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ockheed F-80 Shooting Star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2. 2. 27

1950년부터 53년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한국전쟁의 항공전에서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전투기는 압록강을 배경으로 미그-15와 사투를 벌였던 F-86 세이버겠지만, 한국전쟁의 전기간에 걸쳐서 전장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활약한 기체는 미군 최초의 실용 제트전투기였던 F-80 슈팅스타일 것이다.

불타는 하늘의 Great War Planes... 이번에는 한국전쟁의 사역마 F-80 슈팅스타에 대해서 알아보자. 

 

* 유성의 탄생

F-80은 미국 최초의 실용 제트전투기니만큼 F-80의 개발 과정은 미국 제트기의 개발사를 대변해준다. 유럽에 전운이 감돌던 2차대전 초기에는 전쟁에 끼어들 의사가 없다가 뒤늦게 2차대전에 휘말린 미국은 애초에는 전투기의 개발에는 적극적이지 않아서 독일이 1939년 최초로 제트기를 날릴 때나 영국이 1941년부터 제트엔진을 개발해서 테스트를 실시할 때에도 제트 엔진을 가진 비행기를 개발하는 데 있어서는 소극적이었다. 독일이나 영국이 영국본토 항공전을 치루면서 치열한 첩보전과 무기개발 경쟁을 하고 있었던데 비해서 미국은 제트 엔진을 개발하고자하는 동기가 부족했던 것이다.

[ P-39 에어라코브라와 같이 비행중인 미군 최초의 제트기 XP-59 에어라코멧, 벨사가 개발한 이 두기체는 개발당시로서는 상당히 혁신적인 기체였음에도 모두 미공군에게 외면당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

물론 미국내에서도 제트추진 항공기에 대한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어서 1939년 록히드사의 켈리 존슨을 비롯한 몇몇 항공기 설계사들이 제트엔진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몇몇 실험기의 기초 설계를 진행했다. 그러나 이런 프로젝트는 미군의 관심을 끌지 못해서 록히드사 자체의 비용으로 진행해야 했으므로 개발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하지만 1941년 미국도 전쟁에 빠져들 것이라는 것이 예견되고 결국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본격적으로 2차대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이 이미 제트기의 테스트를 마무리하고 실전에 배치할 수 있는 제트전투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첩보와 함께 영국과 이탈리아에서도 제트기의 개발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에 부담을 느낀 미군은 연합국인 영국에 랜드-리스 조약에 의해서 미국에서 생산한 전쟁무기를 대여해주는 대신에 제트엔진의 기술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영국으로서는 미군의 무기원조가 매우 절실했기 때문에 그들이 개발하고 있던 최신 제트엔진의 청사진을 쾌히 미국에게 넘겼으며 미국의 GE사가 면허 생산권을 획득하고 제트엔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 XP-80 시제기의 모습 ]

이 과정에서 최초로 탄생한 미국산 제트기가 벨사의 XP-59A 에어라코멧이다. 이 기체는 벨사가 야심차게 추진한 항공기로 1942년 10월 최초로 비행했으나 기대에 어긋나게도 미군이 요구했던 전투수행능력에는 턱없이 모자라 정식으로 채택되지 못하게 된다. 마치 선배기체인 P-39 에어라코브라의 전철을 밟는 것처럼 보였으며 좌절한 벨사는 제트기의 개발을 단념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록히드사가 기회를 얻게되었으니 그들은 영국으로부터 새롭게 라이센스를 넘겨받은 더욱 강력한 J36 엔진을 장착한 전투기의 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다. 록히드사는 이 기체에 L-140이라는 자체 기호를 붙여서 미군이 요구하는 사양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개발속도를 빨리하기 위해서 주익의 디자인을 2차대전기의 보편적인 디자인을 따라 직선익으로 채택하였다. 이 L-140 프로젝트는 1943년 6월 미공군에 정식으로 서류가 제출된후 가능성을 인정받아 XP-80이라는 제식명칭을 부여받게 된다.

[ 테스트중인 P-80 양산기, 주익끝단에 장착된 외부 연료탱크가 특징적이다. ]

켈리 존슨이 지휘하는 록히드사의 개발팀은 계속적인 풍동시험을 비롯한 테스트를 실시했으며 J36 엔진의 양산이 추진되면서 1944년 8월에 이르러 최초로 처녀비행을 실시할 수 있었다. 이후 몇 차례의 평가를 거치면서 드러난 사소한 문제들이 해결되면서 드디어 미군기로서는 최초로 고도 2만피트에서 시속 502마일 (813km)을 돌파하는 쾌거를 이룩하게 되었다.

이후 제 412 전투비행단으로 기체들이 인도되어 전투 조종사들로부터 평가를 받게 되는데 비행안정성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고 야전에서 운용하는데 별 문제가 없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XP-80의 정식 양산이 결정되었고 1944년 3월, 드디어 YP-80으로 명명된 30기의 양산 시제기들이 인도되었고 유성처럼 빠르다는 의미로 슈팅스타라는 별명도 부여받았다. 이 기체들은 XP-80과 거의 동일한 기체였으나 엔진이 더욱 향상된 GE사의 I-40 제트엔진으로 장비되었고 기수에 6정의 12.7mm 기관총을 고정무장으로 장착했다. 그리고 P-80A라는 제식 명칭하에 본격적으로 양산이 시작되었으며 1944년 4월에는 미공군으로부터 917기를 수주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 양산이 허가된후 생산된 P-80C ]

그러나 본격적으로 양산이 실시된 1945년 중반에는 이미 전쟁이 끝나가고 있어 실전에 모습을 나타낼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된다. 이후 P-80B, P-80C의 개량형들이 속속 생산되었으며 2차대전이 끝난 후 제트시대의 항금기를 선도하는 기체로서 미국의 하늘을 누볐다. 그러나 슈팅스타의 진가는 2차대전이 끝난 후 5년이 지난 1950년 한국의 하늘에서 드러나게 된다. 

Lockheed F-80 Shooting Star

분 류

1인승 전투폭격기

동 력

제네럴 일레트릭 J33 터보제트 엔진

최고속도

시속 939.6km

상승속도

분당 1280m

항속거리

1892km

무 장

기수 - 12.7mm 기관총 6정

 

* 전장의 슈팅스타

사실 P-80은 2차대전에 투입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다. 1944년말 몇 기의 YP-80이 유럽으로 비밀리에 이동했는데 이는 이 무렵 맹위를 떨치고 있던 독일의 제트전투기 Me 262에 대항하기 위한 전술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몇 가지 운용상의 문제점으로 실전에는 전혀 얼굴도 내밀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태평양 전선에서도 1945년 6월경 일본에 대한 공습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필리핀으로 배치된 30여기의 P-80A들은 일본까지 날아가기 위한 외부연료탱크가 없어 이를 본토에서 제작한 후 필리핀으로 운반하도록 했는데 이 연료탱크가 배로 운반되어 필리핀에 도착할 무렵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결국 P-80은 2차대전에 참가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다.

[ P-80으로 이루어진 곡예비행팀, 연료탱크를 장착하고 있지 않으니까 마치 다른 기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

게다가 전쟁이 끝난 후 제트시대의 도래를 맞이하여 맹렬하게 실시된 P-80의 테스트에서 조종사들이 한계 상황에서까지 P-80을 비행하던 중 많은 사고가 발생해서 수명의 테스트 파일럿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중에는 총 40기의 일본기를 격추하여 2차대전 최고의 미군 에이스로 등록했던 리처드 봉 대령도 있었다. 이후 미공군은 P-80의 비행을 중단시키고 문제점을 조사하도록 했으나 비행사고의 대부분이 제트기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조종사들의 과실이 더 많은 것으로 마무리되면서 P-80은 계속 비행할 수 있었고 P-51 머스탱을 밀어내면서 독일과 일본을 비롯한 해외주둔 미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자리를 잡았으며 미공군이 전투기의 제식기호를 F로 변경하면서 F-80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기간동안에 F-80을 테스트한 척 예거는 F-80의 비행특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나는 2차대전이 끝난후에 당시 우리가 개발하고 있었던 P-80의 테스트 비행을 요청받았다. 그리고 독일공군이 사용했던 Me 262와의 비교를 요구받았다. 마침 나는 얼마전 Me 262의 테스트비행을 경험했으므로 쾌히 요구에 응했다. 그런데 P-80을 비행해 보았을 때 나는 이녀석이 Me 262의 성능과 꼭 같은 성능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는 놀랐었다. 최고속도, 상승력, 가속력이 똑같았던 것이다. 이런 보고서를 제출했을 때 개발자들은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존심이 상한 듯이 며칠후에 더 강한 엔진을 장착할테니 다시 비교해 달라고 했다."

* 한국하늘의 유성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전면적으로 남한을 침공했을 때 주일 미공군에는 F-80C를 장비한 4개 비행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익 끝단에 장거리 비행용 연료탱크를 장비하고 즉각 전선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6월 26일 서울 상공에서 북한공군의 IL-10을 격추하면서 최초의 격추를 기록하게 된다. 이후 전황이 악화되는 속에서도 끊임없이 최전선으로 날아가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항공작전을 수행하였으며 북한공군에게는 F-80에 대적할만한 속도를 가진 기체가 없었으므로 신속하게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 프로펠러기인 F-51D와 함께 한국 상공을 완전히 장악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 기수의 우측에 보이는 3정의 기관총구, 이처럼 기수에 6정의 12.7mm 기관총이 집중되어 지상공격시에 상당한 파괴력을 자랑했다고 한다. ]

그러나 북진이 시작된 후 1950년 11월이 되자 중국군의 개입과 함께 하늘에는 강력한 적수가 등장하게 되니 이것이 미그-15였다. 객관적으로 볼 때 후퇴익을 가진 미그-15는 F-80에 비해 월등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시속 100마일이상의 차이가 나는 최고속도였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 만난 1950년 11월 7일에는 이런 성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미그-15의 기습으로 시작된 공중전에서 러셀 브라운 대위의 F-80C가 미그-15의 후미를 따라잡아 격추시켰는데,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제트기간의 공중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물론 이는 미군측의 주장이며 소련에서는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하고 있음.) 

[ 대전 비행장에 전개한 F-80C 슈팅스타, 한국전쟁의 환경에 매우 적합했던 기체로 평가받고 있다. ]

그러나 F-80은 미그-15에 비해서 모든 면에서 명백한 열세를 보였으며 따라서 이후에 한국전쟁의 항공전의 주류를 이루었던 미그-15와의 제공권 다툼에서는 새롭게 개발된 신예기 F-86 세이버가 독보적으로 활약했으며 F-80은 지상공격의 임무에만 투입되었다. 1951년 이후 세이버와 미그의 공중전이 한국전쟁 항공전의 주류를 이룬 것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치열한 지상전이 벌어지는 곳이면 어디든지 나타났던 F-80C는 지상군을 지원하는 임무에서는 여전히 맹활약했으며 전쟁이 휴전으로 중지될 때까지 묵묵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F-86은 주로 고공으로 투입되어 북한쪽의 미그앨리에서 작전했으며 F-80은 지상전이 벌어지는 지역에서 저공으로 투입되었기 때문에 지상의 병사들에게는 항상 자신들을 지켜주던 이 F-80이야말로 가장 인상적인 항공기였다.

1948년 독일에 주둔하고 있던 제 56 전투기대대 62 전투중대 소속의 P-80A형으로 미군이 유럽을 중시함에따라 태평양보다 먼저 기체들이 배치되었다.

 

1946년 최초로 P-80A형을 인도받은 제412 전투기대대 소속의 기체로서 P-80A형의 상면 도색을 보여주는 일러스트이다.

 

1947년 알라스카에 주둔하고 있던 제 94 전투중대 소속의 P-80B형이다. 전시에는 구경하기 힘든 원색의 화려한 도색이 특징적이다.

 

* 마치면서

슈팅스타는 여러 가지 기록을 가진 기체인데 미군 최초의 실용 제트전투기였으며, 수평비행에서 최초로 시속 500마일 벽을 넘은 기체였고 무엇보다 항공전사에 길이 남을 제트기간의 첫 공중전의 승자로서도 기억되고 있다. 비록 한국전쟁에서 F-86 세이버의 명성에 가려 있었지만 한국전쟁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활약한 진정한 전장의 사역마와 같은 존재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Mikoyan Gurevich  MiG-15 Fagot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2. 2. 14

1950년 11월초 파죽지세로 북진을 계속한 UN군은 중국군의 개입으로 큰 곤경에 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역에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후퇴익의 제트기가 출몰하였으며 이때까지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속에서 전개되던 UN군의 항공작전도 큰 위협에 노출되었다. 바로 이 제트기가 소련이 극비리에 개발하여 실전에 투입한 미그-15였다. 불타는 하늘의 Great War Planes... 이번에는 소련공군의 비밀무기 미그-15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 다시 태어나는 미그

아마도 한국전쟁에서 미그-15의 갑작스런 출현은 진주만 상공에 일본의 제로전투기가 출현했을 때보다도 미군에게 더욱 커다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 미그는 완벽한 보완속에서 전장에 모습을 나타냈으며 이것은 소련도 독일로부터 후퇴익의 기술을 전리품으로 챙긴후 새로운 제트전투기에게 테스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정보부가 알고 있었음에도 미국이 소련의 항공기술을 얕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큰 충격이었다.

[ 미그-15의 조종석, 사진은 미국의 박물관에 전시중인 기체의 것이다. ]

사실 미그-15의 탄생은 여러 가지 극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것이었다. 미코얀과 그루비치가 이끌던 미그 설계국은 2차대전 당시 고고도 요격기로 설계된 야심작 미그-3의 실패로인해서 야크나 라포치킨, 일류신등의 설계국이 우수한 전투기과 공격기를 선보인후 당의 인정을 받아 대량생산하는 동안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았으며 결국은 새로운 기체를 설계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2차대전이 끝날무렵 미그 설계국은 다른 설계국이 기존 항공기를 대량생산하는데 몰두하는 동안 미래의 전장에 어울리는 신형기의 설계를 완성할 수 있었고, 2차대전이 끝난후 활짝열린 제트시대에는 다른 설계국을 따돌리고 소련의 항공기술을 선도해 나갈 수 있었다. 더욱이 독일로부터 전리품을 얻은 후퇴익의 기술은 초고속 제트전투기를 소련도 개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여해 주었다. 미그 설계국은 그동안 추진하던 직선익의 제트기 (후에 미그-9으로 불림) 설계를 중단하고, 즉시 새로운 항공기의 설계에 후퇴익의 기술을 적용하기로 했으며 이 기체에 I-310이라는 모델명을 부여했다. 역사속의 우연처럼 이 신형기는 거의 같은 시기에 미국의 F-86 세이버와 같은 35도의 후퇴각이 주어진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 압록강 접경의 안뚱에서 작전중인 미그-15와 소련 정비병들의 모습 ]

그러나 소련은 영국이나 미국에 비해서 제트 엔진의 개발에는 한발 늦고 있었다. 독일로부터 융커스 유모 004 엔진을 입수하여 복제해서 사용했지만 이 엔진의 출력은 신형 제트기에게 충분한 속도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인해서 미그 설계국의 신형기도 만족할 만한 비행성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미국의 신형 제트기들에 비해서 성능이 한참 뒤떨어질 판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영국으로부터온 구원의 손길이 해결해 주었다. 1946년말, 영국 정부가 대독전의 동맹국이었던 소련과 우호적인 관계를 과시하기 위해서 당시 영국이 개발한 최신형 제트 엔진인 롤스로이스 넨 Mk I 엔진을 선물로서 제공한 것이다. (당시 영국공군 관계자들은 영국 정치가들이 이런 돌출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크게 반발했다고 한다.)

이 엔진은 당시 소련이 가지고 있던 엔진보다 추력이 2배가까이 큰 고성능 엔진이었고, 미그 설계국이 즉시 이 엔진을 입수한 후 설계중인 신형기에 부착하여 테스트해본 결과 믿을 수 없는 고성능을 발휘했던 것이다. 여기까지의 스토리는 마치 2차대전 당시 영국에 공급된후 영국제 롤스로이스 엔진을 부착하고 창공으로 비상한 미국제 P-51 머스탱의 이야기를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영국제 고성능 엔진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었다. 소련은 즉시 이 롤스로이스 엔진을 복제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기로 했고 결국 이 엔진을 거의 그대로 복사한 클리모프 RD-45 엔진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다.

미그-15bis의 구성도, 특징적인 후퇴익과 주익상면의 날개 안정판 및 엔진과 에어 브레이크등 본격적인 제트전투기 다운 혁신적인 설계를 한눈에 보여준다.

