84를 파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미 본토에서만 운용되었으다.

[ 미그-15의 등장에 따라 긴급하게 한국으로 보내지기 위해서 항모에 탑재중인 F-84E, 그러나 공중전에서는 역부족이었다. ]

그러나 1950년 11월 소련공군의 비밀무기 미그-15의 등장으로 항공전의 판도가 큰 변화를 겪으면서 F-80을 능가하는 신형기들이 긴급하게 필요하다는 한국 주둔 미공군의 요청으로 F-86A 세이버와 함께 F-84E 썬더제트도 태평양을 건너 파견되었다. 최초의 F-84E부대는 제27 전투비행단으로 기존에는 F-82G 트윈머스탱을 장비하고 있던 부대였다. 당시 이 부대의 임무는 B-29의 호위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미그-15의 성능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아서 F-80보다 성능이 뛰어난 F-84 썬더제트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1951년 1월 21일 F-84E가 최초로 미그-15를 격추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경우 후퇴익을 가진 미그-15에게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더구나 B-29의 호위 임무에 투입된 F-84의 경우는 미그-15의 빠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 치고 빠지는 미그-15들을 제대로 막아낼 수 없었다. 결국 F-84는 미그기와의 공중전에서는 역부족임을 실감하고 지상공격 임무로 돌려지게 된다. 그러나 F-84 조종사들은 미그-15와 조우하는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공중전에 임했으며 조종사들의 뛰어난 기량으로 한국전쟁이 끝날때까지 9기의 미그-15를 잡아내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보다 갑절이 많은 18기의 썬더제트가 미그-15에게 희생되었다.

1953년 대구비행장을 베이스로 지상공격 임무에 투입되고 있었던 미공군 제49  전투폭격비행단 소속의 F-84E이다.

* 썬더볼트의 명성을 이어...

이후 미공군은 미그-15와의 공중전은 전적으로 F-86 세이버가 담당하도록 했으며 F-84는 지상공격임무에 투입하도록 했는데 여기서 F-84의 지상공격능력이 빛을 발하게 된다. 특히 1951년 7월경부터는 더욱 추력이 강한 J35-A-29 엔진을 장착한 F-84G가 전선에 투입되어 F-84E와 함께 맹활약했다.

[ JATO 이륙중인 F-84E, 1951년 대구 비행장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

썬더제트는 슈팅스타에 비해서 속도가 빨라서 대공포화에 피탄될 확률을 줄일 수 있었으면서 무장 탑재력도 쓸만했으며 F-80에 비해서 빠른 속도와 경쾌한 기동성을 가지고 있어서 임무 수행중 미그-15의 기습을 받더라도 효과적인 회피가 가능했기 때문에 생존률이 높았다. 게다가 F-84G형에 이르러서는 항속거리가 무려 3000km를 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장시간 전장의 하늘에 머물러 있을 수 있어서 많은 조종사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것이다. 마치 2차대전 당시 지상공격임무에서 맹활약했던 P-47 썬더볼트의 명성을 떠올리게 만드는 활약상이었다.

[ F-84의 무장능력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주익에 로켓탄과 동체 하부에 2발의 폭탄을 장착하고 전선으로 출격하기 위해 대기중인 모습이다. ]

F-84의 평가가 높아지고 F-51이 점점 구식으로 되어가면서 곧 지상공격 임무를 맡은 많은 전투폭격기대대가 F-51이나 F-80에서 F-84로 기종 개편을 시작했다. 한국 전쟁 중 F-84는 총 86400회의 출격을 감행했으며 총 56000톤의 폭탄을 적진에 투하했다고 한다. 한국 전쟁에서 F-84의 총 손실대수는 122기로서 미그-15에게 격추 당한 18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저공에서의 임무수행도중 대공포화에 희생되었다.

Republic  F-84G  Thunderjet

분 류

1인승 전투폭격기

동 력

앨리슨 J35-A-29 터보제트 엔진 (추력 5600 파운드)

최고속도

시속 1001km

상승속도

10670m 까지 7.9분

항속거리

3217km (외부 연료탱크 장착시)

무 장

기수 - 12.7mm 기관총 4정

* 후퇴익의 천둥

사실 리퍼블릭사는 노스아메리칸사가 후퇴익의 신기술을 적용한 F-86의 개발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서 내심 경계하고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후퇴익의 기체는 저속에서 불안정성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 때문에 항공기 개발사들이 도전을 기피했지만, 고속 제트기의 시대에 후퇴익의 주익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퍼블릭사는 F-84의 생산을 계속하면서 남몰래 F-84의 후퇴익 버전의 개발을 1949년경부터 추진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F-84E의 동체를 기본으로 해서 주익을 38.5도의 후퇴익으로 변경하는 것이었는데 리퍼블릭사의 자체코드는 XF-96A이었다.

