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ockheed F-80 Shooting Star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2. 2. 27
1950년부터 53년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한국전쟁의 항공전에서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전투기는 압록강을 배경으로 미그-15와 사투를 벌였던 F-86 세이버겠지만, 한국전쟁의 전기간에 걸쳐서 전장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활약한 기체는 미군 최초의 실용 제트전투기였던 F-80 슈팅스타일 것이다.
불타는 하늘의 Great War Planes... 이번에는 한국전쟁의 사역마 F-80 슈팅스타에 대해서 알아보자.
* 유성의 탄생
F-80은 미국 최초의 실용 제트전투기니만큼 F-80의 개발 과정은 미국 제트기의 개발사를 대변해준다. 유럽에 전운이 감돌던 2차대전 초기에는 전쟁에 끼어들 의사가 없다가 뒤늦게 2차대전에 휘말린 미국은 애초에는 전투기의 개발에는 적극적이지 않아서 독일이 1939년 최초로 제트기를 날릴 때나 영국이 1941년부터 제트엔진을 개발해서 테스트를 실시할 때에도 제트 엔진을 가진 비행기를 개발하는 데 있어서는 소극적이었다. 독일이나 영국이 영국본토 항공전을 치루면서 치열한 첩보전과 무기개발 경쟁을 하고 있었던데 비해서 미국은 제트 엔진을 개발하고자하는 동기가 부족했던 것이다.
[ P-39 에어라코브라와 같이 비행중인 미군 최초의 제트기 XP-59 에어라코멧, 벨사가 개발한 이 두기체는 개발당시로서는 상당히 혁신적인 기체였음에도 모두 미공군에게 외면당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
물론 미국내에서도 제트추진 항공기에 대한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어서 1939년 록히드사의 켈리 존슨을 비롯한 몇몇 항공기 설계사들이 제트엔진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몇몇 실험기의 기초 설계를 진행했다. 그러나 이런 프로젝트는 미군의 관심을 끌지 못해서 록히드사 자체의 비용으로 진행해야 했으므로 개발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하지만 1941년 미국도 전쟁에 빠져들 것이라는 것이 예견되고 결국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본격적으로 2차대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이 이미 제트기의 테스트를 마무리하고 실전에 배치할 수 있는 제트전투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첩보와 함께 영국과 이탈리아에서도 제트기의 개발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에 부담을 느낀 미군은 연합국인 영국에 랜드-리스 조약에 의해서 미국에서 생산한 전쟁무기를 대여해주는 대신에 제트엔진의 기술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영국으로서는 미군의 무기원조가 매우 절실했기 때문에 그들이 개발하고 있던 최신 제트엔진의 청사진을 쾌히 미국에게 넘겼으며 미국의 GE사가 면허 생산권을 획득하고 제트엔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 XP-80 시제기의 모습 ]
이 과정에서 최초로 탄생한 미국산 제트기가 벨사의 XP-59A 에어라코멧이다. 이 기체는 벨사가 야심차게 추진한 항공기로 1942년 10월 최초로 비행했으나 기대에 어긋나게도 미군이 요구했던 전투수행능력에는 턱없이 모자라 정식으로 채택되지 못하게 된다. 마치 선배기체인 P-39 에어라코브라의 전철을 밟는 것처럼 보였으며 좌절한 벨사는 제트기의 개발을 단념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록히드사가 기회를 얻게되었으니 그들은 영국으로부터 새롭게 라이센스를 넘겨받은 더욱 강력한 J36 엔진을 장착한 전투기의 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다. 록히드사는 이 기체에 L-140이라는 자체 기호를 붙여서 미군이 요구하는 사양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개발속도를 빨리하기 위해서 주익의 디자인을 2차대전기의 보편적인 디자인을 따라 직선익으로 채택하였다. 이 L-140 프로젝트는 1943년 6월 미공군에 정식으로 서류가 제출된후 가능성을 인정받아 XP-80이라는 제식명칭을 부여받게 된다.