걸림돌이었던 엔진 문제가 해결되자 그이후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척되었다. 미그 설계국은 이 신형기에 사출좌석을 부착했으며 고공 비행에 알맞게 여압식 캐노피를 장비하도록 했다. 기체의 디자인은 최대한 초 경량화를 추구하였으며 이런 노력으로 고속이면서도 훌륭한 기동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미그-15로 명명된 이 신형 제트기의 공개비행은 1947년 12월 30일에 실시되었으며 스탈린으로부터 격찬을 받은 후 곧 대량생산을 명령받게 되었다.

(foxmouse: 미그-15는 한국전쟁이후에도 계속 개량되어 수많은 파생형을 가지게 되지만 본 연재에서는 한국전쟁에서 주로 사용된 미그-15, 미그-15bis를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미그 쇼크

1950년 10월, UN군의 거침없는 진격으로 북한 전역이 곧 UN군의 수중에 떨어질 것은 자명해 지고 있었으며 한국의 통일이 눈앞에 온 듯 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군사작전을 펼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중국은 30만의 대군을 인해전술로 투입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상공에서는 중국공군과 함께 북한공군으로 위장한 소련공군이 신형 제트기를 사용하여 엄호에 나서면서 UN군의 항공전력에 강력한 도전장을 던졌다. 이 새로운 제트기는 원형의 동체와 시야가 탁트인 캐노피를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다른 미군의 제트기와 구별되는 후퇴익의 주익이 특징이었다.

[ 미그앨리로 출격하기 위해 정비중인 중국공군의 미그-15, 중국은 참전의 대가로 소련으로부터 미그-15를 비롯한 최신 항공기술을 넘겨받았다. ]

사실 이때까지 미그-15에 대한 보완은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진 상태였고, 미공군은 이 신형기에대한 사전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런 미그의 출몰을 경험해야 했다. 당시 미공군은 이때까지 전장에서 맹활약하던 F-51과 F-80정도면 어떤 공산진영의 적기도 상대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북한공군이 개전후 얼마되지 않아 괴멸되었고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미군기들이 거의 무저항의 하늘을 누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반도의 통일을 눈앞에두고 있던 1950년 10월말부터 지상에서도 하늘에서도 불길한 징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지상에서는 30만이 넘는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으며 하늘에서는 전에 보지 못하던 후퇴익의 제트기가 출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순간이 바로 한국전쟁 항공전의 전세가 혼전으로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1950년 11월 1일 압록강 상공을 초계중이던 F-51 머스탱 편대가 갑자기 나타난 후퇴익의 제트기 6기로부터 공격을 받으면서 미그-15가 최초로 목격되었다. 이날의 공중전에서는 F-51 조종사들은 이 미그기들의 놀라운 속도에 놀랐으나 희피기동을 실시하여 별피해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 상승중인 미그-15bis 편대, 상승성능과 최대 상승고도에서 세이버보다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

중국군의 인해전술로 날로 악화되는 전황하에서 하늘에서도 미그-15들이 대량으로 출몰하면서 중국군을 견제할 만한 항공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미그-15가 보여준 성능은 미군에게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미그-15의 놀라운 수평 속도와 상승력 그리고 37mm 기관포 1문과 23mm 기관포 2문으로 무장된 강력한 화력은 이때까지의 미공군의 주축을 이루던 F-80 슈팅스타나 F-51 머스탱을 완전히 압도하는 것으로서 이대로라면 전장지역의 제공권을 완전히 공산군에게 빼았길 위기에 몰린 것이다. 미군이 새로 투입한 F-84 썬더 제트기도 미그-15와의 공중전에서 승리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았다. 이에 미군은 급히 본토로부터 신예기 F-86 세이버를 한국으로 이동시켜 미그-15와의 대결에 투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히도 공산군은 1950년 겨울의 대공세때 이 우수한 전투기를 중국과의 접경지역에 한정해서만 운용했으며 그 이상 남쪽으로 진출시키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소련과 중국의 비밀 협정으로 미그-15는 전적으로 중국군이 한국으로 투입되는 지역에서 중국군을 보호하는데 우선 순위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에 미그가 주로 출몰하는 압록강 이남의 지역은 미군으로부터 '미그 앨리 (미그기 통로)'라고 불리게 되었다.

* 세이버와의 결투

한국전쟁에서 사용된 미그는 미그-15와 개량형인 미그-15bis의 두가지가 주축을 이루었는데 미그-15는 F-86A/E와 미그-15bis는 F-86F와 비교상대로 보면 될 것이다. 전반적으로 미그-15는 F-86에 비해서 기체가 작고 중량이 가벼웠는데 이는 미그의 설계진이 추구한 경량화에 따른 것이었다. 이로 인해서 미그-15는 세이버에 비해서 기동성과 상승성능이 좋은 편이었고 특히 최대 상승한도가 높아 더 높은 고도에서 대기하다가 강하하면서 기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행안정성에서는 몇가지 문제가 있어서 급선회시에 실속에 빠지기 쉽고 스핀에서 회복하기 어려운 단점도 있었다. 게다가 미그-15에 장착된 자이로식 조준기는 세이버의 레이더 조준기에 비해서 성능이 떨어지고 있었다.

[ 정비중인 미그-15의 무장을 보여주는 사진, 대구경의 37mm 기관포와 23mm 기관포를 잘 볼 수 있다. 엄청난 파괴력이 느껴지는 사진이다. ]

무장에서는 F-86이 12.7mm 기관총 6정을 장비하고 있었던데 비해서 미그-15는 37mm 기관포 1문과 23mm 기관포 2문을 장비하고 있었다. 세이버의 무장은 2차대전중 미군기들의 전형적인 무장이 이어져 온 것으로 고속으로 발사되며 휴대탄수가 많은 기관총은 전투기간의 공중전에서는 유효한 무기였지만 제트시대의 공중전에서는 파괴력이 약한점이 지적되기도 했다. 반면 미그-15의 기관포들은 전투기간의 공중전을 위해서 라기보다는 침투해오는 적의 폭격기를 요격하는데 적합한 무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기관포탄의 파괴력은 강력했지만, 발사속도가 느리고 사정거리가 짧아서 전투기간의 급격한 기동중에는 효과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일단 한두발이라도 명중이되면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군조종사들은 미그의 화력에 대해서 크게 두려워했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볼 때는 전투기간의 공중전에서는 F-86쪽이 기총의 사거리와 발사속도, 탑재탄수에서 약간 더 우세했으며 더 우수한 조준기를 사용하여 차이를 넓힐 수 있었다.

[ 세이버와의 교전에서 수직꼬리날개가 잘려나간 미그-15, 동체에는 북한국적 마크가 있지만 실은 소련 조종사가 몰았던 기체이다. ]

지금까지 한국전쟁의 항공전에 대한 기술은 주로 서방측의 자료가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미그-15는 한국전쟁에서 미공군의 F-86 세이버에게 일방적으로 격추당한 패배자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지만 사실 이 전투기는 나름대로의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있다가 소련의 붕괴이후 최근 속속 공개되는 러시아의 자료들에 따르면 미공군이 주장하는 1: 10의 격추교환비는 말도안되는 과장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 최근 데이토나에서 열린 에어쇼에서 모의 공중전을 펼친 미그-15와 F-86의 사진, 역사속의 라이벌답게 미국에서도 여전히 이 두기체의 인기는 높아서 에어쇼의 단골 손님으로 초청을 받고 있다고 한다. ]

당시 미그-15의 조종은 주로 소련 조종사들과 중국 조종사들이 맡고 있었으며 소수의 북한 조종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측의 자료에 따르면 미그-15에 의한 F-86의 격추가 총 800여기에 달한다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미군이 기록한 89기의 손실에 비해서 거의 10배에 달하는 것으로 양측의 주장이 서로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당시 미공군이 공중전중의 손실 기록으로 인정하는 78기와 비교해보면 러시아측이 주장하는 격추 기록이 상당부분 과장된 것으로 생각되며 여러 가지 자료를 비교해봐도 실제 전투에서 세이버가 미그에 비해서 월등한 전과를 올린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로 인정받고 있으나 미공군이 주장하는 격추기록도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1: 10이라는 경이적인 격추교환비는 상당부분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952년 중국공군에서 사용중이던 미그-15이다. 중국공군의 미그-15는 은빛으로 도색된 기체외에도 이처럼 위장무늬를 가진 기체도 있었다고 하며, 북한공군의 국적마크도 사용했지만 본 일러스트에서 보여주듯이 중국공군의 국적마크도 혼용했다고 한다.

* B-29를 몰아내다.

특히 미그-15가 거둔 성과중 가장 중요한 것은 F-86 세이버와의 전투가 아니라 중국 지상군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B-29 중폭격기들을 압록강 접경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몰아낸 것이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그기들은 이른 바 미그앨리라 불리는 지역의 방어를 가장 중요한 임무로 설정해놓고 전장에 투입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중국으로부터 병력과 군수물자가 북한으로 투입되는 지역으로서 이지역의 제공권을 상시한다면 B-29의 가공할 융단폭격에 노출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인해전술로 공격을 펼친다해도 하늘에서 쏟아붔는 B-29의 가공할 융단 폭격을 받는 다면 중국군은 커다란 손실을 입게될 것이므로 중국군은 지상군 파병의 대가로 소련 공군이 B-29와 같은 미군의 항공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완벽하게 보호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1951년부터 중국군이 본격적으로 남진하면서 B-29에 의한 위협이 심각해지자 미그-15의 B-29요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B-29의 요격 임무는 주로 소련 공군의 제64  전투항공사단이 맡고 있었는데 이부대의 지휘관은 2차대전중 23기의 독일기를 격추시킨 에이스 출신의 게오르기 아게예비치 로보프 소장이었다. 그는 한국전쟁에서도 실전에 참가하여 4기의 격추기록을 추가했다고 한다.

최근 한국전쟁 최고의 에이스로 공인받고 있는 소련 공군의 에프케니 파펠라예프의 기체이다. 그는 한국전쟁중 미군기를 무려 23기나 격추시켰다고 한다. (미공군 최고 에이스인 맥커넬의 경우는 공인격추 16기)

러시아측의 기록에 따르면 최초의 B-29 요격은 1951년 3월 16일에 실시되었으며 이날 호위가 없이 폭격을 감행하던 B-29 18기를 9기의 미그-15가 요격했다. 이날 미그-15의 공격을 받은 B-29편대는 와해되어 폭격을 실시하지 못하고 도주해야 했으며 1기의 B-29가 격추되고 5기가 대파되는 충격적인 손실을 입었다. 1945년의 일본본토 폭격당시는 B-29의 비행고도까지 올라오는 일본 전투기들이 거의 없었으며, 레이더로 조준되는 방어기총좌의 방어력도 믿을만 했지만 새로운 제트 시대에는 상황이 달랐다. 미그-15는 B-29보다도 훨씬 높은 고도로 날아오를 수 있었으며 일본의 프로펠러기들보다 거의 두배나 빠른 속도는 B-29의 방어기총들이 제대로 조준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특히 미그-15의 강력한 화력은 몇발만 명중해도 B-29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이후 미군은 F-84를 호위로 붙여 다시 북폭을 시도했지만 작전에 투입된 B-29 폭격기들은 미그-15의 요격으로 연일 큰 피해를 입었으며 F-84의 엄호 전투기부대는 빠른 속도로 치고빠지는 미그-15들에게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F-86 세이버들이 투입되어 호위기로 따라나섰지만 항상 엄호기로 따라오는 미군 전투기들보다 더 많은 수로 요격해오는 미그-15기들은 느린 B-29를 호위하는 미군기들을 따돌리고 B-29에게 명중탄을 퍼부은후 이탈하는 전법으로 계속 성과를 올렸다.

총 9기의 공인격추로 한국전쟁중 중국공군 최고의 에이스로 인정받고 있는 왕하이의 기체이다. 중국공군의 기체임에도 북한공군의 마크를 도색한 것이 인상적이다.

1951년 여름동안 미그의 위협은 계속 커지고 B-29의 피해가 계속 늘어나면서 아무리 많은 F-86 세이버들이 따라나서도 B-29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결국 1951년 10월 23일 세이버 36기의 엄호를 받으며 진입하던 B-29 편대가 무려 100대에 가까운 미그-15의 요격을 받아 B-29 3기가 격추되고 7기가 큰 피해를 입어 귀환도중 불시착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아무리 세이버가 호위를 하더라도 B-29 자체의 속도가 느린이상 미그-15의 요격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제트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구식이 되 버린 것이 명백해진 B-29는 북한 상공의 주간 작전에서 완전히 제외되었고 야간 폭격임무로 돌려지게 된다. 이로서 미그-15 요격기부대는 B-29를 하늘에서 몰아내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Mikoyan Gurevich MiG-15bis Fagot

분 류

1인승 전투기

동 력

클리모프 VK-1F 제트엔진 (추력 2700kg)

최고속도

시속 1075km

상승속도

분당 1580m

항속거리

1868km

무 장

기수: 37mm NR-37 기관포 1문 & 23mm NS-23 기관포 2문

비록 세이버 조종사들이 미그-15에 맞서서 우세한 격추전과를 올리면서 분투를 했지만 B-29가 주간폭격에서 제외된 상태에서 벌어지는 전투기간의 소모전은 지상의 전황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으므로 결국 한국전쟁의 전세는 차이가 없었고 결국 휴전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 미그-15를 몰고온 사나이

전쟁중 미공군은 이 무서운 미그기를 완전한 상태로 얻기 위해서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액인 10만달러라는 상금을 내걸었다. 이 계획은 project Moorha라고 명명되었으나 전쟁 중에는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었다.

[ 노금석 중위가 몰고온 미그-15를 분석하고 있는 미군 요원들, 기체는 보물처럼 모셔졌고 미공군의 테스트 파일럿들이 이 기체를 테스트했다. ]

그러나 휴전후인 1953년 9월 21일, 북한공군의 노금석 중위가 미그-15bis 1기를 몰고 김포로 귀순해오면서 드디어 미공군의 숙원이 풀리게 되었다. 노금석 중위는 이 기체에 현상금이 걸린 것을 몰랐다고 하는데 결국 10만달러의 현상금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리고 미군은 즉시 이 기체를 미본토로 옮겨서 여러 가지 테스트를 실시했고, 미그-15의 성능을 완벽하게 분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자세한 내용은 '창공의 영웅들 : 미그-15를 몰고온 사나이'편에 자세히 설명되었으니 한번 읽어보시기를.....) 이무렵 미공군의 최고 테스트 파일럿으로 명성을 떨치던 척예거는 미그-15를 테스트해본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 북한 조종사가 타고온 미그-15를 테스트했다. 나는 그것을 처음 비행해 본 사람들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문제들이 많았다. 진동, 예측할 수 없는 앞머리의 들림현상, 치명적인 스핀, 형편없는 기내 압력유지 장치, 그리고 비상용 연료 펌프에 문제가 있어서 그것을 가동시키면 기체의 뒷부분이 날아가 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고속에서의 조종기능이 부족하여 마하 0.93을 넘을 수 없었다. 미그-15는 F-86보다 가벼워서 가속성능이 약간 더 좋았으나 최고 속도는 더 느렸고 반면 한계고도는 높았다. 그리고 선회성능에 묘한 문제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실속 경고기능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서 최대 선회율로 선회를 지속 할 수가 없었다. 만일 한계를 넘어서서 실속에 빠져 스핀에 들어가게되면 회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노금석 중위가 몰고온 미그-15bis의 일러스트, 미그-15bis는 미공군의 신예 F-86F과 필적하는 비행성능을 자랑했다.