[ 후퇴익을 가진 F-84F 썬더스트릭, 그러나 등장시기가 늦어 한국전쟁에 참전하지는 못했다. ]

그러나 이런 야심찬 계획과는 달리 실제로 시험비행을 실시했을 때 그 성능이 F-84E를 상회하기는 했지만 F-86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 미공군의 발주를 받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여 계획 자체가 취소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발발한 한국전쟁이 이 기체에게 다시 태어날 기회를 주었다. F-84E의 지상공격능력에 고무된 미공군이 더 성능이 뛰어난 후퇴익 공격기의 개발을 리퍼블릭사에 요구한 것이었다. 이로서 이 시험기는 XF-84F라는 코드로 변경되어 다시 개발될 수가 있었다. 이 신형기에 큰 기대를 걸었던 리퍼블릭사는 '썬더스트릭'이라는 새로운 별명까지 부여했다.

1959년 그리스 공군 소속의 F-84F이다. F-84F는 소련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전력으로 미국이 적극적으로 원조형식으로 NATO회원국에 공급하였다.

그러나 이 신형기는 몇 가지 기술적인 문제점들과 장착이 예정되었던 J65 새파이어 엔진의 면허 생산이 지연되면서 개발이 늦어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미공군은 전장에서의 F-84의 수요가 모자르게 될 것을 걱정했고, 리퍼블릭사에 F-84F가 개발될 때까지 시일이 오래 걸릴 것을 감안해서 리퍼블릭사에 기존의 F-84E를 베이스로 추력을 5800파운드로 강화한 J35-A-29 엔진을 탑재한 기체를 생산해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것이 썬더제트의 최후기 모델인 F-84G형이다. 그러니까 F-84G는 형식번호는 F형보다 뒤였지만 F-84F가 개발될 때까지만 잠정적으로 생산되기로 했던 직선익의 모델이었다.

1962년 터키 공군 소속의 F-84G형이다. 형식번호는 G형이지만 F형보다 머저 생산된 직선익의 기체로서 F-84E와 겉으로는 구별이 어렵다.

하지만 F-84F는 계속 개발이 지연되어 1952년말에서야 시험비행을 실시할 수 있었고, 결국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실전배치 되지 못했으며 결국 F-84G가 한국전쟁에서 가장 맹활약하게 되었다. F-84G는 F-84E에 비해서 지상공격능력을 더욱 강화한 기체로서 시속 1000km까지 이르는 속도로 고속 공격기로의 이미지를 굳혔으며 제트전투기로는 최초로 공중급유 장치를 장비하고 전술핵탄두를 장비 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게 되었다. 특히 F-84G의 날렵한 기동성은 공중곡예에도 적합한 것으로 평가받아 1953년 발족한 미공군 곡예비행팀 '썬더버드'가 최초로 장비한 기종으로도 유명하다. 이 곡예비행팀이 썬더버드로 명명된 것은 F-84G의 별명인 썬더제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였다.

[ 미공군 곡예비행팀 썬더버드의 최초 사용기체가 되는 영광을 얻게된 F-84G, 물론 이것은 F-84가 가진 민첩한 기동성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이후 한국전쟁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후퇴익의 F-84F는 F-86보다는 성능이 뒤떨어져 미공군의 주력 전투기 경쟁에서는 밀려났지만 지상공격기로서는 인정받아 2000기 정도가 생산되었고 많은 물량이 나토 회원국과 그 외의 우방국들에게 수출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썬더스트리크는 후퇴익의 형태로 인해서 이후 제작된 많은 항공 영화에서 미그-15의 대역을 맡기도 했었다.