[ 테스트중인 P-80 양산기, 주익끝단에 장착된 외부 연료탱크가 특징적이다. ]
켈리 존슨이 지휘하는 록히드사의 개발팀은 계속적인 풍동시험을 비롯한 테스트를 실시했으며 J36 엔진의 양산이 추진되면서 1944년 8월에 이르러 최초로 처녀비행을 실시할 수 있었다. 이후 몇 차례의 평가를 거치면서 드러난 사소한 문제들이 해결되면서 드디어 미군기로서는 최초로 고도 2만피트에서 시속 502마일 (813km)을 돌파하는 쾌거를 이룩하게 되었다.
이후 제 412 전투비행단으로 기체들이 인도되어 전투 조종사들로부터 평가를 받게 되는데 비행안정성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고 야전에서 운용하는데 별 문제가 없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XP-80의 정식 양산이 결정되었고 1944년 3월, 드디어 YP-80으로 명명된 30기의 양산 시제기들이 인도되었고 유성처럼 빠르다는 의미로 슈팅스타라는 별명도 부여받았다. 이 기체들은 XP-80과 거의 동일한 기체였으나 엔진이 더욱 향상된 GE사의 I-40 제트엔진으로 장비되었고 기수에 6정의 12.7mm 기관총을 고정무장으로 장착했다. 그리고 P-80A라는 제식 명칭하에 본격적으로 양산이 시작되었으며 1944년 4월에는 미공군으로부터 917기를 수주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 양산이 허가된후 생산된 P-80C ]
그러나 본격적으로 양산이 실시된 1945년 중반에는 이미 전쟁이 끝나가고 있어 실전에 모습을 나타낼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된다. 이후 P-80B, P-80C의 개량형들이 속속 생산되었으며 2차대전이 끝난 후 제트시대의 항금기를 선도하는 기체로서 미국의 하늘을 누볐다. 그러나 슈팅스타의 진가는 2차대전이 끝난 후 5년이 지난 1950년 한국의 하늘에서 드러나게 된다.
Lockheed F-80 Shooting Star | |
분 류 |
1인승 전투폭격기 |
동 력 |
제네럴 일레트릭 J33 터보제트 엔진 |
최고속도 |
시속 939.6km |
상승속도 |
분당 1280m |
항속거리 |
1892km |
무 장 |
기수 - 12.7mm 기관총 6정 |
* 전장의 슈팅스타
사실 P-80은 2차대전에 투입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다. 1944년말 몇 기의 YP-80이 유럽으로 비밀리에 이동했는데 이는 이 무렵 맹위를 떨치고 있던 독일의 제트전투기 Me 262에 대항하기 위한 전술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몇 가지 운용상의 문제점으로 실전에는 전혀 얼굴도 내밀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태평양 전선에서도 1945년 6월경 일본에 대한 공습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필리핀으로 배치된 30여기의 P-80A들은 일본까지 날아가기 위한 외부연료탱크가 없어 이를 본토에서 제작한 후 필리핀으로 운반하도록 했는데 이 연료탱크가 배로 운반되어 필리핀에 도착할 무렵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결국 P-80은 2차대전에 참가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다.
[ P-80으로 이루어진 곡예비행팀, 연료탱크를 장착하고 있지 않으니까 마치 다른 기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
게다가 전쟁이 끝난 후 제트시대의 도래를 맞이하여 맹렬하게 실시된 P-80의 테스트에서 조종사들이 한계 상황에서까지 P-80을 비행하던 중 많은 사고가 발생해서 수명의 테스트 파일럿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중에는 총 40기의 일본기를 격추하여 2차대전 최고의 미군 에이스로 등록했던 리처드 봉 대령도 있었다. 이후 미공군은 P-80의 비행을 중단시키고 문제점을 조사하도록 했으나 비행사고의 대부분이 제트기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조종사들의 과실이 더 많은 것으로 마무리되면서 P-80은 계속 비행할 수 있었고 P-51 머스탱을 밀어내면서 독일과 일본을 비롯한 해외주둔 미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자리를 잡았으며 미공군이 전투기의 제식기호를 F로 변경하면서 F-80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기간동안에 F-80을 테스트한 척 예거는 F-80의 비행특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나는 2차대전이 끝난후에 당시 우리가 개발하고 있었던 P-80의 테스트 비행을 요청받았다. 그리고 독일공군이 사용했던 Me 262와의 비교를 요구받았다. 마침 나는 얼마전 Me 262의 테스트비행을 경험했으므로 쾌히 요구에 응했다. 그런데 P-80을 비행해 보았을 때 나는 이녀석이 Me 262의 성능과 꼭 같은 성능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는 놀랐었다. 최고속도, 상승력, 가속력이 똑같았던 것이다. 이런 보고서를 제출했을 때 개발자들은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존심이 상한 듯이 며칠후에 더 강한 엔진을 장착할테니 다시 비교해 달라고 했다."