* 마치면서

우리에게는 통일을 방해한 얄미운 전투기로 기억되고있지만 한국전쟁에서 미그-15가 없었다면 한국전쟁의 항공전은 항공전사에 별 의미가 없는 작은 사건으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공산권의 주력 전투기였고 한국전쟁의 패배자로서 기억되고 있지만 실제로 미그-15는 한국전쟁의 패배자가 아니었으며, 이후 베트남과 중동에서 벌어진 제트시대의 항공전에서 '미그'라는 단어는 서방세계와 맞서는 구소련 항공력의 상징 그자체였다.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2. 2. 7

한국전쟁에서 초반에 압도적인 공중우세를 보이며 공산군을 몰아내는데 큰 전과를 올리던 미공군은 1950년말에 갑자기 나타난 후퇴익의 은빛 제트기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이때까지 한국상공에서 아무런 저항 없이 활동하던 미공군의 주력기인 F-51 머스탱이나 F-80 슈팅스타는 훨씬 속도가 빠르고 날렵한 이 공산진영의 전투기에게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것이 바로 소련이 야심차게 선보인 비밀무기 미그-15였다. 미그-15의 등장으로 미공군의 항공작전은 일순간 주춤하면서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미군에게는 다행히도 실전에 배치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신예 F-86 세이버가 있었다. 불타는 하늘의 Great War Planes... 이번에는 미그-15에 맞서 한국상공에서 혈투를 벌였던 창공의 명검 F-86 세이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 명검의 탄생 *

2차대전의 최우수 전투기로 자타가 인정하는 P-51 머스탱을 개발했던 노스아메리칸사는 미공군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를무렵 미국에서도 제트전투기의 개발붐이 일고 있었는데, 노스아메리칸사 역시 곧 다가올 제트시대에 머스탱의 뒤를 미공군의 주력 전투기를 개발하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 XP-86의 시험비행 장면, 후퇴익의 날렵한 외형이 특징적이다. ]

이 차세대 전투기는 XP-86이라는 명칭으로 1944년 5월부터 설계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설계는 엔진만 제트엔진으로 변경했을뿐 기존 프로펠러기의 기술을 활용하여 주익이 직선으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유럽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후 독일로부터 여러 가지 항공기술이 입수되었고 특히 연합군에게 충격을 주었던 Me 262 제트전투기에 적용된 후퇴익의 기술이 주목을 받았다.

사실 Me 262는 완전한 후퇴익기는 아니었지만 독일의 항공기 개발자들이 생각해낸 후퇴익의 이론은 프로펠러기보다 훨씬 속도가 빠른 제트전투기에게는 매우 적합한 것으로 보였다. 노스아메리칸사의 수석기사였던 L.P 그린이 진두지휘하던 항공기술팀은 독일로부터 넘겨진 후퇴익의 기술을 분석하여 자신들이 개발중이던 신형 전투기에게 적용하기로 했으며, 이로인해서 직선익을 채택한 다른 회사의 경쟁기인 P-80 슈팅스타나 P-84 썬더 전투기보다 실용화가 늦어지게 된다.

[ F-86A의 조종석, 프로펠러기에 비해서 계기의 종류가 다양해졌다. ]

그러나 노스아메리칸사가 후퇴익을 선택한 것은 매우 현명한 결정이었다. 후퇴익은 고속 비행시에 날개의 각도가 뒤로 주어져 저항이 감소되고 그만큼 더 속도를 얻을 수 있어 제트 전투기에게는 매우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속 비행시에는 후퇴익이 양력의 감소를 초래하므로 비행이 불안정해지는 단점이 있었으며 이로인해 이륙시나 착륙시에는 다른 기체들보다 받음각을 더 주어야 안정적인 비행을 할 수 있었다.

1947년 10월 1일, 드디어 최초의 XP-86이 창공으로 날아올랐고,  이로서 창공의 명검 세이버가 새시대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세이버의 비행성능은 예상대로 매우 훌륭해서 고속비행시에는 매우 안정적이었고  최초의 3기는 엘리슨사의 J35 엔진을 장비하고 있었으나 추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더욱 강력한 GE사의 J47엔진을 채택하여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게 되었다. 그리고 1948년 4월 26일 세이버는 전속력으로 급강하하면서 음속을 돌파하는 쾌거를 이룩했는데, 이것은 제트 전투기로서는 사상최초의 쾌거였다. 그러나 이런 고속비행은 조종간의 반응을 둔하게 만들기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모든 조종면을 유압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고속비행시에도 조종성을 유지하도록 했다.

* 한국의 하늘로!

1948년 6월 11일 미공군은 기존의 전투기 표시기호였던 P (pursuit)를 F (fighter)로 바꾸도록 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세이버의 양산형은 F-86A로 명명되게 된다. 1949년 2월 최초로 실전배치가 시작된 F-86A형은 기체의 전반적인 구조는 XP-86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지만 엔진이 보다 강력한 J47-GE-5로 변경되었으며 이후에는 더 향상된 J47-GE-7을 장비하게 되었다. 무장은 기수에 집중되어 기수의 양측면에 2차대전당시 미공군기에 장착되어 맹활약한 12.7mm 기관총 3정을 배치하여 총 6정이 장비되었다.

[ F-86의 기수에 정렬된 12.7mm 기관총, 2차대전에서는 맹활약했으나 제트시대에는 화력이 좀 빈약하다는 지적이 있어 후에 20mm 기관총으로 대체한 F-86F도 잠시 등장했었다. 그러나 20mm는 탄약 휴대량이 적이 조종사들이 선호하지 않았다고 한다. ]

세이버의 실전배치는 다급하게 이루어졌는데, 이는 역사적인 라이벌인 미그-15의 등장에 따른 것이었다. 1950년 11월 1일, 중국공군의 도색을한 미그-15가 갑자기 출현하여 미공군의 F-51 편대를 위협하는 것을 시작으로 미그-15기들은 조직적으로 출현하여 미공군의 항공작전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이미 지상에서도 중국군이 인해전술로 UN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한데다가 하늘에서마저 주도권을 빼았길 위기에 처하자 미공군은 다급하게 신예기인 F-86 세이버를 극비리에 한국전쟁에 투입하기로 했다.

[ F-86A의 모습, 1952년에 촬영된 사진으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하기 위한 도색을 하고 축바비행을 실시했다고 한다. ]

1950년 12월 13일 최초로 한국에 도착한 F-86A는 제4 전투요격 비행단에 배치되었으며 미그가 출몰하는 압록강 이남의 지역으로 출동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12월 17일 세이버편대가 미그가 출몰하는 북쪽의 미그통로 (MiG alley)로 출격했다. 이들은 미그-15기들을 유인하기 위해서 F-80 슈팅스타의 비행대형과 무전방식을 사용하면서 비행했으며, 이 유인전술을 성공하여 곧 여러대의 미그-15가 이들을 공격해왔다. 곧이어 F-86 조종사들은 미그-15에대해 전혀 물러섬이 없이 맞대응을 했고 치열한 공중전끝에 부르스 힌턴 소령이 미그-15를 격추시키는 쾌거를 올렸다. 그러나 이날의 전투는 이후 2년간 한국상공에서 벌어질 세이버와 미그의 처절한 공중전의 서곡에 불과한 사건이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해도 이북의 미그통로에서는 제공권을 장악하기위한 양측의 주력전투기인 세이버와 미그-15가 피비린내나는 혈투를 벌였던 것이다.

* 지속적인 개량

미그-15와의 공중전이 계속되면서 F-86A의 후속 개량형인 F-86E형이 배치되기 시작하는데 이 형은 수평미익의 엘리베이터를 없애고 아예 수평미익 전체를 가동식으로 바꾼 것으로 이른 바 'all flying tail'이라고 불리는 방식을 사용한 것인데, 이는 고속 비행시에 기동성을 향상시키는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이 수평미익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겉에서 볼 때 A형에 비해서 별차이가 없는 것 같으나 내부적으로는 혁신적인 개량이 실시되었다.

[ 수원비행장에 주기중인 F-86E 세이버들의 모습이다. ]

그것은 기존에 사용되던 자이로식 조준장치를 대폭 개선하여 레이더와 컴퓨터를 이용한 거리측정식 조준장치를 장비한 것인데 최대 1300m의 거리에서도 조준사격이 가능했다고 한다. 이것이 미그-15와의 공중전에서 큰 이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 조준기의 등장으로 인해서 프로펠러기에 비할 수 없는 고속으로 공중전을 벌이는 제트시대에의 공중전에서도 미공군 조종사들은 보다 먼거리에서 정확하게 적기를 조준할 수 있었다. 이 조준기는 A형의 후기생산분 47대에도 장착되었다고 한다.

1953년 제16 전투요격 비행단 소속의 F-86E이다. 본 기체는 비행단장이었던 에드워드 헬러 중령의 기체로서 그의 이름을 딴 HELL-ER BUST X라는 노즈아트가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전자장비를 제외하 기체 자체의 전반적인 비행성능에서는 미그-15쪽이 더 우위에 있었다. 미그-15는 9000미터 이하의 고도에서 F-86E보다 기동성이 약간 떨어지는 점 말고는 고고도에서의 기동성과 상승력, 실용 상승한도에서 F-86E를 상회하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F-86 조종사들은 2차대전을 경험한 베테랑이었던데다가 우수한 조준기를 사용하여 미그-15에 대한 공중전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한다.

1951년 김포에 주둔하고 있던 제334 전투요격 비행단의 도널드 맥린 대위의 기체이다. 탬프테이션이라는 특색있는 노즈아트를 장식하고 있다. 기수 끝단의 검게 칠해진 부분이 신형 레이더 주준기가 장비된 곳이다.

 

1952년 한국전선의 제51 전투요격 비행단 25 전투요격 비행대 소속의 F-86E형이다. 동체와 주익의 노란색띠는 이 기체가 한국전선에서 활동중인 기체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공중전에서 앞서고 있다고해도 이런 비행성능의 열세는 미공군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이런 보고서를 접한 노스아메리칸사는 즉시 개량작업에 들어갔으며, 미그-15를 확실하게 압도하기위해서 엔진을 더욱 강력한 J47-GE-27로 장비하였도록 했다. 이에 더해서 기체의 운동성을 높이기 위해서 주익 앞전의 슬랫을 폐지하고 주익의 끝부분을 3인치 연장하고 앞부분을 6인치 길게 설계했는데, 이런 주익의 변화는 주익의 면적을 증대시켜 기동성을 현격하게 향상시켰으며 결국 중고도 이상의 고도에서도 미그-15에 비해서 전혀 뒤지지 않는 성능을 가지게 되었다. 이 주익은 조종사드로부터 '6-3 윙'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 F-86F형으로 MiG Mad Marine이라는 별명을 가진 기체로 제25 전투요격 비행단의 존 글랜 소령 탑승기이다. 그는 훗날 우주비행사를 거쳐 상원의원으로 선출되기까지 한다. ]

이 개량형은 F-86F형으로 명명되었으며 곧장 한국전선으로 배치되어 F-86A와 E를 대체하고 미그와의 대결을 위해서 미그통로로 출격했다. 이후의 전투는 거의 일방적으로 전개되었으며 미그-15에 대해서 거의 10:1의 격추교환비를 자랑하게 되었다. (물론 이 기록은 전적으로 미공군의 주장이며 최근에는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러시아측의 반론이 나오고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볼 때 전반적으로 F-86이 미그-15에 대해서 압도적인 전과를 올린 것은 분명하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F-86의 우수한 성능에 더해서 2차대전에서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은 우수한 조종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61년 한국공군 곡예비행팀에서 활동중이었던 F-86F형이다. 현재의 한국공군 곡예비행팀인 블랙이글의 도색과 비교해보면 비슷한 전통이 이어져 오는 것이 느껴진다.

 

North American F-86E Sabre

분 류

1인승 전투기

동 력

제네럴 일레트릭 J47-GE-13 (추력 2359kg)

최고속도

시속 1099km

상승속도

분당 1580m

항속거리

1498km

무 장

기수 - 12.7mm 기관총 6정

* 다른 개량형들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F-86은 A, E, F형이었다. 그러나 비록 한국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았지만 이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세이버의 개량형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F-86D이다. (F-86B, C형도 존재했지만 개발도중 취소되었으므로 본 연재에서는 생략함.)

[ F-86A형과 D형의 기수의 차이를 볼 수 있는 일러스트이다. 레이돔이 추가되고  캐노피의 개폐방식이 바뀌었다. ]

이 F-86D는 1949년 미공군이 주야간을 불문하고 어떠한 날씨에서도 침투해오는 적기를 찾아서 요격할 수 있는 본토 방위용 요격기의 개발을 추진하면서 노스아메리칸사가 F-86을 개량한 기체이다. 기본적으로는 F-86A형의 틀을 유지하면서 기수에 고성능의 레이더와 사격통제장치를 장비하도록 한 것인데 이런 장비들의 장착을 위해서 기수가 대폭변화되고 기체의 밸런스도 재조정되어 F-86A의 외형과는 전혀 다른 기체로 보이기까지하는 새로운 전투기로서 새롭게 탄생했으며 이런 변화 때문에 조종사들로부터 세이버독 (Sabre Dog)이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했다.

[한국공군에 배치되었던 F-86D형이다. 기수의 커다란 레이돔이 특징적으로 F-86의 전통적인 외형과는 전혀 다른 전투기로까지 보인다. 자세히보면 사이드와인더 미사일을 장착하기위한 파이런이 보인다. ]

기수에는 휴즈사가 개발한 E-4 사격통제장치가 장착되었으며 소련의 장거리 폭격기를 요격하는 임무에 적합하도록 기수의 기총은 폐지되고 24발의 2.75인치 로켓탄을 고정무장으로 하는 독특한 방식을 채택하였고 후에는 AIM-9 사이드와인더를 장비하게 된다. 이 F-86D는 1950년대 중반까지 미 본토방위의 주력으로 활동했으며 1955년까지 약 2500여기가 생산되었다고 한다.

1955년 일본 오끼나와 공군기지에 주둔하고 있던 미공군 제25 전투요격 비행대 소속의 F-86D이다.

(foxmouse: 이후 F-86은 F형의 후계형인 H형과 D형의 후계형인 L형으로 더욱 발전하게 되지만 이런 세부사항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겠습니다. ^ ^ )

* 마치면서

제공권을 공산군에게 빼앗길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한국상공에나타나 미그-15를 맞아 맹활약하면서 상공을 지켜낸 F-86 세이버는 분명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세이버는 한국전쟁이 끝난후에 우리나라 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채택되어 영공을 방위했으며 마지막 세이버는 1980년대 초반까지 활약하기도 했고 자유진영의 상징과도 같은 전투기로 세계 각국에 널리 보급되었다. 홈지기가 얼마전에 방문했던 공군사관학교의 정문에는 2기의 세이버가 상승하는 자세로 장식되어 있는데, 마치 한국전쟁에서 미그를 쫒아 비상하는 멋진 모습을 연상시켰다. 세이버는 한국전쟁이 끝난후 서방의 상징과도 같은 전투기가 되었으며 세계 26개국에서 사용되었으며 총 8700대가 생산되었다고 한다.

한국상공의 명검 F-86 세이버는 라이벌 미그-15와 함께 제트시대의 서막을 활짝 열어 항공전사에 커다란 이정표를 남긴 위대한 항공기임에 틀림없다.


◇ Messerschmitt Me 163 Komet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1. 2. 16

1944년 8월 5일, 미군 폭격기들이 머스탱편대의 호위하에 고도 3만피트로 독일 상공을 날고 있었다. 이시점에서 독일 전투기들의 저항은 거의 없을 것이었고, 설사 있다고 해도 든든한 머스탱 편대가 요리해 줄 것이다. 이 폭격기부대의 목표는 마그데부르크였다. 그순간 갑자기 흰연기를 끄는 3기의 전투기가 폭격기 편대위로 튀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호위전투기 머스탱 편대를 지나쳐서 거의 보이지 않을정도까지 솟구쳐서 올라간 것이다. 미군 조종사들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때 3기의 독일기는 순식간에 공중제비를 도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굉장한 속도로 떨어져 왔다. 대응할 겨를도없이 30mm 기관포의 속사음과 함께 3기의 머스탱이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리고 이 정체불명의 독일기들은 눈깜짝할새에 사라져 버렸다. 출격에서 돌아온 미군 조종사들은 '생전처음보는 굉장한 속도의 독일전투기들이 나타났으며 그 속도는 너무나 빨라 전혀 대응할 수가 없다'고 보고하였다. 이후 미군 조종사들 사이에는 '고도 3만의 독일기를 조심하라!'라는 말이 나돌았다. 이것이 바로 세계최초의 로케트 전투기 Me 163의 실전데뷔 순간이었다. 불타는 하늘의 Great War Planes... 이번에는 말도많고 탈도많은 Me 163 로케트 전투기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 Me 163의 힘이 넘치는 이륙 순간 ]

독일 공군이 2차대전기간동안 실전에 투입했던 기체중에 제일 혁신적인 전투기는 단연 Me 163일 것이다. 특징적인 땅딸할 동체에 삼각 후퇴익을 가지고 있었고 수평꼬리날개가 없는 선구적인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기체 디자인은 연합군측에서는 상상도 못하고 있던 독일만의 독창적인 항공기술의 본보기였다. 게다가 이 전투기는 특이하게도 로케트를 동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제식명칭은 혜성이라는 뜻의 '코메트(komet)'였지만 조종사들로부터 '동력 계란'이라는 애칭을 얻게된 이 기체는 독일 공군의 전투기 개발기술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미완의 상태에서 실전에 투입되어 그 시작은 미미했다.