Republic  F-84F  Thunderstreak

분 류

1인승 전투폭격기

동 력

앨리슨 J65-W-3 터보제트 엔진 (추력 7800 파운드)

최고속도

시속 1125km (마하 0.91)

상승속도

분당 2630m

항속거리

3770km (외부 연료탱크 장착시)

무 장

기수 - 12.7mm 기관총 6정

[ RF-84F 썬더플래시, 고속 정찰기형으로 공기흡입구가 동체 양측에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

그외에 F-84F의 독특한 변형으로 RF-84F 썬더플래시라는 기체가 있는데, 이 RF-84F는 F-84F가 가진 고속 성능을 이용하여 적진 상공을 고속으로 돌파하면서 사진을 촬영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고속 전술 정찰기로서 개발되었으며 정밀한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기수에 고성능 카메라를 장착하도록 설계되었고 따라서 공기흡입구가 주익 연결부위로 이동 배치되어 마치 다른 전투기처럼 보이기도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1958년 서독공군에서 사용중이던 RF-84F이다. 당시 서독공군의 마킹을 잘 볼 수 있다. 옆에서 보면 F-84와 유사한 실루엣을 가지고 있다.

* 마치면서...

비록 F-86 세이버의 명성에 가려 썬더제트의 존재는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F-84 썬더제트는 한국전쟁에서 지상공격임무를 맡았던 조종사들이 가장 타고 싶어했던 기체였으며 그 견고함과 신뢰성으로 인해서 많은 조종사들이 전장에서 피탄된 후에도 생환할 수 있었다. 썬더제트는 2차대전에서 맹활약했던 P-47 썬더볼트의 영광을 이어받았으며, 훗날 베트남전에서 지상공격기로서 맹활약하게되는 F-105 썬더치프에까지 이르는 리퍼블릭사의 명전투기 계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된다.


 

◇ Grumman F9F Panther ◇

 

항공전에 제트기의 시대가 활짝 열렸던 한국전쟁에서 한국해역에 전개했던 미해군 기동부대 역시 북한지역에 대한 항공작전에서 맹활약했다. 특히 항공모함의 함상에도 제트 전투기가 새로이 선을 보였으니 그 주력은 F9F 팬써였다. F9F는 그라만사가 제작한 첫 번째 제트기이자 해군기로서는 최초로 미그-15를 격추한 기록도 가지고 있는 기체였으며, 미그-15와 격전을 벌인 F-86 세이버의 명성에 가려 그 활약상이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공군의 F-80처럼 전쟁 초기부터 묵묵하게 임무를 수행했던 한국전쟁의 숨은 공로자였다. 불타는 하늘의 Great War Plnanes...  미해군의 제트 고양이 F9F 팬써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 함상에도 제트기의 시대로... 

2차대전이 끝난후 한달이 지난 1945년 9월, 미해군은 다가오는 제트시대에 맞추어 항모에서 작전이 가능한 제트기를 원하고 있었다. 미해군의 요구사항은 레이더를 장착하고 승무원은 2인이 탑승해야하며 야간에 작전이 가능한 제트 전투기였다. 더글러스와 커티스사가 이 프로젝트에 뛰어들었으며 해군 항공기의 명가를 자부하던 그라만사는 한발 늦게 이 경쟁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 주익에 로켓탄을 장착하고 비행중인 F9F-3 팬써, 전면이 짙은 청색으로 한국전쟁당시 미해군 팬써의 전형적인 도색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

사실 그라만사는 전쟁중에 제트전투기를 연구해본 경험이 있었는데, F6F와 F8F의 동체를 베이스로 제트엔진을 장착해서 시험 비행을 실시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로펠러기였던 F6F나 F8F에 장착된 제트엔진은 별 성과를 보이지 못했으며 그라만사는 2차대전중에는 제트기의 개발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었던 것이다.

뒤늦게 해군 제트기 개발 경쟁에 참가한 그라만사는 F7F 타이거캣 공격기의 동체를 베이스로 해서 주익의 엔진을 제트화시킨 G-75라는 자체 모델을 구상했다. 이 모델은 제트엔진 2개를 주익에 장착하고 4문의 20mm 기관포와 기수에 레이더를 장착했으며 XF9F-1이라는 제식 기호를 달고 미해군 제트전투기 개발 경쟁에 참가했다.

[ F9F 팬써의 조종석 사진 ]

애초에 미해군은 커티스사가 제시한 안보다는 더글러스사가 제안한 XF3D-1에 관심을 보였으나 막상 이 기체가 날아올랐을 때 애초에 해군이 요구하던 사항에 많은 부분에서 도달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면서 해군 당국은 실망을 금치 못하고 이 XF3D-1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서 그라만사에게 XF9F-1의 개발을 계속 추진 할 것을 요구했다.