* 한국하늘의 유성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전면적으로 남한을 침공했을 때 주일 미공군에는 F-80C를 장비한 4개 비행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익 끝단에 장거리 비행용 연료탱크를 장비하고 즉각 전선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6월 26일 서울 상공에서 북한공군의 IL-10을 격추하면서 최초의 격추를 기록하게 된다. 이후 전황이 악화되는 속에서도 끊임없이 최전선으로 날아가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항공작전을 수행하였으며 북한공군에게는 F-80에 대적할만한 속도를 가진 기체가 없었으므로 신속하게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 프로펠러기인 F-51D와 함께 한국 상공을 완전히 장악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 기수의 우측에 보이는 3정의 기관총구, 이처럼 기수에 6정의 12.7mm 기관총이 집중되어 지상공격시에 상당한 파괴력을 자랑했다고 한다. ]
그러나 북진이 시작된 후 1950년 11월이 되자 중국군의 개입과 함께 하늘에는 강력한 적수가 등장하게 되니 이것이 미그-15였다. 객관적으로 볼 때 후퇴익을 가진 미그-15는 F-80에 비해 월등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시속 100마일이상의 차이가 나는 최고속도였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 만난 1950년 11월 7일에는 이런 성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미그-15의 기습으로 시작된 공중전에서 러셀 브라운 대위의 F-80C가 미그-15의 후미를 따라잡아 격추시켰는데,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제트기간의 공중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물론 이는 미군측의 주장이며 소련에서는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하고 있음.)
[ 대전 비행장에 전개한 F-80C 슈팅스타, 한국전쟁의 환경에 매우 적합했던 기체로 평가받고 있다. ]
그러나 F-80은 미그-15에 비해서 모든 면에서 명백한 열세를 보였으며 따라서 이후에 한국전쟁의 항공전의 주류를 이루었던 미그-15와의 제공권 다툼에서는 새롭게 개발된 신예기 F-86 세이버가 독보적으로 활약했으며 F-80은 지상공격의 임무에만 투입되었다. 1951년 이후 세이버와 미그의 공중전이 한국전쟁 항공전의 주류를 이룬 것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치열한 지상전이 벌어지는 곳이면 어디든지 나타났던 F-80C는 지상군을 지원하는 임무에서는 여전히 맹활약했으며 전쟁이 휴전으로 중지될 때까지 묵묵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F-86은 주로 고공으로 투입되어 북한쪽의 미그앨리에서 작전했으며 F-80은 지상전이 벌어지는 지역에서 저공으로 투입되었기 때문에 지상의 병사들에게는 항상 자신들을 지켜주던 이 F-80이야말로 가장 인상적인 항공기였다.
1948년 독일에 주둔하고 있던 제 56 전투기대대 62 전투중대 소속의 P-80A형으로 미군이 유럽을 중시함에따라 태평양보다 먼저 기체들이 배치되었다. |
1946년 최초로 P-80A형을 인도받은 제412 전투기대대 소속의 기체로서 P-80A형의 상면 도색을 보여주는 일러스트이다. |
1947년 알라스카에 주둔하고 있던 제 94 전투중대 소속의 P-80B형이다. 전시에는 구경하기 힘든 원색의 화려한 도색이 특징적이다. |
* 마치면서
슈팅스타는 여러 가지 기록을 가진 기체인데 미군 최초의 실용 제트전투기였으며, 수평비행에서 최초로 시속 500마일 벽을 넘은 기체였고 무엇보다 항공전사에 길이 남을 제트기간의 첫 공중전의 승자로서도 기억되고 있다. 비록 한국전쟁에서 F-86 세이버의 명성에 가려 있었지만 한국전쟁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활약한 진정한 전장의 사역마와 같은 존재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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