이 전투기는 그 시작이 19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무렵에 고속 글라이더를 연구하던 D.F.S사의 바움커 박사와 리피쉬 박사는 많은 실험을 거쳐서 몇가지 새로운 글라이더를 개발했다. 이들을 실제로 테스트하던중 이들은 초고속 전투기를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리고 결국 로켓모터를 장착하는데 적합하도록 디자인된 고속 연구기 DFS39기를 개발하게 되었다. 이 기체는 매우 좋은 비행특성을 가지고 있었고 혁신적인 후퇴익을 채용하고 있었다. 이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발의 속도는 늦어졌으나 작업은 꾸준히 진척되어 1941년 봄에 T-슈토프와 Z-슈토프를 연료로 하는 발터 RII-203 로켓을 장착하는데 성공했다.

1944년 6월 최초로 창설된 로켓 전투기 부대인 JG400 소속의 Me 163B-1a 전투기이다. 동체 상부에 T 와 C 문자가 보이는데 이것은 T-슈토프와 C-슈토프라는 연료의 주입구이다. 동체하면의 썰매형 강착장치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최초의 시작기 Me 163V1 최초의 동력비행은 1941년 여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곧 시속 1002km라는 놀라운 속도를 선보였던 것이다. 이후 로켓기술이 더욱 발전하게 되면서 T-슈토프 (과산화수소와 물의 혼합물)과 C-슈토프 (수산화 하이드라진, 메틸 알콜, 물의 혼합물)을 연료로 사용하는 발터 109-509A 로켓모터를 장착한 Me 163B형이 개발되게 되었다. 이후 독일공군의 요구로 전투기로 테스트를 하게되면서는 무장을 2문의 20mm 기관포를 장착한 Me 163B-0가선보였고 Me 163B-1형에 이르러서는 2문의 30mm MK 108기관포를 장착하게 되었다. 이 혁신적인 전투기는 최고속도가 연합군에서 가장 빠른 P-51D 머스탱보다 시속 250km나 빠른 시속 950km이상을 자랑했으며 매분 3500m라는 경이적인 속도로 수직으로 상승할 수 있었다.

역시 JG400 소속의 Me 163B-1a 전투기이다. 기수의 작은 프로펠러는 동력을 얻기위한 것이 아니라 내부 전기장치를 가동하기 위한 발전용이다. 외모상으로만 보면 이 땅딸한 기체가 2차대전에서 가장 빠른 전투기였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전투기는 아직 미해결된 과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착륙장치와 싣고 있는 연료의 폭발성이었다. 이 전투기는 커다란 바퀴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것은 이륙할 때만 사용되게 되며 이륙 직후에는 동체에서 떨어져 나오게 된다. 이후 착륙할 때는 동체하면의 썰매를 사용해서 착륙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전투기의 착륙속도는 무려 시속 190km였기 때문에 아차하다가는 심각한 사고가 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경험많은 조종사들이 필요했는데 1944년의 시점에서는 독일에 이런 조종사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신참 조종사들이 이 위험한 전투기를 몰아야 했다.

[ 출격 순간! 이 위험한 전투기에 탑승하는 조종사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

게다가 더욱 큰 문제는 이 로켓 전투기의 연료였다. T-슈토프와 C-슈토프라고 불리는 화학연료를 싣게 되어 있었는데, 이 연료들은 매우 휘발성이 강한 위험한 물질이었다. 사람의 손에 닿기만해도 순식간에 피부를 부식시킬 정도의 엄청난 부식성도 가지고 있었다. 이 두가지 연료가 혼합되면 순간적으로 격렬한 반응을 일으켜 폭발하게 된다. 이 폭발력이 Me 163 코메트의 추진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연료들이 연료통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경우에는 기체가 충격을 받으면 그냥 폭발해 버리는 경우가 빈번했던 것이다. 따라서 착륙중에 기체가 심하게 흔들리는 경우 연료의 폭발로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게다가 1660리터의 연료를 싣고 이륙하지만 엄청난 연소율로 인해서 연료는 4-8분 사이에 모두 소모되었고 이후에는 글라이더처럼 활공해서 돌아와야 했다. 그러므로 비행시간은 활공을 포함해도 10여분에 불과했고 따라서 비행장에서 반경 40km 이상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바로 머리위로 날아오는 연합군기들을 대상으로만 사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 연료 충전중의 모습, 손에 닿기만 해도 피부가 심하게 손상될 정도의 위험한 물질이었다던데...]

이러한 심각한 문제점들이 있었음에도 연합군의 폭격으로 석유생산시설이 대부분 파괴되어 프로펠러 전투기들에 사용되는 독일공군은 고옥탄가의 가솔린이 부족한 상황에 처하자 이 전투기의 실전투입을 빠르게 추진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1944년 6월 세계최초의 로켓 전투기로만 장비된 비행단인 JG 400이 창설되어 미군 폭격기들의 주요 침투경로중 하나인 브란디스에 기지를 마련했다.

이후 첫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장식하기는 했으나 이후 많은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우선 경험많은 조종사들이 부족하여 기체가 파손되거나 조종사들이 부상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문제는 착륙할 때였다. 이때 연료가 남아있으면 폭발할 위험이 있었고, 시속 190km의 고속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활주로를 벗어나는 경우에는 금새 뒤집혀서 대파되곤 했다. 더구나 이 전투기의 부실한 강착장치(썰매)는 아무리 경험많은 조종사라 할지라도 거친 착륙을 할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며 이로인해서 척추뼈가 부러진 조종사까지 발생할 정도였고 이 위험한 기체에 탑승하는 것을 거부하는 조종사들도 속출했다.

[ 코메트의 전투 방식을 보여주는 일러스트 ]

코메트가 사용한 전형적인 공격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적폭격기의 접근 경보가 있으면 곧장 이륙하여 수직상승한후 적기들보다 3000피트 정도 더 위쪽까지 상승한다. 이때 대개 연료가 모두 소모되므로 이후부터는 이때가지 얻은 속도를 이용하여 고속 활공으로 수직하강하여 30mm 기관포나 R4M 로켓탄을 사용하여 공격하고 다시 반전하여 상승하면서 한번 더 공격기회를 잡게 된다. 이후에는 속도를 잃기 때문에 곧장 기지로 내빼는 전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성공적으로 이륙하여 적 폭격기 편대와 만난다 하더라도 상대속도가 너무 차이나는 초고속의 상황에서 공격기회를 잡기는 어려웠으며, 1-2차례의 공격기회를 잡는다 하더라도 30mm 기관포나 R4M 로켓탄을 명중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미군 폭격기와 충돌할 위험이 있었으므로 200m 이내로 접근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반면 미공군 조종사들도 매우 당황했다. Me 262 제트전투기보다도 훨씬 빠른 이 로켓 전투기의 출현으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가장 빠른 호위 전투기 P-51D 머스탱 조차도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독일 전투기를 그저 구경하는수 밖에는 없었으며 추격하거나 공중전을 벌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더구나 미군 조종사들이 이 독일전투기의 치명적인 약점을 알리가 없었으므로 이 독일 전투기가 나타나면 어떻하나 하는 일종의 노이로제에까지 빠질 상황이었던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일부 미군 폭격기 지휘관들이 코메트가 출현하는 지역으로 출격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태까지 있었다고 한다.

[ 코메트의 조종석, 계기는 오히려 프로펠러기들보다 간단한 것 같다. ]

결국 이 코메트는 양측의 조종사들 모두를 서로 다른 고민거리에 빠뜨린 전투기였다. 코메트는 총 279기가 생산되었다고 하는데 실전에 투입된 기체는 1/4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JG400의 조종사들은 필사적으로 떠올랐으나 그들이 기록한 공인 격추기록은 미군 폭격기와 전투기를 합쳐서 9기였다고 한다. 물론 더 많은수의 미군기들이 손상을 입었으나 무사히 귀환하였다. 공중전에서는 전혀 손실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뭐 싸우기만 하면 백전백승이라는 또다른 기록을 부여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기록한 격추한 적기의 수보다 훨씬 많은 독일 조종사들이 이 까다로운 전투기를 조종하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던 것이다. 이후 항속거리를 늘린 Me 163C나 Me 263이 개발되었으나 실전에 투입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Messerschmitt Me 163B-1a

분 류

1인승 요격 전투기

동 력

발터 109-509A-2 로켓 모터 (추력 2000kg)

최고 속도

시속 960km

항속 거리

80km

무 장

동체 - MK 108 30mm 기관포 2문

(옵션 : R4M 로켓탄 4발)

Me 163 코메트는 비록 미완의 상황에서 실전에 투입되어 얻은 것 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기는 했으나 Me 262와 함께 독일 항공 기술력의 상징과도 같은 기체이며 전후에 미국이 X-1 로켓기를 만들어 최초로 초음속을 돌파하는데 큰 기술적인 기여를 했다고 한다.

"나의 좋은 친구 볼프강 슈페테가 Me 163을 탑승한 적이 있어서 나는 이 전투기가 언제든지 폭발할 위험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이 때문에 많은 손실이 있었다는 보고도 있었다. 이 전투기는 적 폭격기를 육안으로 확인한 상태에서 이륙하여 빠르게 상승한후 공격을 시작했다. 내가 아는 주요 전술은 가능한 연료탱크에 연료가 없는 상태에서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위험한 전투기였으므로 그 비행기를 좋아하는 조종사를 본적이 없으며 개인적으로는 미친짓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연료를 소모한후 공격하고 활공하여 착륙을 해야하는 전투기라는 것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독일 공군 장군, 발터 그루핀스키 -

◇ Heinkel He 111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0. 6. 10

독일 공군이 부활하여 첫 데뷔전인 스페인 내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이후 서유럽 전토를 석권하고 최후의 보루였던 프랑스까지 함락시키면서 독일 공군을 공포 그자체로 인식시킨데에는 다른 것 보다도 도시에 대한 무차별 폭격으로 상징되는 무자비한 파괴력과 그로 인한 공포감의 조성이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가공할 폭격작전의 한가운데에 독일 공군의 주력 폭격기 2개 기종 He 111과 Do 17이 선봉에 서고 있었다.

아마도 개전초기에 독일 폭격기중에 가장 유명한 기종을 꼽으라면 하인켈 He 111이 유력한 후보일 것이다. 날씬한 디자인의 유선형 날개와 동체의 디자인으로 독일 공군 수평폭격기부대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던 이 폭격기는 사실 여객기로 위장되어 개발되었다. 1934년 2월에 첫 비행을 한 이 기체는 블리츠라는 이름을 달고 루프트한자의 마크를 그려넣고서는 영국, 프랑스, 소련의 노선에 취항하여 장차 공격목표가 될 지역에 대한 사진 촬영을 하는 임무에 투입되기도 했다. (물론 영국도 자국의 여객기에 사진기를 장착하여 독일 군수시설을 촬영하기도 했다.)

1939년 폴란드침공전에 투입되었던 He 111P형이다. 폴란드 에서는 바르샤바를 폐허로 만들어 버린 공포의 존재로 성가를 드높였다. 이 형은 곧 새로운 양산형 He 111H형으로 대체되었다.

이후 독일이 재 군비를 선언한후 즉시 폭격기로 설계를 변경하여 He 111B-1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채용되었다. 늘씬한 유선형의 동체와 곡선미를 보이는 날개등으로 인해서 스페이드라고 불리우기도 했던 이 폭격기는 실전에 최초로 선보였던 스페인 내전에서 대량으로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성공 요인은 속도에서 단연 적의 전투기보다 빨랐기 때문이었고 따라서 적 전투기의 요격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몇가지 개선을 통해서 최초의 양산형인 He 111F가 생산되게 되었고 He 111P형이 그 뒤를 이어 소량 생산되었다.

그리고 1939년이 되자 더욱 개선된 He 111H형이 등장했는데 이형이 가장 많은 수가 사용된 본격적인 양산형으로서 기존형의 엔진(DB 601)을 융커스 유모 211 엔진으로 교체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이후 이 He 111H의 변종들이 1939년부터 1943년까지 독일 공군이 공세적으로 폭격작전에 나설 때 주역으로 활약했다. 상당히 많은 변종들이 활동을 했는데 간단히 알아보면 He 111H-6는 어뢰를 장착할 수가 있었고, He 111H-11/R2 형 같은 경우는 Go 242 글라이더를 견인할 수 있도록 개량되어 있었다. 그외에 특수한 라디오 장치를 갖추고 패쓰파인더의 임무를 수행하던 He 111H-14형이라던가 방어 무장이 강화된 He 111H-16형, 16명의 공수부대원을 태울수 있었던 H2 111H-20형등등이 있었다. 가장 특이한 것은 Zwilling(쌍동이)라고 불리던 He 111Z 형으로서 2기의 He 111H를 결합하여 Me 231 기간트 글라이더를 견인하도록 개량된 형등이 있다.

1940년  프랑스 전투에서 성가를 높였던 KG 54 소속의 He 111H-3형이다. 이 폭격기부대는 특징적인 해골마크를 부대마크로 하고 있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도 본격적으로 투입되었으나 많은 손실을 입었다.

하인켈사의 이미지를 드높인 폭격기는 독일 전격전의 주역중 하나였다. 프랑스 전투까지는 훌륭하게 임무에 투입되었으나, 가장 중요한 전투중 하나였던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는 그 이전에 거두었던 성공을 계속 할 수는 없었다. 사실 이 폭격기는 설계될 때 적의 전투기보다 빠른 속도로 비행하는 쾌속 폭격기로서 개발된 것이었으므로 기체의 강도나 조종사들을 보호하는 장갑판등이 희생되었다. 하지만 이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내전이나 프랑스 전투까지도 이 폭격기는 거의 무저항의 하늘을 날아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는데 성공했다.  

Heinkel  He 111H-16

분 류

5인승 폭격기

동 력

융커스 유모 211F 엔진 (1350마력)

최고 속도

시속 436km

항속 거리

1950km

무 장

기수 - MG FF 20 mm 기관포 1문

동체 - 기관총 6정

폭탄 탑재량 - 2톤

그러나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제대로된 호위 전투기의 엄호가 없이 단독으로 영국 전투기들의 방어망을 돌파하는 것은 매우 큰 희생이 따랐다. 1940년을 기준으로한 시점에서 이 폭격기는 사실상 구식이었던 것이다. 영국의 스핏화이어나 허리케인은 이 폭격기보다 훨씬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전투기들과 교전을 벌이기에는 He 111은 방어무장이 빈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He 111은 방어 무장으로 1문의 20mm기관포와 6정의 기관총을 갖추고 있었으며 후미 기관총은 동체에 고정되어 무조준으로 정후방으로 발사되도록 되어 있었다.) 게다가 기체 강도도 약해서 얼마안되는 명중탄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많은 수가 출격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워낙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으므로 많은 폭격기들이 런던에 도착하여 런던에 불의 재앙을 가져다 주기도 했었다. 이후 1943년까지는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계속 사용되다가 독일이 수세로 몰리면서는 점차로 전선에서 사라져갔다.

 ◇ Junkers Ju 88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1. 3. 13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Ju 88은 생산대수가 불충분하여 Do 17이나 He 111처럼 독일 공군의 주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독일 공군의 폭격기 트리오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성공적인 기체였다.

최초의 양산기인 Ju 88V1형이 1936년 12월 21일에 첫 비행을 실시했으나 몇가지 문제점으로 1939년까지 개발이 지연되어 양산형인 Ju 88A1형은 1939년이 되어서야 60대가 일선 배치를 마친 상태였다. 따라서 스페인 내전에서 실전 테스트를 할 기회를 얻지 못했고 Do 17, He 111이 전격전의 주역으로 맹활약 하는 동안 거의 활약을 해보지 못한채 북해의 영국 함대를 상대로한 작전이 일부 투입되는 정도였다.

하지만 폭격기들이 총 동원되어 투입된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는 독일 공군의 폭격기대원들이 가장 타고싶어하는 기체가 되었다. 하지만 이때만해도 아직 숫자가 적어서 Do 17, He 111보다 활약할 기회가 적었다. 이 폭격기의 가장 큰 장점을 시속 517km에 달하는 빠른 속도였다. 게다가 폭격기 답지 않은 민첩한 운동성까지 가지고 있어서 영국 전투기 조종사들로부터 가장 격추시키기 어려워하는 상대로 인정받았다. 특히 Ju 88A-1형은 급강하용 브레이크까지 장비하고 있어서 급강하 폭격기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방어무장이 빈약하여 영국 공군 전투기들의 도전을 완전히 뿌리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독일 공군의 기록에 의하면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출격후에 돌아올 확률이 가장 높은 기체였다고 한다.