이로서 그라만사는 개발도 하지 못할 뻔한 위기에서 벗어나 2기의 XF9F-1 원형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XF9F-1은 더글러스사의 XF3D-1에 비해서 덩치가 크고 무거워서 미해군이 실시한 비행 테스트에서 전반적으로 XF3D-1보다 뒤지는 성능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실망한 미해군은 이 기체를 형편없는 물건이라고 혹평했으며, 그라만사는 이 경쟁에서 탈락할 위기에 몰렸다.

[ 팬써의 정면모습, 기수에 보이는 4문의 20mm 기관포구에서 강력한 화력이 느껴진다. ]

하지만 그라만사는 이무렵 2인승 야간 제트기 프로젝트와는 별도로 1인승 단발 제트기를 설계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G-79라는 자체 모델명을 가진 기체였다. 이 기체는 동체에 1기의 영국제 롤스로이스 넨 제트 엔진을 장착하고 있었던 단좌 전투기로서 개발이 추진되고 있었는데 XF9F-1에게 실망한 해군의 관심을 따내기에 충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롤스로이스 넨 엔진은 소련에도 수출되어 미그-15에 장착되게 된다.) 이로서 그라만사는 이 기체에 XF9F-2라는 새로운 제식기호를 붙여 미해군의 제트 전투기 경쟁에 계속 참가했다. 그라만사는 이 기체에 엘리슨사의 J33 터보 제트엔진을 선택했으며 주익 끝단에 고정식 연료탱크를 붙이기로 하였으며 사출식 조종석을 설치했고 4문의 20mm 기관포를 고정 무장으로 선택했는데 기관포 1문당 190발의 기관포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 미해군 곡예비행단 블루 엔젤스의 F9F 팬써, 이로서 블루엔젤스의 역사에도 제트시대가 열렸다. ]

이후 몇 가지 테스트를 거쳐 나타난 문제점이 해결되자 1949년 8월 최초의 F9F-2가 창공으로 날아올랐으며 똑같은 기체에 플랫 휘트니사의 J42 엔진을 선택한 F9F-3 모델도 같이 개발되었다. 미해군은 이 기체의 성능에 크게 만족하여 주력 함상 제트기로 F9F-2/3를 선택했으며 그라만사는 자사의 기체에 고양이과의 동물 이름을 붙이는 전통에 따라서 팬써 (panther; 표범)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1949년 봄이되면서 실전배치가 추진된 F9F-2/3는 최초의 기체들을 미해군의 곡예비행팀 블루엔젤스에 납품하는 것을 시작으로 미해군 전투기 부대에 공급되기 시작했는데, 실전 부대로는 VF-51이 최초로 제트 전투기를 운용하는 영광을 얻었다.

1951년 한국해역에서 활약중인 VF-781 소속의 F9F-2B 팬써, 짙은 청색에 붉은색의 기수를 특징으로 하는 전형적인 한국전쟁중의 도색이다.

 

Grumman F9F-3 Panther

분 류

1인승 함상 전투폭격기

동 력

플랫 휘트니 J42 터보제트 엔진 (추력 6125 파운드)

최고속도

시속 948km

상승속도

분당 1144m

항속거리

1842km

무 장

기수 - 20mm 기관포 4문

* 한국 해역으로...

[ 어레스팅 후크를 펴고 항모에 착함 준비중인 팬써, 한국해역에 전개했던 항모 박서 소속의 기체이다. ]

1950년 6월,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미해군은 즉시 F9F를 장비하고 있던 VF-51, 52 를 동원하여 한국해역으로 전개했다. 선발로 파견된 항모 밸리포지에서 작전을 시작한 VF-51은 7월 3일에 시작된 평양비행장 공습작전에서 2기의 야크-9을 격추하여 첫 번째 격추기록을 올리게 된다. 이후 F9F는 지상공격 임무를 주로 수행하여 북한군에 큰 피해를 주었으며 항모에 탑재되어 작전했으므로 주로 북한 지역에 대한 공습작전에 참가했다. 항공모함에 실려 작전하는 함재기의 특성상 F9F는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에 대한 근접 지원보다는 주로 북한의 후방 지역에 대해서 공격하는 임무에 주로 투입되었으며 따라서 북한에게는 언제 뒤통수를 치러 날아들지 모르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때까지 북한공군이 보유했던 야크-9과 같은 전투기들은 F9F에 적수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작전에 방해가 되는 요인은 거의 없었다.