1940년 이탈리아의 카타니아에 주둔중이던 Lehrgeschwader 1 소속의 Ju 88A-5형이다. 본 기는 말타섬에 대한 항공작전에 투입되었다. Ju 88의 튼튼한 랜딩기어는 시실리의 열악한 비행장에서 작전하는데 적합했다고 한다.

영국 본토 항공전이 끝난후부터는 우수한 성능을 인정받아 독일 공군의 중형 폭격기 세력의 가장 중요한 전력이 되었다. 빠른 속도와 뛰어난 기동성이라는 특성으로 인해서 아예 폭탄을 장비하지 않고 공중전 무장을 장비한 중 전투기형인 Ju 88C형이 등장할 정도였다. 특히 1942년 부터는 영국 폭격기들의 야간 폭격이 증가함에 따라서 리히텐 슈타인 기상 레이더를 장비한 Ju 88C-6b형이 야간 전투기로서 본격적으로 투입되어 Bf 110과 함께 독일의 밤하늘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후 이 기체는 엔진이 강화되고 수직 꼬리날개가 변형된 Ju 88R, Ju 88G형으로 계속 개량되었다.

Junkers  Ju 88G-1

분 류

4인승 폭격기/야간 전투기

동 력

BMW 801 엔진 (1400마력)

최고 속도

시속 512km

항속 거리

1780km

무 장

동체 - 7.92mm MG 81기관총 4정

폭탄 탑재량 - 3톤

Ju 88의 또하나의 특징은 이 기체가 다양한 용도로 활용이 가능한 범용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서 북아프리카의 열기속에서도 Ju 88A-4 trop형이 북아프리카 상공에서 맹활약 하였으며 Ju 88A-6/U형은 3명의 승무원이 탑승하여 해상추적용 레이더를 장비하고 해상 목표물에대한 공격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Ju 88A-13형 같은 경우는 장갑을 강화하고 지상 공격임무에 투입되었고 2발의 어뢰가 장비가 가능하도록 개량된 Ju 88A-17형도 일부 전투에 투입되었다. 특이한 형은 Ju 88P형으로 이형은 지상 공격임무에적합하도록 기수의 창을 축소하고 전방 고정 총기를 다양하게 변형 시켜 장비하도록 했다. 37mm, 50mm 포를 장비하는 형이 있었으며 심지어는 75mm 대포까지 장비하기도 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88mm Duka gun이나 화염 방사기를 장비한 형도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이후 고고도 침투형 폭격기인 Ju 88S, 고고도 정찰기은 Ju 88T형이 개발되었지만 많은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독일 공군내에서 다양한 임무에 투입되어 많은 활약을 한 Ju 88은 총 14980기의 생산기록을 가지고 있다.


◇ Dornier  Do 17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1. 4. 24

도르니에사가 개발한 Do 17은 하인켈 He 111과 쌍벽을 이루면서 개전초기 독일 공군의 주력폭격기로 활약했던 기체이다. 물론 이 폭격기 역시 1934년에 여객기로 위장하여 개발이 되었다. 하지만 He 111같은 경우 여객기로 활용되다가 폭격기로 변경되었던 것 과는 달리 Do 17의 가는 동체는 승객을싣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판명되어 루프트한자로부터 인수를 거부당했고 결국 빠른 속도를 이용해서 우편물을 배달하는 용도로 생산되었다. 개발당시 원형기는 수직 꼬리날개가 1개였으나 가는 동체로 인하여 수평뒤틀림이 발생하는 바람에 수직 꼬리날개를 2개로 늘렸다.

우편물 배달이나 하던 이 기체는 하지만 빠른 속도로 인해서 독일 공군의 주목을 받았다. 따라서 군용기로 개량되어 폭격기와 정찰기의 용도로 양산형 기체인 Do 17E형과 F형이 개발되었다. 이 두가지 형은 1937년 독일이 재군비를 선언했을 무렵 공중 퍼레이드에서 당시 독일 공군의 전투기들보다 빨리 비행하는 모습을 보여 관중들을 놀라게 했다. 1937년 스페인 내전이 벌어지자 Do 17은 He 111과함께 주목할 만한 성능을 보였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던 공화군의 모든 기체들보다 빨리 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이 기체는 특이한 가는 동체로 인해서 '날으는 연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스페인 내전이 끝난후에는 900마력의 BMW 브라모 성형엔진을 장착한 폭격기형인 Do 17M과 865마력의 BMW 132N엔진을 장착한 정찰기형인 Do 17P가 생산되어 1939년 독일 공군의 주력으로 활약했다.

1940년 그리스의 타토이에 주둔하고 있던 KampfGeschwader 2 staffel 1소속의 Do 17Z-2형이다. 조종석의 아래에 그려진 폭탄을 나르는 독수리의 그림은 매우 유명한 것으로 바로 이 KG 2 staffel 1의 부대 마크이다.

이후 Do 17Z형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가장 유명한 형으로서 훨씬 깊어지고 시야가 넓어진 조종석이 특징이었다. 이 형은 1939년말에는 352기나 생산되어 수적으로도 주력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독일 전격전과 서유럽 석권에서 하늘을 뒤덮을 듯이 날아와서 폭탄을 퍼붓는 Do 17의 모습은 독일 공군의 상징과도 같은 모습이되었다. Do 17Z형도 다양한 세부 개량형을 가지고 있어서 Z-1형은 500kg의 폭탄을 탑재할 수 있었고 4정의 7.92mm MG15 기관총을 방어무장으로 하고 있었으나 빈약하다는 지적으로 인해서 이를 8정으로 증량하고 엔진을 1000마력의 브라모 엔진으로 변경하여 폭장능력도 1000kg으로 늘어나게된 Z-2형이 생산되게 되었다. 그리고 기체를 경량화 시켜 빠른 속도를 내게한 정찰기형인 Z-3형도 있었으며, 특이한 예로서 1940년 말에 생산된 Z-6/ Z-10형은 2정의 20mm 기관포와 4정의 7.92mm 기관총을 갖추고 영국 공군의 폭격기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설계된 야간 전투기형이었다.

*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의 Do 17 *

프랑스 전투까지의 성공과는 달리 Do 17역시 He 111처럼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는 매우 취약한 존재임이 증명되었다. 특히 시속 426km의 속도는 스페인 내전때만해도 굉장한 것이었지만 영국의 신형 전투기들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영국 전투 당시의 주역인 Z-2형은 폭장능력과 방어 무장은 강화되었으나 예정되었던 DB 601엔진이 Bf 109 생산에 모두 소요되면서 계획보다 약한 BMW 브라모 파프너 엔진을 장착하게 되면서 최대 속도가 이전형보다 오히려 감소한 시속 410km로 떨어져 버렸다. 이것이 영국 전투기들에게 노출된 가장 큰 약점이었다. 영국 조종사들의 평가에 의하면 영국 본토 항공전에 투입된 독이 폭격기 3총사 He 111, Do 17, Ju 88 중에서 이 기체가 가장 격추시키기 쉬웠다고하는 평가도 있다. 폭탄 탑재량도 He 111의 절반정도에 불과하다는 단점도 있었다.

Dornier  Do 17Z-2

분 류

4인승 폭격기

동 력

브라모 323P 성형엔진 2기 (각 1000마력)

최고 속도

시속 410km

항속 거리

1360km

무 장

동체 - 방어총좌에 MG 15 7.92mm 기관총 8정

폭탄 탑재량 - 1톤

하지만 이 폭격기는 저고도에서의 폭탄 투하 능력에 있어서는 놀라운 정확성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사용하는 전법은 목표 상공에서 급강하 하면서 저고도로 돌입하여 목표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속도를 이용하여 다시 고도를 확보하는 전법이었다. 독일 공군의 기록에는 우수한 조종사가 조종하는 경우 작은 건물까지도 정밀하게 폭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전과는 1940년 8월 15일 로체스터에 위치한 쇼트 브라더즈 항공기 공장에 대한 폭격으로서 1대의 Do 17기가 저공으로 접근하여 이 공장의 부품창고에 정확한 명중탄을 떨어뜨려 영국이 절박하게 필요로하던 항공기 생산을 지연시키는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 Messerschmitt Bf 110 Zerstörer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0. 9. 22

2차대전의 독일전투기 하면 누구나 Bf 109나 Fw 190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후광에 가려 주목을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독일 공군의 실질적인 주요 전력중 하나로서 어떤 임무에도 다양하게 투입된 독일 공군의 묵묵한 일꾼 Bf 110을 무시한다면 2차대전의 항공전을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불타는 하늘의 Great War Planes... 이번 회에서는 독일 공군의 사역마 Bf 110 젤스퇴러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 전략 전투기 젤스퇴러 *

1차대전이 끝나고 독일공군의 재건이 추진되면서 연료를 조금밖에 탑재하지 못하는 소형 전투기의 한계를 극복하고 폭격기를 완전하게 엄호하여 대항해오는 적국의 단발전투기에게 대적할 장거리 호위전투기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 독일을 제외한다면 이러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전투기를 개발했던 나라는 유럽의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있던 미국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개념의 전투기를 설계, 제작하는 것은 당시의 기술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독일에서는 항공기의 천재라 불리는 빌리 메서슈미트 박사가 이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Bf 110을 탄생시켰다. 훗날의 평가에서는 실패작으로 평해지고 있지만 사실 2차대전이 시작될무렵 제대로된 쌍발 장거리 전투기는 이 Bf 110 단 한가지 뿐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1940년 6월 전격전 직후 프랑스에 주둔하고 있던 Bf 110C-3형이다. 본 기는 ZG 1 제 1중대 소속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에 투입되었으나 기대와 달리 폭격기 호위임무에서 스핏화이어와 허리케인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34년 미래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독일 공군은 메서슈미트사에게 적의 단좌전투기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무장과 빠른 속도를 가진 장거리 전투기를 제작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니까 Bf 110은 그 설계 개념에서부터 장거리 호위전투기로서 개발되었던 것이다. 빠른 속도와 강력한 무장을 가질 수 있다면 기동성이 좋은 소형전투기에 대항해서 충분히 싸울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 이 전투기가 탄생하게된 배경이었다. 1936년 드디어 융커스 유모 210B엔진을 장착한 Bf 110A 시작기가 첫 비행에 성공했고 이후 2년간은 계속 개량이 진행되었다. 이 기간동안 기체의 발전으로 독일 공군이 제시한 조건에 대부분 만족할 만한 성능을 보일 수 있었고 결국 1938년 양산이 결정되었다.

[ 샤크마우스를 도색한 Bf 110C이 당당한 모습으로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

이 최초의 양산형은 Bf 110B형이었으며 융커스 유모 210G엔진을 장착하고 있었다. 특징적인 것은 전투기로서는 과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강력한 무장으로서 기수에 2문의 20mm 기관포와 4정의 7.92mm 기관포를 탑재하도록 했다. 그리고 후방석에서 뒤쪽을 방어하는 1정의 7.92mm 기관총이 장착되어 있었다. 이 기체의 화력에 대한 독일 공군의 기대는 '파괴자'라는 뜻의 젤스퇴러 (zerstörer)라는 별명에 반영되어 있었다.

이후 1939년부터 엔진을 보다 강력한 다이뮬러 벤쯔의 DB601A로 교체한 Bf 110C형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이 형이 본격적인 Bf 110의 대량 생산형이다. 이 모델은 강력해진 엔진으로 속도와 항속거리가 이전 형보다 훨씬 향상되었으며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냉각기의 위치를 낮게 조정하여 난기류 발생을 최소화 시켰다. 그리고 Bf 110C-4형부터는 2명의 조종사들에 대한 보호대책으로 조종석 주위에 장갑판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Messerschmitt  Bf 110C-3 Zerstörer

분 류

2인승 쌍발 장거리 전투기

동 력

다이뮬러 벤쯔 DB 601A 엔진 (1000마력 X 2)

최고 속도

시속 560km

항속 거리

1080km

무 장

기수   -   MG 17 7.92 mm 기관총 4정 (각 1000발)

              MG FF 20mm  기관포 2문 (각 180발)

후방석 -  MG 15 7.92 mm 기관총 1정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독일의 전격전에서 Bf 110은 주어진 임무를 충실하게 소화해냈다. 폴란드 상공에서는 적의 전투기, 폭격기를 만나는 족족 격추시켰으며 장거리까지 진출하여 적의 비행장을 공습하고 지상부대에 대한 근접 화력지원까지 실시할 수 있었다. 이후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도 독일 지상군을 원호하는 든든한 존재였으며 스투카와 함께 영국해군을 내몰았다. 이후 독일군이 프랑스를 석권할 때까지도 Bf 110은 계속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스투카가 그랬던 것처럼 제대로된 적 전투기들의 저항을 만나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Bf 110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그것은 항속거리가 짧은 Bf 109E를 대신하여 독일 폭격기들의 장거리 호위를 하는 것이었다. Bf 109E는 폭격기의 호위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이 적의 전투기들을 찾아다니면서 사냥하는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에 방어력이 취약한 독일 폭격기들이 영국의 허리케인이나 스핏화이어와 같은 고성능 전투기들로부터 보호되기위해서는 Bf 110이 주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야했다.

* 젤스퇴러의 시련 *

하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Bf 110은 스투카의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되었다. Bf 110은 자랑거리인 빠른 속도와 강력한 무장으로 영국 전투기들에게 맞설 수 있을 것으로 기대 되었다. 하지만 허리케인에 버금가는 빠른 속도를 가졌음에도 커다란 덩치로 인해서 기동성은 수준이하였는데, 이것이 큰 약점으로 떠올랐다. 적 전투기들보다 높은 고도에서 강하하면서 단숨에 화력을 집중하여 떨어뜨리는 작전이 Bf 110이 영국 전투기들에 대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만일 이 첫 번째 공격에서 적기를 명중시키는데 실패한후 속도를 잃고 근접 공중전이 벌어지는 경우에는 허리케인이나 스핏화이어의 조종사들에게 이 둔중한 적기는 손쉬운 먹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쉽게 말해서 영국 상공에서 Bf 110은 처음으로 임자를 만난 것이었다. Bf 110의 둔한 기동성으로는 영국 전투기에게 한번 꼬리를 물리면 절대로 뿌리칠 수가 없었고 가속력도 부족하여 일단 이런 상황이 되면 절망적이었다.

1940년 8월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의 ZG 1 제 3중대 소속의 Bf 110C-4/B형이다. 이 형은 550파운드 폭탄 2발을 장착가능했던 야보 (전투 폭격기)형이다.

영국 본토 항공전의 초기에 예상외의 큰 손실을 입은 Bf 110 부대는 취약한 후방의 방어를 위해서 서로 엄호를 해주는 원형 방어진을 구성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 서로 엄호를 하는데 신경을 쓰다보니 폭격기대에 대한 호위라는 본연의 임무에서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을 지키는데도 벅찬 상태였던 Bf 110의 조종사들이 폭격기에게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날렵한 스핏화이어의 조종사들은 이 한덩어리로 뭉쳐있는 Bf 110의 무리에 대해서 양떼를 쫒는 늑대처럼 농락했다. 날렵한 스핏화이어는 이 방어 원형진의 주위를 맴돌면서 한 대씩 격추시켰고, 운이 좋은 경우는 한차례의 사격으로 2-3대의 Bf 110에게 명중탄을 뿌릴 수도 있었다.

[ 런던시내 한복판에 떨어진 Bf 110C, 영국 본토항공전에서는 대부분의 기체들이 이처럼 처참한 운명을 맞게된다. ]

결국 Bf 110의 손실율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가자 독일 공군은 Bf 109E 부대를 이 Bf 110의 후방에서 엄호하도록 하는 궁여지책을 쓸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폭격기 호위를 위한 엄호 전투기들이 또다시 전투기들에게 엄호를 받는 웃기는 상황이 되 버린 것이다. 결국 이런 상황은 영국 본토 항공전의 후반기에 독일 공군이 빠진 전술의 와해 상황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결국 영국 본토 항공전은 독일 공군의 첫 번째 실패로서 기록되게 되었다. Bf 110의 피해도 엄청나서 전격전을 시작할 무렵 약 280여대가 배치되어 있던 것이 영국 전투가 끝나자 가동기수가 100여기 미만으로 줄어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Bf 110은 지중해, 북아프리카 그리고 동부전선으로 투입되어 적의 고성능 전투기가 없는 지역에서는 계속 일선기로서 어느정도의 활동은 지속하게 되었다.

* 밤의 사냥꾼으로 *

하지만 이 Bf 110에게도 무시할 수 없는 잠재력이 숨어있었다. 그것은 전쟁이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독일 점령지역에 대한 영국 폭격기들의 야간 폭격 작전에 대항하기위한 야간 전투기로서의 능력이었다. 2인승기라는 장점으로 밤에 적의 폭격기를 찾는데는 단좌기보다 적합했고, 오랜 체공시간과 모스키토를 제외한 다른 영국 폭격기보다는 빠른 시속 550km의 속도, 그리고 고유의 강력한 무장은 폭격기 요격에 매우 적합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1944년 스타데 지역이 주둔 하고 있던 독일 야간 전투기부대 소속의 Bf-110G-4d/R3형이다. 본기는 기수에 장착된 SN-2 기상레이더로 야간에 적의 폭격기를 스스로 찾아 파괴할 수 있었다. 레이더 조작수가 추가로 탑승하여 승무원은 3명이었다.

DB601E엔진을 장착하고 있던 Bf 110F형부터 이런 야간 전투기 임무에 본격적으로 투입되었다. 폭격기 공격을 위해서 Bf 110F-4형부터는 30mm 기관포 2문을 동체하부에 장비하게 되었다. 하지만 Bf 110 야간전투기의 가장 특이한 무장은 일명 슈래게무지크 (schräge musik)이라고 불리던 동체 상부에 전상방으로 경사지게 설치된 20mm 기관포 2문으로서 이것이 필살 병기였다.

[ 리히텐슈타인 기상 레이더를 장비하고 영국공군의 야간공습을 기다리고 있는 Bf 110G-4, 야간 전투기로 변신한 Bf 110은 독일공군의 야간전투기 부대에게는 최적의 항공기였다. ]

이 슈래게무지크는 야간 전투중 영국 폭격기의 바로 후하방으로 접근하면 영국 승무원들이 발견하지 못한다는 전투 경험에 착안한 무기였다. 따라서 영국 폭격기들을 발견하면 그들의 아래쪽으로 몰래 접근하여 영국 폭격기가 눈앞에서 바로 머리위로 왔을무렵 슈래게무지크를 집중 사격하여 폭격기의 배면을 벌집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비장의 무기가 최초로 실전에 몇차례 사용되었을 때 영국 폭격기 조종사들은 바로 옆을 비행하던 동료기가 갑자기 불덩어리로 변해 버리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는 독일군이 신형 고사포를 도입했다고 추측했을 정도였다.

 

Bf 110의 필살 병기 슈래게 무지크의 장착 위치 및 발사 모습을 보여주는 일러스트로서 적 폭격기 바로 아래에서 약간 뒤를 비행하면서 위쪽으로 발사하는 방식을 이해 할 수 있다. 독일 공군은 이 병기가 노출되지 않도록 예광탄을 절대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후 Bf 110은 계속 야간 전투기로 활약했는데 엔진을 더욱 강화한 Bf 110G형은 신형 37mm 기관포를 동체에 장비했으며 야간에서 적의 폭격기를 찾아내기위하여 리시텐슈타인 SN-2 레이더를 장비한 형도 출현했다. 이후 Bf 110G형은 1943년부터 종전때까지 독일 공군의 주요 야간 전투기로 계속 사용되었으며 압도적인 전력의 연합군에 대항해서 제 3제국이 멸망하는 시점까지 끝까지 싸웠다.

이 Bf 110의 에이스로는 '트론의 유령'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하인츠 볼프강 슈나우퍼가 유명한데 그는 종전때까지 계속 Bf 110으로 출격하여 연합군기 121기를 격추하여 야간 전투기부대의 신화적인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

◇ Heinkel He 100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5. 1. 5

 

foxmouse: 2005년의 첫 번째 업데이트로 He 100 이야기를 선정했습니다. 사실 불과 15기밖에는 생산되지 않은 너무나 마이너 아이템이지만 Bf 109와 경쟁을 했던 하인켈사의 He 112, 100에 대한 정보가 국내에는 거의 없는 것 같아서 기획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He 112, He 100에 대한 내용도 인기가 높은 Bf 109 스토리의 연장선상으로 보시면 더 재미있게 읽으실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해에는 불타는 하늘의 식구들에게 늘 좋은 일만 함께 하기를...!!!

오만의 댓가

1936년, 독일공군의 차기 전투기 사업에서 최종적으로 하인켈사의 He 112가 메서슈미트 Bf 109에게 패배가 확정되자 경합 초기만해도 승리를 낙관하던 하인켈사는 완전히 초상집이 되어 버렸다. 자국의 주력 전투기를 이름도 없는 신생 항공사에게 빼았겼다는 것은 스스로 독일 최고의 항공기 제작사라고 자부하던 하인켈사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하인켈사는 선정작업이 끝난직후 He 112의 실패원인에 대한 분석작업에 들어갔는데, 얼마뒤에 그들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He 112의 패배요인중 첫 번째로 지적된 문제점은 제작공정에서의 복잡성이었다. 유선형의 곡선으로 이루어진 동체와 커다란 타원형의 날개는 비행성능면에서는 탁월한 선택이었을지는 몰라도 직선으로 쭉쭉 뻗은 디자인의 Bf 109에 비해서 생산시간이나 비용이 훨씬 많이 들어간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경합초기부터 전반적인 성능면에서 Bf 109에 비해 약간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이점은 더욱 문제가 되었다.

두 번째 실패요인은 시험비행과정에서의 불미스런 사고로 인한 이미지의 손상이었다. 사실 시제기가 비행과정에서 사고를 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을지는 모르지만 비교적 순조로운 시험비행을 마친 Bf 109에 비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불미스런 사고가 빈발하면서 시험비행 조종사들 사이에 몇가지 나쁜 평판이 나돌게된 것이었다.

세 번째 요인은 라이벌이던 영국공군의 스핏화이어가 생산에 들어갔다는 첩보를 입수한 독일공군이 시간에 쫒긴 나머지 기존의 형에 비해서 더욱 성능이 향상된 He 112B의 성능을 충분히 검토하지도 않은채 Bf 109를 최종적인 승자로 정한후 대량생산을 급히 추진했다는 점이었다.

네 번째로는 신생 항공기 제작사였던 BFW를 너무 얕보았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제작하는 항공기마다 성공을 거두며 순항해오던 하인켈사는 스스로 어느정도 오만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어떻게 보면 이번의 실패는 오만의 댓가였다.

전혀 새롭게

이렇게 자신들이 내린 여러 가지 결론으로 볼 때 하인켈사의 입장에서는 스스로에게 운이 없었다며 위안할 수 밖에는 없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이 경합에서 탈락한 것은 어디까지나 운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하인켈이 아니었으니 이번에는 Bf 109를 완벽하게 뛰어넘는 전투기를 만들어 반드시 독일공군의 주력 전투기 자리를 차지하고야 말겠다는 강철과 같은 의지를 보이며 휘하의 연구진들을 독려했다. 사실 이무렵 독일공군이 훗날 Bf 109가 몇 년뒤 구식이 되 버릴  경우를 대비해서 보다 더 뛰어난 성능의 전투기의 개발을 은밀하게 추진할 것이라는  비공식적인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하인켈사로서는 일말의 희망을 걸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소문이었기 때문에 만일 독자적으로 전투기의 개발을 추진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독일공군측에서 개발을 중단하라는 명령이 떨어질 수도 있었으므로, 새로운 전투기의 개발은 하인켈사내에서는 절대적인 대외비로서 은밀하게 추진 되었다.

[ 또다시 Bf 109에게 도전하게 된 He 100의 원형 1번기 ]

또다시 새로운 전투기의 설계를 맡게된 하인켈사의 수석 설계사 발터 귄터는 He 112의 설계를 발전시키는 것 보다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전투기를 개발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는 He 112의 실패원인을 교훈삼아 이번에 제작하는 전투기는 제작공정이 최대한 간단하면서도 고속성능이 탁월한 기체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독일공군의 마음을 끌기 위해서는 Bf 109를 확실히 넘어서는 성능이었기 때문에 발터 귄터는 내심 이때까지 그어떤 기체도 넘어서지 못했던 시속 700km의 최고속도 기록을 넘어서는 초고속 전투기를 제작하여 독일공군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했다.

제작공정의 단순화를 위해서 전체 부품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우선 He 112에 사용된 유선형의 동체와 타원형의 날개를 포기하고 최대한 직선형으로 설계를 변경했다. 특히 기동성을 포기하면서 주익의 길이를 짧고 직선형으로 변형하여 많은 수의 부품을 줄일 수 있었으며 제작 시간도 짧아졌다. 이에 따라 He 112에서는 2885개의 부품과 26864개의 나사가 필요했었지만, 새로운 기체에는 969개의 부품과 11543개의 나사가 사용되도록 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고속성능을 얻어야 했으므로, 최대한 공기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서 조종석도 돌출된 부분이 없이 동체와 딱 맞도록 설계되었으며 Bf 109에 사용되던 수평미익의 지지대와 같이 공기저항을 유발할 수 있는 것들은 사용하지 않았고, 꼬리 바퀴도 완전히 동체속으로 인입되도록 했다. 주익의 길이도 축소되어 비교적 짧은 편이었던 Bf 109보다도 더 짧게 설계되었다. 이것은 이 새로운 전투기의 설계개념이 고고도 작전이나 기동성보다는 오로지 빠른 속도를 추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서 고속성능에 필요한 엔진의 출력을 최대한으로 늘리고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 그 어떤 전투기에서도 시도된적이 없었던 새로운 엔진 냉각방식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것은 냉각수를 최대한 기체표면 전체로 분산시키는 방법으로 순환시켜 냉각수의 온도를 최대한 낮추는 것이었다. 이 냉각방식에 따르면 고온의 엔진에서 온도가 올라간 냉각수가 동체표면으로 순환하다가 주익의 앞전을 따라 멀리 돌아서 다시 엔진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으로서 냉각수 파이프가 공기에 노출되는 면적이 증가되어 냉각 효율을 매우 높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며 저항을 유발하는 공기흡입구도 없어지는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지상활주시에는 주익으로 냉각수를 돌릴 필요가 없었으므로 작은 가동식 공기흡입구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어떻게 보면 모험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냉각계통이 복잡해지고 냉각수를 순환시키기 위해서 소형 모터가 22개나 필요했다. 게다가 냉각수가 주익까지 순환하다보니 냉각계통의 면적이 넓어지게되어 전투중에 냉각계통이 피탄될 확률이 높아질 수 있는 커다란 약점이 있었다. 단 한발의 기관총탄이라도 냉각계통에 손상을 입히면 냉각수가 유출되기 때문에 곧 엔진이 과열되어 전투기를 포기할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을 선도하던 발터 귄터가 1937년 3월 25일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불길한 사건이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그의 동생 지크프리트 귄터에게 넘겨지게 되었고 그는 최대한 빨리 이 전투기를 마무리하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이 새로운 전투기의 최종적인 윤곽이 드러났다. 이 기체의 주익은 수평으로 뻗다가 약간 위쪽으로 굽어지는 형태였으며 (마치 현대의 F-4 팬텀의 주익을 연상시키는 형태..), 주강창작치는 안쪽으로 접히도록 설계되어 완전히 펼쳐졌을 때 폭이 넓었기 때문에 지상 활주시 안정성이 높았다. 조종석은 He 112B의 돌출형 캐노피와는 전혀 달리 동체와 연장선상으로 설계되어 속도를 높이는 대신 시야는 불량해졌지만 Bf 109보다는 약간 시야가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1937년 10월, 원형기의 제작이 끝나자 하인켈사는 독일공군에 원형기를 테스트해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실 이기체는 He 113으로 명명될뻔했으나 이미 실패한 He 112의 개량형으로 비춰질 우려가 있다는 사장 하인켈의 지적에 따라서 서류 수정작업을 거쳐 He 100으로 명명된후 독일공군에 제출되었다. 이 계획은 당시 독일공군 항공기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던 에른스트 우데트가 하인켈사에 기회를 주는 식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원형기 테스트 과정에서는 언론에 He 112U (U는 Udet에서 따옴)으로 알려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1938년 1월부터 독일공군 주관으로 시행된 원형기의 테스트 과정에서 이 기체는 몇가지 문제점을 드러냈다. 우선 He 112에서부터 계속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비행시 수평 불안정성이 발생했으며, 주익의 익면하중이 높아서 착륙시에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에 시험비행 조종사들로부터 큰 불평을 샀다. 여기에 더해서 독일공군의 정비병들은 이 기체에 혁명적으로 채용된 표면냉각방식의 엔진 냉각장치가 야전에서 정비하기에 너무 복잡하고 엔진 카울링이 너무 꼭 맞게 제작되어 있어 엔진 정비시에 불편한 점이 많다는 지적을 했다.

[ 시험비행 도중 주기중인 원형 2번기 - He 100V2]

이런 불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원형기가 제작되었는데 이 기체는 1050 마력의 신형 DB601M 엔진을 장착하고 있었으며, 1938년 6월 5일의 테스트 비행에서 시속 635km라는 놀라운 속도를 기록했다. 이는 1937년 11월, 비슷한 엔진을 장착하고 있던 Bf 109V13 (훗날 Bf 109E로 발전하게되는 원형기)가 속도부문의 세계신기록을 수립할 당시의 기록인 시속 614km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기록은 당시 독일의 항공기술을 세계에 자랑하는데 여념이 없었던 각종 언론에 대서 특필되었지만, 테스트과정에서 냉각계통에 문제점이 발생했다는 보고서로 인해 독일공군측에서는 여전히 이 기체의 성능에 대해서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으며, 이 두 번째 원형기는 얼마뒤 사고로 손실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주익과 동체에 수정작업을 계속한 하인켈사는 원형기의 제작을 계속 추진했다. 이무렵 하인켈사의 특별 주문으로 He 100V3, V4에 시험적으로 장착된 DB601R이라는 강력한 엔진이 장착되어 속도 부문의 신기록을 계속 갱신했다. 이 엔진은 벤쯔사가 아직 실험단계로 추진하던 것으로 메틸알콜와 물의 혼합물을 주입하여 순간적으로 최대 1776마일까지 엔진 출력을 상승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물론, 이 엔진은 아직 과도기적인 것으로 수명이 짧고 정비와 운용에 어려움이 많아 아직 실용화되기에는 이른 것이었지만, He 100V4는 1939년 3월 30일에는 시속 746km라는 경이적인 속도를 기록했다.

(하인켈사가 끈질기게 도전해오자 이에 자극받은 BFW사도 오로지 속도 기록만을 의식한 Bf 109R을 개발했으며 이 기체는 시속 795km의 최고 속도를 기록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체는 Bf 109와는 전혀 다른 오로지 속도만을 위해 제작된 실험기로서 전투기로 사용될 수가 없는 기체였다. 이 기체는 훗날 Bf 209로 불리게 되었다. 하인켈사는 또다시 속도면에서 Bf 209를 넘어서는 기체를 개발하려고 했으나 독일공군측에서 주력 전투기의 제작사로 선정된 BFW사가 최고 속도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모양새가 좋다는 이유를 들어 하인켈사로 하여금 더 이상의 속도경쟁을 금지하도록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런 결과에 만족한 하인켈사는 이후 양산에 대비하여 정식으로 무장을 장착하는 He 100C 시리즈의 개발을 추진했다. 기체의 고정무장은 주익에 MGFF 20mm 기관포 2문과 엔진주위에 장착되는 4정의 MG 17 기관총을 장착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하지만 독일공군의 정식 전투기로 채용되리라는 하인켈사의 희망과는 달리 V1 ~ V10까지의 원형기들은 시험 비행과정에서 계속 발생하는 냉각계통의 트러블과 주강착장치의 오작동으로 골치를 썩고 있었으며, 결국 이로 인한 사고로 인해 V2, V3, V4, V6 원형기들이 파손되거나 손실 되었던 점으로 인해 기체 전체의 신뢰성이 아직 검증되지 못한 상태였다.

희망은 절망으로

하인켈사는 이 기체의 첫 번째 양산형을 He 100D-0형으로 명명하고 독일공군에 이 기체를 주력 전투기로 채택해 줄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이 D-0형은 조종석과 캐노피를 다시 디자인하여 조종사의 시야를 개선하도록 하고 방향 안정성을 위해서 수직 미익을 좀더 크게 디자인한 했으며, C형의 테스트과정에서 중무장으로 인한 과도한 중량 증가가 비행성능을 떨어뜨리는 점이 지적되어 무장은 엔진축의 20mm 기관포 1문과 기수의 MG 17 기관총 2정으로 축소되었다.