[ 출격 준비중인 F9F 팬써, 주익이 완전히 접혀 공간을 활용하는 함재기의 특성을 잘 볼 수 있는 사진이다. ]

그러나 1950년 11월 미그-15가 출현하면서 F9F의 한국상공에서의 우세는 큰 위협을 받게된다. 후퇴익의 미그-15는 속도도 훨씬 빨랐고 경량이어서 기동성에서도 우위를 보였던 것이다. 미해군은 미그-15가 출몰하는 지역에는 F9F를 투입하지 않으려 했으나 미그-15의 활동영역이 넓어지면서 몇 차례의 공중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1950년 11월 9일 최초로 벌어진 미그-15와의 공중전에서 VF-111 썬다우너스의 에멘 대위가 조종하는 F9F가 미그-15를 격추시키는 성과를 올렸으며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그-15에게 단 한 대의 F9F도 손실하지 않으면서도 4기의 미그-15를 더 격추시켰다. (미국측의 주장이며 소련의 기록에는 이보다 많은 F9F를 격추시켰다고 함.)

* 후퇴익의 고양이 

F9F 계열기 중에서 특징적인 후퇴익을 가지고 있는 기체가 있다. 이것은 F9F 팬써에 후퇴익을 도입한 개량형으로서 제식 기호로는 F9F-6 부터가 해당된다. 이 기체는 같은 F9F 계열기면서도 외형에서 워낙 차이가 나므로 쿠거 (cougar)라는 새로운 별명을 부여받게 된다.

[ 완전한 후퇴익을 자랑하는 F9F-8 cougar, 사진으로 보면 panther와는 전혀 다른 기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

사실 그라만사는 F9F-2를 제작하기 시작할 때부터 기체의 설계에 후퇴익을 적용하는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었지만 미해군은 후퇴익의 기체가 저속에서의 비행특성에 문제가 있어 항모에서 이착함할 때 불안정하다는 것을 문제삼아 고전적인 직선익으로 제작할 것을 요구했었다.

그러나 미그-15의 출현에 놀란 미해군은 고속의 제트시대에는 후퇴익이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미그-15는 F9F-3 팬써와 같은 성능의 엔진을 가졌으면서도 무려 시속 160km이상의 차이가 나는 최대 속도를 자랑했던 것이다. 비록 미그-15와 맞붙은 공중전에서 팬써가 몇 차례 승리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조종사의 기량 차이였을 뿐, 만일 비슷한 기량의 조종사가 조종한다면 미그-15가 절대적인 우위에 설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 안정되게 착함중인 쿠거, 해군 관계자들의 예상을 깨고 후퇴익의 쿠거는 항모에서의 운용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

다급해진 미해군은 그라만사에 F9F의 후퇴익 버전을 급히 제작해 줄 것을 요구했으며 그라만사는 F9F-5의 동체를 기본으로 세이버와 같은 35도의 후퇴익을 갖는 기체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난 1951년 9월 21일 드디어 최초의 F9F-6 쿠거가 날아올랐는데 기대했던 최대 속도에서는 여전히 미그-15에 뒤떨여졌지만 기존보다는 시속 80km정도 빨라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F9F-5 팬써에 비해서 운동성이나 저속에서의 조종성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우수한 성능을 자랑했다. 이에 만족한 미해군은 즉시 이 기체를 양산해 줄 것을 요구했으며 미해군의 차기 전투기로 채택했다. 그러나 F9F-6가 다급히 생산된후에 최초의 F9F-6 전투비행대가 구성될 무렵에는 이미 한국전쟁이 끝나게 되어 한국전에는 투입되지 못했다.

[ 팬써와 쿠거의 특징을 비교하는 일러스트, 주익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거의 동일하다. ]

* 마치면서

비록 F-86과 같은 공군의 주력 전투기보다는 성능에서 떨어졌으나 함상에서 작전하는 제트기로서 F9F 팬써는 분명히 성공적인 작품이었다. 미공군의 F-80 슈팅스타와 같이 F9F는 한국 전쟁 초기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전장으로 출동하여 묵묵하게 일한 전장의 일꾼이었다. 이 F9F의 성공을 통해서 전통적인 함재기의 명가 그라만사는 제트 시대에도 부동의 함재기 제작사로서 인정받아 그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으며, 이후 계속 미해군의 함상전투기 제작에 참여하여 F11F 타이거와 같은 혁신적인 함상 전투기를 개발하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세계 최강의 전투기로 인정받는 고양이 가문의 총아 F-14 톰캣이 탄생하게 되는 기틀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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