[ 시험 비행을 위해 날아오른 He 100D, 고속성능을 위해 철저하게 공기저항을 줄인 외형이 특징적이다. ]

하지만, 하인켈사의 희망과는 달리 아직 이 기체의 전반적인 성능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던 독일공군에서는 전혀 이 전투기의 발주를 요청해 오지 않았으며, 이에 실망한 하인켈사는 단지 3기의 기체만을 제작하고 생산을 중단했으며 발전형인 He 100D-1형의 생산을 추진하게 되었다.

He 100D-1형에서는 조종석을 좀더 개량하고 수평미익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약간 크게 설계했으며 그동안 가장 골치거리로 지적된 표면냉각방식의 냉각계통을 완전히 포기하기로 하고 가동식의 대형  공기흡입구를 가진 새로운 냉각장치를 장착했다. 이런 변화를 거친후 기체의 공기저항이 약간 증가되어 최고 속도는 시속 700km 미만으로 줄어 들었지만 비행안정성이 높아졌다. 무엇보다 고속성능에 더해서 항속거리가 약 1000km에 이르를 정도로 (Bf 109의 경우 약 600km) 장거리 비행이 가능했다.

 

Heinkel He 100D-1

엔진: 다이믈러 벤쯔 DB 601Aa (1175마력)

전폭: 9.41m

전장: 8.19m

전고: 3.60m

기체중량: 1810kg

최대중량: 2500kg

최대속도: 670km/h

최대고도: 36090피트 (11000m)

항속거리: 1050km

무장: MG17 7.92mm 기관총 2정 (기수) + MG FF 20mm 기관포 1문 (엔진축)

하지만 이 전투기가 생산되기 시작할 무렵에는 이미 서유럽에서 독일의 본격적인 군사행동이 시작되고 있었으며 야전부대에서는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신예 전투기의 수요량이 크게 증가했다. 게다가 BFW사도 세계최고 수준의 전투기인 Bf 109E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전시체제로 돌입한 독일공군 사령부는 이미 스페인 내전이후 야전에서 성능이 입증된 Bf 109의  생산량을 대폭으로 늘리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더욱이 Bf 109E는 참가하는 전투마다 최고의 성능을 과시하며 적국의 항공기들을 일방적으로 격추시키고 있었고, 독일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은 모두들 최고의 전투기인 Bf 109E에 탑승하는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런 정황으로 인해 독일공군은 오로지 Bf 109E에게만 찬사를 보냈으며, He 100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이 기체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또다시 발주를 받는데 실패한 것이다.

[ 정비중인 He 100D-1, 엔진 카울링이 지나치게 꼭 맞도록 설계되어 있어 정비사들이 엔진 정비를 위해 카울링의 해체나 조립을 시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

이제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어졌다. 포기를 모르던 하인켈사도 그들이 승부에서 졌으며, 이제는 전투기 개발 사업에서 손을 떼어야 할 시기가 왔음을 인정해야 했던 것이다.

뒷이야기

결국 제대로 날아보기도 전에 생산이 중단되는 불운을 맞이했지만, He 100D는 몇가지 흥미로운 뒷이야기를 남기게 된다.

[ He 100D-1의 컬러사진, 마치 실전배치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연합군을 기만하기 위해 촬영된 사진이다. ]

첫 번째는 독일공군이 적국 (특히 영국)에 대해서 자국 공군력을 과대하게 보이고 혼선을 유발시키려는 목적의 거짓 정보를 만드는데 사용된 것이다. 실제로 괴펠스가 이끄는 독일 선전성에서는 이 새로운 전투기가 야전부대에서 배치되었으며 대단한 성능을 가지고 있는 비밀 무기인 것처럼 과대선전을 했으며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리기 시작했다.

따라서 불과 15기가 생산된 He 100D에는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부대마크가 그려 넣어졌으며 마치 야전에서 작전중인 것처럼 보이는 사진이 촬영되었다. 물론 촬영이 끝나면 부대마크를 지우고 다른 마크를 다시 그려넣은후 다시 촬영했다고 한다.

독일공군의 선전용 잡지였던 '데어 아들러 (Der Adler)'에서는 이런 사진을 대대적으로 싣고는 이 전투기의 명칭은 He 113 (이것도 기만용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며 덴마크와 노르웨이 작전에서 실제로 전투에 투입되어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심지어는 He 100D의 야간 비행 훈련 장면을 촬영하여 이 전투기가 야간 전투기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내용의 허위 정보를 유포하기도 했다.

[ 야간 출격 장면을 담은 사진, Der Adler지에 실린 사진으로 이 역시 기만용의 연출된 장면이다. 워낙 그럴 듯해서 훗날 전쟁이 끝난후에 발행된 2차대전 관련 서적중에는 이 사진을 실제 독일공군의 야간출격 장면으로 잘못 기술한 경우가 많다. ]

당연하게도 이런 정보들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영국공군측에서는 이런 내용의 정보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장래에 자국에 큰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이 비밀 전투기의 실체를 알아내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특히 영국공군이 촉각을 기울인 부분은 이 전투기의 항속거리가 무려 1000km나 된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영국본토의 거의 절반이상이 행동반경에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항속거리는 사실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영국 첩보부는 이 전투기의 식별표까지 제작하여 영국공군 전투기부대에 배포했다고 하며, 훗날의 '영국본토 항공전 (Battle of Britain)'에서 일부 조종사들이 He 113으로 보이는 적기를 격추했다고 보고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He 100은 전혀 실제 전투에 참가하고 있지 않았다.

[ 연합군을 기만하기 위해 가짜 부대마크를 도색하고 실전 배치된 것처럼 촬영된 사진 ]

두 번째로는 외국으로 팔려나간 경우이다. 1930년대말 어느정도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소련이 신예 전투기를 개발함에 있어서 He 100 원형기들의 신기술에 관심을 보이게 되면서 원형기중 6기 (V1, V2, V4, V5, V6, V7)를 구입했다. 이 기체들은 소련으로 넘겨진후 소련 기술자들에 의해서 평가받았는데 그들은 획기적인 표면냉각방식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의 기술자들도 이 냉각방식은 실용화 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전투손상시 쉽게 손상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고, 결국 소련에서도 이 냉각방식은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일설에 의하면 소련은 이 원형기들의 공기역학적인 측면을 우수하게 평가하고 디자인을 모방했다고 하며 Lagg-3와 같은 신예 전투기의 설계에 적용했다고 한다.

독일과의 동맹관계였던 일본도 He 100D-0 전투기 3기를 구입했다고 하는데, 이후 이 전투기의 성능에 큰 인상을 받아 대량생산을 위한 세부계획까지 세웠다가 취소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전투기의 시험비행 과정에서 이 기체에 장착된 DB601 엔진의 높은 출력과 신뢰성에 큰 인상을 받은 일본육군 항공대는 훗날 같은 엔진을 사용하는 Ki-61 히엔을 개발, 생산하게 된다.

[ 기만작전이 끝난후 He 100D-1은 모두 하인켈 본사로 반납되었다. ]

나머지 12기의 He 100D-1은 독일공군의 선전작업이 끝난후 모두 하인켈사로 돌려보내졌으며, 하인켈사 자체가 운영하는 '공장 방어 비행대'의 He 112 전투기들이 수출된후 그 자리를 메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이 비행대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연합군 전투기들은 He 100D-1과 교전했다는 기록은 없다.

 

◆ He 100D 일러스트 ◆

 

1940년초 독일공군의 선전용 잡지이던 '데어 아들러'에 실린 사진을 근거로 작성된 일러스트, 마치 실전부대에 배치된 듯한 도색을 하고 있지만 이는 거짓 정보로 적국을 기만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달형상의 부대마크도 실제로는 사용된 적이 없는 가상의 전투비행대 마크이다.

 

역시 인위적인 기만용 도색을 하고 있는 He 100D-1, 이 기체의 그럴 듯한 부대마킹도 조작된 것이다.

 

마치면서

사실 He 100D의 경우 불과 3기의 He 100D-0와 12기의 He 100D-1이 생산되었을 정도로 소량만이 생산된채 더 이상의 개발이 중단되었고 실전을 경험한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2차대전의 전투기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He 112와 He 100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Bf 109가 독일공군의 주력전투기로 자리잡아 가는 과정에도 큰 도전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었으며, 그 그림자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다른 항공기 제작사들의 기체들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게 된다.

[ 미국의 한 항공박물관에 전시된 He 100D-1, 하지만 이 것은 실물이 아니라 모형이라고 한다. ]

사실 He 100D는 그 수치상의 성능으로는 당대 최고의 스피드를 가지고 있었으며,  만일 이 기체의 개발이 차라리 조금더 늦게 추진되었다면 Fw 190의 강력한 경쟁상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을 표현하는 전문가도 있다. 하지만 그 이유야 어떻든 간에 He 100도 역사속의 패자에 불과하며 이런식의 만일 ~ 했다면...의 이야기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역시 세상일이란 모두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며, 어느정도의 실력과 어느정도의 행운이 함께 따라주어야 한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 Heinkel He 112 ◇


This document was edited at 2004. 12. 9

전쟁의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아마도 ~ 했더라면...  ~ 했을 것이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접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들 실패한 쪽에서 나오는 이야기이며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접하게되면 그동안 눈여겨 보지 않았던 전쟁의 또다른 면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된다. 독일공군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다보면 이런 식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화제가 되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베일속의 전투기가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하인켈사의 야심작인 He 112이다.

이 전투기는 2차대전에서 독일공군의 주력전투기로 활약할 뻔한 기회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Bf 109에 가려 결국 전쟁의 주역이 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체를 살펴보면1930년대 후반 독일의 항공기술이 얼마나 발전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된다. 불타는 하늘 (airwar.hihomecom)의 Great War Planes... 이번회에서는 He 112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 Bf 109의 첫 번째 라이벌

흔히들 Bf 109의 라이벌이라고 하면 당연히 영국공군의 슈퍼마린 스핏화이어를 떠올리겠지만, 사실 Bf 109가 가장 먼저 넘어서야했던 라이벌은 같은 독일의 항공사였던 하인켈사의 He 112였다. 불타는 하늘의 항공전사나 Bf 109 스토리에서도 언급했지만, 1930년대 중반에 독일공군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차세대 전투기 선정사업에 경쟁기들로 참가했던 4개기종 (아라도사의 Ar 80V1, 바이예리쉐 플룩쪼이베어케 (Bayerische Flugzeugwerke, BFW)의 Bf 109V1, 하인켈사의 He 112V1 그리고 포케불프의 Fw 159V1)중에서 Bf 109와 He 112가 우수한 성능을 과시하면서 최종적인 경쟁기종으로 남아 최후까지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비록 최후의 승자는 Bf 109였지만 He 112는 여러 가지면에서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1930년대 초반, 독일의 군비를 제한하던 베르사이유 조약이 점점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하자, 독일내에서는 1차대전의 영광을 떠올리며 독일공군을 다시 창설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연합국의 감시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으므로 미래의 독일공군 조종사들은 수송기나 훈련기등의 기체를 이용해서 조종술을 연마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무렵 하인켈사는 독일의 여러 항공사들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항공기들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독일공군의 재창설 움직임에 따라 He 45, 46, 50과 같은 우수한 2인승 복엽기들을 제작하여 납품하고 있었는데 이 복엽기 시리즈의 결정판으로 완성된 He 51 복엽전투기는 매우 세련된 디자인과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최초로 날아올랐던 1933년 5월을 기준으로볼 때 영국공군이나 프랑스공군의 일선 전투기에 크게 뒤지지 않는 우수한 성능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He 51은  아라도사의 Ar 68과 함께 재창설을 선언한 독일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선정되었고 230여기에 달하는 기체가 생산되어 독일공군 조종사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 하인켈사의 초기 작품들 좌로부터 He 45, 46, 50 ]

하지만 이 He 51은 그 실전 배치가 시작될무렵 이미 구식이 되어 있었다. 이미 전세계적인 차세대 전투기의 흐름은 고기동성의 복엽기가 아닌 빠른 스피드를 주무기로하는 단발엔진의 단엽전투기로 구체화 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독일공군도 미래의 하늘을 장악하기 위한 차기 전투기 선정사업을 급히 추진하게 된 것이다. 하인켈사는 He 51의 뒤를 이을 후계기종을 제작하여 또다시 주력 전투기의 제작사가 되겠다는 야망에 불타올랐으며, 차기 전투기의 제작에 모든 정열을 쏟아붇게 된 것이다.

[ 하인켈사의 성공작 He 51, 이 세련된 전투기는 독일공군의 재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

1933년 5월 2일, 독일공군은 경합에 참가하게될 4개 항공기 제작사에 차세대 전투기의 요구사향을 담음 공문을 발송했다. 이 공문에는 다음과 같은 수준의 단좌 단발 단엽전투기를 제작해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 최고 속도는 고도 19500피트에서 시속 400km 이상이어야 하며 최고속도에서 20분 이상을 비행할 수 있어야 함.

2. 적어도 3정의 기관총을 장착하거나 (각 기관총당 1000발의 탄환을 탑재할 수 있어야 함) 1문의 20mm 기관포를 장착해야 함 (기관포에는 200발의 포탄을 를 탑재할 수 있어야 함).

3. 기동성과 상승력의 확보를 위해 익면하중이 1평방미터당 100kg 이하로 유지되어야 함.

4. 기체의 성능이 비슷할 경우에는 수평비행속도 > 상승속도 > 기동성의 순위로 평가될 것임.

사실 독일공군이 내건 요구조건은 당시 독일의 항공기술력을 감안할 때는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런 요구조건을 달성하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판단한 각 항공사들은 즉시 새로운 전투기들을 개발하게 되었다. 하인켈사에서는 형제였던 발터 귄터와 지크프리트 귄터가 이끄는 설계팀이 이 프로젝트를 떠맡게 되었다. 사실 미리 차기 전투기 사업에 대한 정보를 얻었던 하인켈사는 독일공군이 공식적으로 공문을 보내기 이전부터 비밀리에 프로젝트 1015라는 이름으로 이미 새로운 전투기의 설계를 시작하고 있었는데  귄터 형제는 공문이 도착하자마자 그들이 제작하고 있던 신예기에 He 112라는 새로운 명칭을 붙였다.

[ 최초의 원형기인 He 112V1 ]

He 112의 개발과정에는 하인켈사가 이전에 제작했던 수송용 항공기였던 He 70 블리츠의 제작 경험이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He 70 블리츠는 민영 여객항공사였던 루프트한자의 요청에 따라 4명을 승객을 탑승시킬 수 있는 단발 엔진의 여객/수송기였는데, 실은 미래 군용기의 개발을 위하여 여객기라기보다는 군용기의 개발요건을 따르고 있었다. (실제로 훗날 이 기체는 약간의 개조를 한후 스페인내전에서 정찰/폭격기로 사용된적도 있다.)

이 블리츠는 하인켈사가 미국 록히드사의 오라이언 우편배달기의 설계를 본따 제작한 것이었지만, 하인켈사가 제작한 최초의 단엽기였고 최초의 전 금속제 기체였으며 전반적인 성능이 매우 우수한 편이었으므로 귄터형제는 이 He 70 블리츠의 설계를 기반으로 새로운 전투기를 제작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 하인켈 He 112의 설계에서 밑거름이 되었던 He 70 블리츠, 이 기체의 설계는 훗날 독일공군의 주력 폭격기로 맹활약하게되는  He 111에게도 이어지게 된다. ]

따라서 He 112는 He 70의 여러 가지 특징을 물려받게 되었는데, 우선 전금속제 동체와 두쌍의 역갈매기형 주익, 모노코크 방식으로 제작된 동체를 가지게 되었다. 주 강착장치는 주익이 꺽이는 지점에서 바깥쪽으로 접혀들어가도록 제작되었고, 완전히 펼쳐졌을 때 폭이 9m로서 충분히 넓었기 때문에 지상활주시에 매우 안정적인 성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다보니 어떻게 보면 He 112는 He 70의 축소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He 112V1의 개방식 조종석과 후방시야가 좋지 못한 점등은 아직 복엽기 시대의 구식 디자인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으므로 경합에서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우려가 있었다.

최초의 원형기인 He 112V1은 1935년 9월 1일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애초에 He 112의 심장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던 융커스 유모 210 엔진이 아직 실용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형기에는 695마력의 롤스로이스 케스트랄 엔진이 임시로 장착되었다. 첫 번째 시험비행에서 애초의 기대보다는 최고속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경합 일정이 이미 코앞에 다가왔으므로 하인켈사는 이 기체를 즉시 트라베뮌데의 독일공군 비밀기지로 급히 파견하여 경합에 참가하도록 했으며, 이후 하인켈사는 몇가지 개선을 시행한 He 112V2, V3를 연속으로 제작하여 역시 경합에 참가하도록 했다.

[ 하인켈 He 112V2와 V3, 기체의 형태에 약간의 변화가 보인다. ]

차기 전투기 선정을 위한 성능시험은 1936년초에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는데, 경합에 참가한 4기의 시험기체들중에서 포케불프사와 아라도사의 기체들이 예상외로 낮은 성능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게 되면서 조기에 경합에서 탈락함에 따라 경합은 He 112와 Bf 109의 2파전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경합에서 패하다

사실 그동안 많은 우수한 항공기들을 생산하면서 널리알려졌던 하인켈사에 비해 BFW사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신예 항공기 제작사였다. 그러므로 하인켈사의 설계팀은 이 경합에서 자신들이 제작한 He 112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며 내심 BFW사를 깔보고 있었던 것이다.

본격적인 경합이 시작되면서는 융커스 유모 210 엔진을 장착하여 속도가 약간 더 빨라진 He 112V2과 추가적인 개량을 가한 He 112V3가 나섰는데, 경합이 시작되자 두 전투기의 장단점이 점점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큰 날개를 가졌던 He 112는 선회성능에서 우수했지만 속도면에서는 Bf 109가 거의 모든 고도에서 우세한 성능을 보였다. 하지만 급강하와 급상승으로 이어지는 여러 가지 거친 기동 시범에서도 Bf 109의 우세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어지는 스핀 테스트에서 Bf 109V2가 아무런 무리없이 테스트를 통과한 반면 He 112V2는 스핀에서 회복하는 단계에서 불안정성을 보이다가 결국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에 놀란 하인켈사는 급히 기체를 수리하여 다시 스핀 테스트를 받게 했으나 이번에도 다시 추락하고 말았다.

여기에다가 바다건너 영국에서 전해진 첩보가 이 경합과정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첩보의 내용은 바로 독일공군이 내심 운명의 라이벌로 여기고 있던 영국공군이 곧 차세대 전투기인 스핏화이어를 대량 발주했으며 곧 이 전투기의 대량 생산을 추진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은 독일공군 수뇌부의 마음을 다급하게 만들었고, 괴링은 하루빨리 경합을 마무리짓고 차세대 전투기를 선정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사실 영국공군측에서도 독일공군이 차세대 전투기를 이미 개발했다는 첩보에 따라 스핏화이어의 개발을 급히 추진했었다. 이런 양국의 경쟁 관계가 훗날 스핏화이어와 Bf 109라는 희대의 라이벌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보인 것이다.) 그리고 결국 독일공군에서는 그동안 성능 테스트를 무리없이 통과한 유일한 기종인 Bf 109를 일단 최우수 전투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결정은 아직 잠정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하인켈사는 아직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더구나 독일공군내에는 아직 하인켈사에 호감을 가진 고위간부들이 많았기 때문에 하인켈사에게 일단 성능 개량을 계속 추진할 기회를 준 것이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귄터 형제는 다시 몇가지 성능 개량 작업에 들어갔으며 이른 바 zero 시리즈라 불리는 He 112A-0 원형기 15기를 다시 제작했다.

[ 양산형으로 계획되었던 He 112A-0, 여전히 개방식 조종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

이 He 112A-0 시리즈의 기체들은 원래 하인켈사가 주력전투기로서의 정식채용이후 대량생산을 목표로 설계를 추진했던 기체들인데, 사내의 기호로는 He 112V4 ~ V8에 해당되는 기체들로서 기본적으로는 출력이 더 향상된 유모 210Da 엔진을 장착하고 있었으며 시리즈의 마지막 기체인 He 112V8의 경우에는 당대 최고의 엔진이던 다이믈러 벤쯔 DB600A 엔진을 장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Zero 시리즈는 버전이 올라갈 때마다 몇가지 개량이 가해지고 성능도 좋아졌지만 BFW사도 Bf 109를 계속 발전시키고 있었으므로 이 Zero 시리즈의 기체들역시 계속 발전하고 있었던 Bf 109V시리즈의 성능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 1936년 10월 독일공군은 최종적으로 BFW사의 최종적인 승리를 선언하기에 이르른다.

[ 하인켈사의 공장에서 He 112를 조립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 ]

사실 지금까지도 이 경합과정에서의 패배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거론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하인켈사가 경합에 투입한 He 112의 시제기들은 거의 모든 기체들이 이전 버전에 비해 조금씩 달라진 비행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시험 비행 조종사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모든 변형들이 모두 Bf 109를 능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험비행기간 내내 He 112는 측면 안정성에 문제를 드러냈다고 하는데 개량형들에게서 보이는 다양한 수직 안정판들의 사진들에서 이 점을 알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 테스트 기간내내 He 112를 계속 괴롭힌 측면 안정성을 해결하기 위해 수직안정판과 러더에 많은 수정이 가해졌다. ]

그리고 무엇보다 경합당시에 시험비행과정에서 결국 사고로 이어진 스핀테스트에서의 불안정성이 He 112의 이미지에 가장 큰 결정타를 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여기에 더해서 사실 하인켈 He 112는 Bf 109보다 더 세련되고 발전적인 기체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발전적인 구조로 인해 기체 제작시에 복잡성이 증가하게되고 결국 높은 제작단가를 초래하며 제작에 필요한 시간이 길어져서 결국 대량생산의 효율성을 떨어지게 만든다는 지적을 받게 되면서 약간 더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대량 생산이 용이한 것으로 평가받은 Bf 109쪽으로 대세가 기울었다는 의견도 타당성을 얻고 있다.

* 포기는 없다

최종적으로 쓰라린 패배를 받아들이게된 하인켈사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He 112의 성능을 더욱 발전시켜 Bf 109를 능가하도록 만든다면 결국 독일공군이 어느정도의 기체를 발주하게 될 것 이라는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체 개발비를 들여 He 112를 계속 발전시킬 예정이었던 것이다. 우선 기존의 zero 시리즈를 양산형으로 전환시켜 양산기의 생산 체재로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6시는 각각 He 112A-01 ~He 112-06으로 명명된후 다양한 용도의 시험비행이나 에어쇼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특이한 것으로는 He 112A-05, 06의 기체들에게 일본해군이 관심을 보여 1937년 일본으로 수출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 더해 하인켈사의 집중적인 로비로 독일공군에서 약간의 추가적인 기회를 주기로 함에 따라 희망은 커져만 갔다. 독일공군에서는 만일 He 112가 더욱 개선되어 Bf 109를 능가하는 경우에는 주력 전투기로 발주할 수도 있다는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 He 112A-0과 He 112B형의 측면도, 마치 전혀 다른 기체처럼 느껴질 만한 파격적인 변화가 느껴진다. ]

이에 따라 하인켈사는 기존의 He 112-A 시리즈의 생산을 중단하고 전면적인 기체의 재설계에 들어가 여러 가지면에서 일신한 면모를 가진 He 112-B 시리즈의 개발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사실 He 112-B형은 A형에 비해서 완전히 달라진 기체로서 이 B형에 이르러서야 Bf 109의 진정한 경쟁기 자격이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될 정도였다.

[ He 112의 기수에 장착되는 MG 17 기관총을 잘보여주는 사진, Bf 109와 달리 기수의 양 측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우선 외형에서는 동체의 전면적인 재설계로 보다 공기역학적으로 우수해졌으며 새롭게 설계된 수직안정판과 러더가 장비되고, 개방형 조종석도 폐쇄식으로 전환되었으며 기존형에 비해 Bf 109의 그것에 비해 후방 시야가 탁월한 돌출형 캐노피가 도입되었다. 기체의 무장능력은 각 500발의 탄환을 탑재할 수 있는 7.92mm MG 17 기관총 2정을 기수에 장비하고 주익에 각 60발의 포탄을 가진 MG FF 20mm 기관포를 2문 장비하여 Bf 109에 손색이 없었다.

[ He 112B의 외형을 잘 보여주는 사진, 특이한 티원형의 역갈매기형 주익과 공기역학적으로 설계된 동체, 시야가 좋은 돌출형 캐노피등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

그러나 이 신형기와 궁합이 맞는 엔진을 찾는 과정에서 몇가지 문제가 발생하여 완성단계까지 이르지 못하고 개발이 지연되었다. 이 과정에서 DB 600Aa 엔진을 장착한 He 112B (He 112V9)이 고도 13500피트에서 시속 485km의 최고속도를 기록하여 당시 BFW사가 양산기로 내놓은 Bf 109B-2를 상회하는 성능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개발과정이 한창 진행되던 1936년, 현대화를 한창 진행중이던 독일공군은 독일공군 전투기부대를 빨리 최신 전투기로 편시켜야 했기 때문에  이미 대량생산 체제로 들어간 Bf 109의 실전배치를 대대적으로 추진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하인켈사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주력전투기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독일공군내의 촉박한 분위기 때문에 아직 신뢰성이 입증되지 못하고 언제 대량생산이 가능할지 모르는 He 112-B 시리즈를 주력 전투기 선정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시키기로 한 것이다. 당시 차기 전투기의 개발, 배치사업을 주도하고 있었던 에른스트 우데트는 이미 성능이 입증되고 빠른 생산이 가능했던 Bf 109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일선의 독일공군 전투기부대에게 공급하는 쪽으로 정책결정을 일단락 지은 것이다.

[ He 112 시리즈의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일러스트 ]

 

해외로의 수출

그는 하인켈사에게 공식적으로 공문을 보내 이미 독일공군의 주력전투기는 Bf 109로 결정되었으니 하인켈사는 He 112-B를 해외 수출용으로 개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권유를 했다. 하인켈사로서는 정말로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미 엄청난 개발비를 쏟아부었기 때문에 이 전투기를 해외에 판매해서라도 어느정도 자금을 회수하는 것이 바람직했던데다가, 이무렵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구식 복엽기들을 대체할 새로운 전투기가 필요했다. 특히 전투기의 개발능력이 없었던 국가들이나 독일의 선진기술에 눈독들이던 국가들에서는 He 112-B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He 112-B의 해외판로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 해외의 여러나라에서 사용된 He 112B의 일러스트, 위에서부터 헝가리, 루마니아, 스페인의 기체이다. 스페인 공군의 경우 주익의 국적마크로 독일공군 콘돌군단과 식별이 된다. ]

이에 하인켈사는 본격적인 유럽 순회비행에 나서게 되는데, 많은 나라에서 시범비행을 실시하여 He 112-B의 선전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수출 작업도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아서 일본에 4기가 판매된 것을 시작으로 스페인, 루마니아, 헝가리등에 수십기의 He 112를 판매하는데 그치게 된다.

 

Heinkel He 112B-1

엔진: 융커스 유모 210G (700마력)

전폭: 9.10m

전장: 9.22m

전고: 3.82m

기체중량: 1627kg

최대중량: 2248kg

최대속도: 510km/h (고도 4,120m)

최대고도: 31200피트 (9500m)

항속거리: 1150km

무장: MG17 기관총 2정 (기수, 각 500발) + MG FF 20mm 기관포 2문 (주익, 각 60발)

 

수데텐 사건과 스페인내전

하지만 독일공군이 He 112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938년 체코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던 수데텐 지방에서 이 지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군사적인 긴장상태가 높아지자 히틀러는 이 지역에 독일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서 신생 독일공군을 대대적으로 파견하여 위압감을 조성하려 했다. 하지만 아직 일선에는 Bf 109로 무장한 독일 전투기부대의 숫자가 매우 부족했으므로 당시 일본에 수출되기 위해 완성된 12기의 He 112B 전투기들이 항구에서 선적을 기다리고 있는 단계에서 독일공군에 의해 차출되어 JG 132 4중대로 급히 배속된후 수데텐 지역으로 이동했다.

[ 수데텐의 위기상황으로 인해 잠시나마 독일공군의 제식 도색을 할 수 있었던 He 112B 전투기들 ]

사실 이런 수데텐 지역에서의 위기상황은 하인켈사로서는 He 112B의 재평가를 받게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만일 이 지역에서 군사적인 충돌이 벌어졌다면 He 112 전투기들은 실전에서 성능을 검증받을 기회가 있었을지도 몰랐지만 아쉽게도 독일이 군사력을 과시하자 수데텐 지역에서의 위기상황은 싱겁게 끝나 버렸으며 Bf 109C의 실전배치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자 모든 He 112B 전투기들은 실전에 투입될 기회도 가지지 못하고 다시 하인켈사로 반환되었다. 게다가 이렇게 일본 수출작업이 지연되는 동안 미리 인도받은 4기의 기체를 테스트해본 일본해군측에서 성능은 우수하나 일본해군이 필요로하는 전투기의 용도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이유로 남은 선적분의 인수를 취소하게 되면서 수데텐 위기상황은 하인켈사에게 있어서 실전투입 기회도 얻지 못하고 일본 수출작업도 좌절되 버리는 2중의 악재가 된 것이다.

일본으로의 수출이 좌절된 기체들은 하인켈사의 본사에 남겨진후 하인켈사가 자체적으로 운용하는 공장 방어 비행대에서 운용되었다고 한다. 이 비행대는 하인켈사에 고용된 민간 조종사들이 전투기의 조종을 맡았으며 실전에는 참가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 스페인에 파견되어 콘돌군단 소속으로 활약한 He 112B, 그러나 스페인 내전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기록하지 못했다. ]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스페인 내전에도 적은 수의 He 112B가 하인켈사의 요청으로 콘돌 군단에 파견되었다. 하인켈사에서는 실전에서 He 112B의 우수한 성능이 검증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투입된 기체들을 모두 무료로 독일공군에 헌납했다.

하지만 콘돌군단의 전투기조종사들은 대부분 Bf 109를 조종해보기를 갈망하고 있었고 He 112에 대해서는 Bf 109보다 떨어지는 성능의 전투기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콘돌군단 사령부는 He 112B를 공중전 임무에 사용하지 않고 지상공격임무에 주로 투입했다. 지상공격 임무에서는 어느정도 활약을 했지만 이 전투기는 지상공격을 전문으로 하는 기체가 아니라 공중전을 위해 태어난 기체였으므로 Ju 87 슈투카나 Hs 123과 같은 지상공격기들의 후광에 가려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었다.

[ 스페인 내전중의 스냅, 좌측에는 He 51 복엽기들이 보인다. ]

오히려 스페인 국민당군에 공여된 He 112B 전투기들이 공중전에 투입되곤 했는데 이때 공중전에서 스페인 조종사가 공화당군의 I-16 전투기를 1기 격추시켜 이 전쟁에서 He 112B가 거둔 유일한 공중전 승리를 기록하기도 했다. 스페인 내전에서도 He 112B에게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으며 오히려 Bf 109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독일공군 최강의 전투기로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 He 112 일러스트 ◆

 

1937년 수데텐 위기상황으로 인해 급히 독일공군에 차출되어 JG 132 전투비행단 4연대에 배속된 He 112B-1, 그러나 이 상황이 싱겁게 종료되면서 결국 실전에 투입되어 보지도 못하고 얼마뒤 Bf 109C에게 밀려나면서 하인켈사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말았다.

 

1937년 콘돌 군단소속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던 He 112B-1, 스페인 내전에서도 He 112B는 제대로 공중전에 투입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마무리하면서...

He 112는 항공전사에서 길이 기억될 치열한 경쟁에서의 패배자로 기억될 전투기였지만 아직도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하인켈사의 설립자인 에른스트 하인켈을 비롯한 하인켈사의 관계자들은 이 경합은 공정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자기들에게는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고 강변했으며, 심지어는 메서슈미트사와 독일공군과의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해 He 112가 빛을 보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루마니아 공군 소속의 He 112B, 루마니아는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He 112를 사용했다. ]

하지만 분명한 것은 He 112는 Bf 109에게 항상 성능면에서 약간씩 떨어졌다는 것이었고, 치열한 생존경쟁에서는 최고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좋은 예가 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Bf 109와 동시대에 태어난 것이 그 저주받은 운명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만일 이 전투기가 조금이라도 일찍 태어났더라면 영국공군의 허리케인과 스핏화이어의 관계처럼 최소한 Bf 109와 함께 독일공군의 양대 주력전투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훗날 하인켈사는 이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He 112의 뒤를 있는 보다 뛰어난 전투기인 He 100을 제작하여 또다시 Bf 109의 아성에 도전하게 되는데 이 He 100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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